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다르덴 형제의 <언노운 걸>
2017-05-03
글 : 한창호 (영화평론가)

다르덴 형제는 변화 중이다. 당연한 소리다. 세월이 흐르는데 영화가 변하지 않는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다. 혹자는 이 변화를 긍정하고 누군가는 아쉬움을 드러낸다. 제69회 칸국제영화제가 다르덴 형제의 신작에 침묵한 것을 보면 아직은 변화를 아쉬워하는 쪽의 목소리가 큰 것 같다. 그럼에도 다르덴은 여전히 다르덴이다. 주목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부조리한 시스템의 냉철한 관찰자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걸 거부하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걸 거부한다”(뤽 다르덴)며 목소리를 높여가고 있는 다르덴 형제의 오늘에 대해 영화평론가 한창호가 짚어봤다. 우리는 이 영화의 향방에 대해 좀더 많은 이야기를 나눠야만 한다.

다르덴 형제의 신작 <언노운 걸>(2016)의 주인공은 의사다. 의사… 소위 부르주아 사회의 상징적인 직업인 의사가 다르덴 형제의 주인공일 수 있을까? 다르덴 형제의 주인공은 사회의 하층민 혹은 주변부 계급이었다. 제도의 주변부를 통해 사회의 부조리를 통감하도록 하는 게 다르덴 형제 영화의 미덕일 테다. 관습적인 시선에서 보자면, 의사는 그런 틀에서 벗어나 있는 직업이다. 사회적 의미로서의 의사는 귀스타브 플로베르가 통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마담 보바리>의 주인공 남편인 ‘닥터 보바리’를 통해서다. 의사의 상징성에 대단히 부정적인 플로베르는 ‘닥터 보바리’를 공동체에서 요구하는 구멍난 부분을 잘 메우며 늘 그 자리(사회적 상층부)를 지키는 인물로 그렸다. 플로베르에 따르면, 닥터 보바리는 부르주아의 상징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일상을 누리지만, 존재라기보다는 도구로서의 순응주의자, 그것이 플로베르의 의사였다.

‘닥터 보바리’가 떠오른 이유

다르덴 형제는 <언노운 걸>에서 부르주아 계급으로서의 의사의 의미를 부정하는 것 같다. 다르덴 형제 영화의 주인공들, 이를테면 부랑자 커플(<더 차일드>(2005)), 버려진 소년(<자전거 탄 소년>(2011)) 같은 주변부 인물들과 의사와의 구분은 계급적이기보다는 심리적이다. 어느 편에 서느냐에 따라, 곧 윤리적 입장에 따라 중심과 주변의 경계가 나뉜다는 의미다.

의사 제니(아델 에넬)는 벨기에 리에주 지역의 세랭에 있는 조그만 병원에서 일한다(공업도시 세랭은 다르덴 형제의 고향이고, 형제는 늘 이곳에서 작업한다). 환자들은 대부분 노인이거나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 유색인이다. 제니는 의사로서의 안락함, 부유함, 사회적 평판 같은 그 직업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와 자못 멀어 보이는 조건에 놓여 있다. 밤늦도록 일하고, 퇴근 후에는 방문 진료도 하고, 늦은 밤 혹은 이른 새벽에 환자들의 급박한 전화에 일일이 응답해야 한다. 간혹 불량 환자들로부터 신체적 협박도 받는다. 말하자면 다르덴 형제가 줄곧 비판해온 신자유주의 질서에선 부르주아의 상징인 의사도 언제든 주변부에 위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언노운 걸>은 다르덴 형제답지 않은 직업인 의사를 통해 여전히 다르덴 형제다운 테마, 곧 우리 사회의 부조리를 성찰한다. 그 모티브는 ‘안티고네의 윤리’이다.

<언노운 걸>의 의사는 도구로서의 순응주의를 거부할 계기를 만나는데, 거기엔 어느 흑인 소녀의 희생이 있다. 제니는 조만간 조건이 좋은 병원으로 스카우트될 예정이었다. 아마 ‘플로베르의 의사’처럼 살 수 있었을 것이다. 어느 날 흑인 소녀가 밤늦게 병원 벨을 누르지만 일에 지친 제니는 응답하지 않는데, 그녀는 다음날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제니는 극심한 죄의식을 느낀다. 자신이 문만 열어줬으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후회한다. <로제타>(1999)의 주인공처럼 도움을 준 남자를 (어쩔 수 없이) 배반한 것도 아니고, <내일을 위한 시간>(2014)의 조합원들처럼 해고 위기의 동료를 무시한 것도 아닌데, 제니는 마치 자신이 죽음의 직접적 이유인 듯 눈물을 흘리며 자책한다. 최소한 소녀의 신원은 알아야겠고, 안티고네처럼 제대로 장례를 치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죄의식에 사로잡힌 제니는 조건이 좋은 병원의 스카우트 제의를 거절하고, 하층민들과 노인들이 주로 방문하는 현재의 병원을 지키기로 마음먹는다. 여기가 제니 인생의 전환점이다. 도구가 아니라 존재로서의 삶으로 방향을 트는 순간인 것이다.

“입이 무거우면 손이 말한다”

주인공의 직업을 의사로 내세워서인지, 병원은 세상의 알레고리처럼 그려진다. 사람들은 이런저런 병에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다. 아직 제대로 자라지 못한 소년은 벌써 중병(아마도 암)에 걸려 머리를 박박 밀고,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는 추방의 공포 때문에 중상을 입고도 종합병원엔 가지도 못한다. 노인들은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한다. 다시 말해 제니의 병원 자체가 시름시름 앓고 있는 ‘다르덴 세상’의 강력한 비유인 셈이다.

