2주 전 본지의 설문에 응답한 일이 있다. 한국영화 사상 최고의 여자 캐릭터를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충녀>의 윤여정과 <밀양>의 전도연,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그리고 마지막으로 <깊은 밤 갑자기>의 김영애를 꼽았다. 어쩌면 식상해질 게 빤한 이 리스트에 <깊은 밤 갑자기>의 김영애를 거론한 것에 대해 내심 기분이 좋아졌다. 조만간 영화를 다시 한번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답을 보내고 나서 하루 이틀이 지난 날이었다. 김영애 선생님의 부고가 들려왔다. 차를 갓길에 세우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나는 그날 밤 <깊은 밤 갑자기>를 다시 꺼내보았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그리고 무시무시했다.
한국의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의 공포영화들을 돌아보면 공통점이 발견된다. 거의 대부분의 영화들이 <하녀>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게 그렇다.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기록적인 흥행을 했을뿐더러 이후 시리즈처럼 이어진 <화녀> <충녀> <화녀 82> 또한 시장과 평단으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었다. 탄탄한 중산층 가정, 외부에서 들어온 젊은 여자, 신분 상승과 더 젊은 육체를 둘러싼 욕정, 질투의 심화, 가정의 파탄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구조는 한국 관객에게 수차례에 걸쳐 증명된 흥행 공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공포영화들이 좇아갈 수밖에.
고영남 감독의 1981년 작품 <깊은 밤 갑자기>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이 젊은 여성을 데리고 들어와 가정부로 고용하고, 아내는 미쳐간다. 그런데 이 영화는 <하녀>의 다른 아류작들과는 많이 달랐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깊은 밤 갑자기>는 80년대 한국 공포영화의 가장 빛나는 성취다. 이야기의 무게중심을 ‘하녀’ 캐릭터에서 ‘미쳐가는 아내’에게 옮긴 이 영화는 조금씩 미쳐가는 아내의 모습을 통해 관객을 충격과 혼돈에 빠뜨렸다. 특히 완전히 미쳐버린 아내의 모습을 표현해낸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말 그대로 충격적이다. 고영남 감독도 자신이 만들어낸 이 마지막 장면이 내심 마음에 들었는지 훗날 <여자, 여자>에서 똑같이 반복해 사용했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마지막이 분명히 어딘가에서 표절한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다. 이렇게 훌륭한 아이디어가 갑자기 어디서 튀어나왔겠는가. 게다가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인 1980년의 <괴시>가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완전한 표절이라는 걸 알아낸 직후였기 때문에 더 의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다리오 아르젠토나 루치오 풀치의 영화에서 비슷한 장면을 본 것도 같았다. 그러나 당시 몇 개월에 걸쳐 뒤져본 결과 나는 <깊은 밤 갑자기>의 오리지널리티를 의심할 만한 어떤 증거도 찾지 못했다.
<깊은 밤 갑자기>에서 ‘미쳐가는 아내’ 캐릭터를 연기한 것이 바로 김영애다. 그녀가 정말 미친 것인지, 아니면 남편이 무언가를 속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이 관객을 혼란에 빠뜨리는 김영애의 연기는 놀랍다. <깊은 밤 갑자기>의 김영애는 <샤이닝>의 잭 니콜슨에 비견할 만하다. 농담이 아니다. <깊은 밤 갑자기>가 <화녀 82>나 <여곡성>을 제치고 80년대 가장 훌륭한 공포영화가 될 수 있었던 건 온전히 김영애의 공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남편은 저명한 곤충학자다. 그는 며칠이고 산으로 들로 곤충 채집을 나갔다가 돌아와 동료 교수들을 불러 채집한 표본들과 사진을 보며 토론을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번에도 나비 채집을 위한 출장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동료들과 함께 희귀한 나비들의 사진을 감상한다. 그런데 나비들의 사진 중에 이상하게 생긴 여자 목각인형의 사진이 섞여 있다. 하얀 옷을 입고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간다. 그러나 목각인형의 사진을 본 아내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을 떤다.
