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직접 나서서 민가에 떠도는 흉흉한 소문과 미스터리한 사건을 해결하는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왕 예종(이선균). 사관의 역할에만 충실하고 싶은데 놀라운 기억력을 인정받아 왕의 비밀 수사에 동원되는 신입 사관 이서(안재홍).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이 두 캐릭터를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 버디무비다. 문현성 감독은 허윤미 작가의 동명의 원작 만화에서 캐릭터 설정만 빌려왔을 뿐 영화의 내용은 온전히 새롭게 채웠다. 남북 탁구 단일팀을 소재로 한 영화 <코리아>(2012)로 데뷔한 그는 이번엔 감동이 아니라 웃음으로 영화를 끌고 간다. 시대극의 고정관념을 깨기까지, 코미디의 노선을 지켜내기까지 문현성 감독이 감독수첩에 고민하며 적어두었던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았다.
-원작은 순정 만화였는데 영화화하는 과정에서 순정 만화의 느낌은 살리지 않았더라. 원작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뭐였나.
=호기심을 자극했던 건 인물 설정이었다. 왕과 사관, 두 캐릭터 사이의 신분 차가 굉장히 크지 않나. 마치 회장님과 신입 인턴사원 정도의 격차인데,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두 인물이 계속 붙어다녔을 때 오는 재미가 있더라. 이들에게 어떤 상황을 던져줘도 되겠다, 거기서 오는 의외성이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원작에선 설정만 가져왔다. 순정 만화가 내 취향이 아니어서가 아니라 굳이 같은 내용을 만화로 봤는데 영화에서 그대로 반복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기왕 영화로 만들 거면 원작과는 다른 버전을 만드는 게 낫다고 판단해서 처음부터 과감하게 세부 내용을 바꿨다.
-사건을 추리해가는 진지한 상황에서도 코미디를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에서도 무게 잡지 않아서 좋았다.
=그 부분을 시나리오 작업에서부터 철저하게 의도했다. 대부분의 사극에서 왕과 대신들은 사이가 좋지 않은데, 그 대립관계를 몇신 그리다보면 어느새 분위기가 심각해진다. 그렇게 흘러가게 하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썼다. 너무 심각해질 것 같으면 분위기를 풀어주고, 또 심각해지면 풀어주고, 그런 패턴을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 작업을 했다. 편집도 그런 방향으로 했고. 이 작품이 정통 사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설계가 가능했던 것 같다. 그리고 무게를 잡고 싶어도 그럴 만한 게 없었다. 거창한 메시지가 있는 영화도 아니고, 예종의 대단한 리더십을 보여주는 영화도 아니니 무게를 잡아봤자 얼마나 잡겠나. 처음부터 그런 욕심은 없었다. 이 이야기는 힘 빼고 편하게 놀아야 관객이 재밌게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극이면서도 현대물처럼 느껴지는 지점들이 있다. 신입 사관이 처한 상황이 신입사원의 처지와 닮았다든지.
=시나리오 작업하면서 떠올린 작품들이 <머니볼>(2011),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2015) 그리고 히어로영화들이었다. 일종의 수행비서 역할인 직제학(주진모)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것도 원작에는 없다. 배트맨 곁에 알프레드 집사가 있듯이 예종의 곁에도 그런 인물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만든 캐릭터다. 사극보다는 요즘 영화에서 힌트를 많이 얻었다. 조선시대가 배경이고 임금과 사관의 이야기지만 사극이라는 생각을 하고 만들진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사극이라고 하면 <관상>(2013), <광해, 왕이 된 남자>(2012), <사도>(2014) 같은 영화들이 생각나는데, 이 영화는 그런 작품은 아니니까. 그러다 보니 조금은 새롭고 낯선 레시피가 완성된 것 같기도 하다.
-인물들의 현대적 말투나 역사적 고증에 크게 의존하지 않는 등 사극의 틀을 깨려는 시도가 많이 엿보인다. 이서 캐릭터야 충분히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이지만 예종의 경우 역사에 존재하는 왕인데도 영화적 캐릭터로 그려냈다.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사극이라면 이렇게 말을 하고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기본값이 입력돼 있는 것 같은데, 그 사극 말투라는 게 어디에서 왔는지 알 수 없고 그 말투를 들어본 것도 아니어서 우리 방식대로 밀고 나갔다. 사실 촬영 직후 2~3주 동안은 적응기였다. 사극이라는 틀에 크게 구애받지 말자는 작전을 세웠는데도 막상 현장에서 작전대로 하니 어려움이 있었다. 알게 모르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들이 작전이랑 충돌했던 거다. 이래도 되나?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탭뿐 아니라 배우들과도 촬영 2~3주 동안 계속 회의를 했다. 그러다 결국은 좀더 편하게 해보자, 자신감 있게 해보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랬기 때문에 지금의 코미디가 나올 수 있었던 것 같다. 사극이라는 부담과 걱정을 계속 안고 갔다면 현장에서 심적 부담도 컸을 테고 그랬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영화가 완성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통 사극을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는 허용범위를 넘는 지점들이 보일 수 있는데, 나는 좀더 과감하게 해보고 싶었다. 배우들도 그 노선에 흔쾌히 동참해줬고. 사극이라고 매뉴얼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우리가 상상한 것들을 자유롭게 시도한 결과물이 지금의 영화다.
-원작 만화의 두 주인공은 순정 만화의 전형적 꽃미남인데, 이선균과 안재홍은 물론 좋은 배우들이지만 꽃미남 유형으로 묶이진 않는다. 캐스팅 과정에서 어떤 배우들의 조합을 원했나.
=당연히 사전에 여러 조합들을 상상해봤다. 당연히 꽃미남 조합도 있었고. 그러다 이선균과 안재홍 두 배우의 이름이 나왔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호기심이 동하는 조합이더라. 신선하지 않나. 주변 사람들에게 의견을 물어봤는데 반응이 좋았다. 이게 나만의 호기심은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캐스팅에 들어갔다. 전작인 <코리아> 때 하지원과 배두나 두 배우를 캐스팅하면서도 그랬지만, 나는 의외의 조합이 재밌다.
-엔딩을 보면 시리즈를 염두에 둔 게 아닌가 싶은데.
=시리즈에 대한 얘기가 사석에서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온 적은 있다. 그때마다 나는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렸다. (웃음) 아직 1편도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감독으로선 부담이었다. 캐릭터가 모두 모여 끝나는 에필로그는 촬영하면서 쓴 내용이다. 에필로그가 될지 보너스 영상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재밌을 것 같았다. 다음편을 염두에 두고 만든 건 아니었는데 주변 사람들이 예종과 이서뿐만 아니라 직제학, 흑운(정해인), 선화(경수진)를 다들 보고 싶어 하더라. 그래서 에필로그에 모두 한데 모은 장면을 넣었다.
-2편 연출 제안이 온다면 맡을 의사가 있나.
=적당히 에피소드만 바꿔서 속편을 만드는 방식이라면 관심이 없다. 시리즈를 계획한다면 파격적인 무언가를 시도해야 할 것이다. 만약 내가 하게 된다면 그런 변화를 수반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준비 중인 다른 이야기가 있다면.
=지금 준비 중이다. 감성적인 영화를 만들고 싶다. <임금님의 사건수첩>을 하면서는 영화적 재미를 추구하려 했고, <코리아> 때는 그게 재미가 아닌 의미였다. 요즘은 감정에 집중할 수 있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굳이 장르로 따지자면 멜로를 하고 싶다. 요즘은 멜로영화하기 힘들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더 오기가 생긴다.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