또다시 출장에 나섰던 남편이 돌아온다. 그런데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다. 미옥이라는 이름의 젊은 여자를 데리고 돌아왔다. 채집을 위해 지방을 돌아다니던 중, 무당인 어머니와 사당이 불에 타 갈 곳이 없어진 미옥을 발견하고 딱하게 여겨 데리고 왔다는 것이다. 이게 뭔 말도 안 되는 설명인가 싶은데 아무튼 아내는 마침 집에 일손이 필요했는데 잘됐다며 기뻐한다. 미옥을 데리고 들어가 씻기던 아내는 그녀의 젊고 숨막히게 아름다운 몸에 감탄한다 (미옥은 80년대 활동하다가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진 배우 이기선이 연기하고 있다. 그녀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를 쓸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미옥의 짐을 정리하다가 목각인형을 발견한다. 얼마 전 남편의 나비 사진들 가운데 섞여 있었던 바로 그 사진 속의 목각인형이다. 아내는 다시 한번 불안과 공포를 느낀다.
이날부터 아내는 남편이 자기 몰래 미옥과 집 안에서 정사를 나누는 환상을 보게 된다. 그것이 환상인지 진짜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건 아내의 몸과 마음이 점점 더 망가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아내는 작심을 하고 건물 꼭대기층에서 창문을 닦고 있던 미옥을 떨어뜨려 죽인다. 그리고 사고로 위장한다. 그러나 미옥이 죽고 나서도 아내의 광기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급기야 아내는 미옥의 귀신을 보기 시작한다. 목각인형처럼 차려입은 미옥의 귀신이 나타나 아내를 공격하는 것이다.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내리치는 밤, 아내는 미옥의 귀신과 마지막 결전을 벌인다. 다음날 집에 귀가한 남편은 엉망이 된 집을 보고 크게 놀란다. 방문을 열고 남편이 발견한 건 목각인형과 똑같이 차려입고 앉아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아내다.
영화를 보면 언뜻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진행되고 있지만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따져보면 간단하다. 출장에 나섰던 남편이 무당집에서 민박을 했다가 목각인형 사진을 찍게 되고 그날 밤 무당의 딸 미옥과 정사를 갖는다. 그리고 다음 출장 때 미옥을 데리고 집에 돌아온 것이다. 남편은 실제 미옥과 집에서 관계를 가져왔고 아내를 미친 사람으로 몰았으며 아내는 실제로 조금씩 미쳐갔다. 목각인형은 미옥을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신비한 물건이다. 아내는 결국 미옥의 원한이 깃든 목각인형과 싸우다가 그에 잠식되어버린다.
<깊은 밤 갑자기>는 여러모로 좋은 운을 타고난 영화다. 좋은 이야기가 있고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하지 않는 훌륭한 연출자가 있었다. 무엇보다 특별한 배우들이 있었다. 남편을 연기하며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윤일봉과 미옥을 연기한 이기선의 신비한 아름다움은 이 영화의 묘한 분위기에 크게 일조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역시 아내를 연기한 김영애였다. 결코 증명할 수 없는 남편의 부정과 미옥의 젊음 앞에 당장이라도 혼절할 듯 넌더리를 내며 천천히 정신을 놓아버리는 그녀의 가공할 만한 연기는 <깊은 밤 갑자기>에 ‘걸작’이라는 수사를 더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김영애는 내가 기억하는 한 가장 여러 번 ‘엄마’였던 배우다. 그녀를 떠올리는 데 가장 어울리는 건 어쩌면 그녀가 엄마였던, 바로 그 애틋하고 안쓰러운 공감의 순간들을 추억하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가장 애틋하고 안쓰러운 공감의 순간 대신에 그녀가 가장 파괴적이고 매혹적이었던 절정의 순간을 꼽고 싶었고, 그래서 <깊은 밤 갑자기>로 이렇게 그녀를 추억한다. 나는 그녀를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김영애 선생님 고맙습니다. 안녕히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