환자들의 증상 중 몇 사례는 특별히 강조된다. 이를테면 도입부에서 흑인 소년이 경련을 일으키는 장면. 진료를 기다리던 소년은 특별한 이유도 없이, 갑자기 바닥에 쓰러져서 경련을 일으킨다. 며칠 뒤 밝혀지지만 소년의 증상은 뇌전증(간질) 같은 질병이 아니고 그저 단순한 경련이었다. 이런 현상이 영화에서 반복된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몸의 통증을 겪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흑인 소녀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아는 한 소년은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고, 그 소년의 아버지는 일시적인 몸의 마비를 겪는다. 프로이트가 ‘도라’의 히스테리를 분석하며 한 말대로 “입이 무거우면 손이 말하는 것”이다. 마음의 병이 신체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인데, 제니의 병원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마음의 병이다. 세상이 죽어가고 있는데, 마음에 병이 생기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흑인 소년이 경련을 일으킬 때, 제니의 병원 인턴 의사는 갑자기 긴장하며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의사가 되겠다는 수련의가 경련을 일으키는 소년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하다니 이런 소극성은 왜일까? 영화 후반부 수련의의 고백에 따르면, 그는 소년을 보며 어릴 때 부친으로부터 수없이 매 맞던 장면들을 떠올렸고 그 순간 자신은 의사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르덴 형제가 경련을 일으킨 소년과 매 맞은 인턴을 연결 짓는 것은 ‘학대받은 유아기의 고통’에 대한 환기인 셈이다. 유아기의 학대는 다르덴 형제 영화의 중요한 테마다. <자전거 탄 소년>의 버려진 자식을 떠올리면 된다.

그렇다면 의사 제니가 죽은 소녀의 사진을 본 뒤, 갑자기 눈물을 떨구며 깊은 슬픔에 빠진 이유가 무엇인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죄의식만이 이유일까? 제니는 바로 전날 밤, 사실상 ‘귀찮아서’ 문을 열어주지 않은 ‘플로베르의 의사’였다. 스카우트도 예정돼 있었다. 그런데 하루 만에 연민과 죄의식의 표상이 되다니 약간의 비약이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이런 의심을 해볼 수 있다. 혹시 제니도 10대 시절 자기 집 문을 두드리다 부모로부터 거절당한 적이 있지 않을까? 밤에 모질게 버려진 적이 있지 않을까? 영화에선 제니의 부모나 가족은, 그 누구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 소녀의 죽음에 대한 의문을 직접 수사하기 시작한 제니의 마음엔 의사로서 사람을 죽음으로 내몬 죄의식뿐 아니라 학대받은 소녀를 다시 찾아서 위로해주고 싶은 마음도 있는 것 같다. 그래서인지 죽은 흑인 소녀에게서 혼자 고립돼 사는 제니의 분신이 설핏 보인다. 제니의 수사는 속죄의 과정이자 한편으론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이다.

안티고네의 희망

제니가 원하는 것은 우선 죽은 소녀의 신원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는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는 것이다. 연고자가 없는 시신은 그냥 공동묘지에 임시로 묻혀 있다. 제니의 태도는 그리스 비극의 안티고네 같다.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에 따라 황야에 버려진 오빠의 시신을 거두어, 제대로 매장하기 위해 왕명을 거역한 인물이다. 헤겔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를 그리스 비극의 절정으로 평가하며 제기한 질문, 국가의 법(왕)과 사람의 도리(안티고네)가 길항관계일 때 행위의 판단기준은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자주 거론되는 인물이다. ‘안티고네의 윤리’는 결국 사람의 도리(신의 법)가 국가의 법(인간의 법) 위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안티고네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사람의 도리를 지키기 위해 오빠의 주검을 거두어 제대로 매장한다. 그 대가로 안티고네는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제니는 안티고네처럼 ‘억울하게’ 죽은 소녀를 제대로 매장하고 싶어 한다. 그것을 속죄의 의례라고 여긴 것이다. 이 과정에서 제니는 여러 어려움을 겪는다. 제니의 탐문을 불편하게 여긴 일부 환자들은 주치의를 바꾸려 하고, 소녀와 관련된 조폭들은 “설치지 말라”며 폭력으로 위협하고, 경찰마저 일에 방해된다고 경고한다. 죽은 소녀를 제대로 매장하려는 제니의 행위를 ‘안티고네의 윤리’로 읽을 때, 영화 후반부의 속죄 과정은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세월호’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죽음의 희생자들을 제대로 매장하려는 것, 곧 사람의 도리를 지키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토록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도 드물 것이다.

제니의 죄의식과 속죄의 과정이 강조된 까닭에 <언노운 걸>은 정치적 영화라기보다는 심리드라마에 가깝다. 다르덴 형제는 최근 들어 죄의식 자체가 사라져가는 ‘막말’의 정치상황을 염두에 둔 것 같다. 심지어 죄의식은 일부 사람들에 의해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인지 제니는 죄의식을 환기하는 ‘성녀’처럼 부각된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심리를 강조하는 멜로드라마에 가까운 성격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자전거 탄 소년>부터다. 이때부터 사회적 상처보다는 개인적 고통이 더 큰 호소력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의 영화에 유명 배우가 등장했다. 세실 드 프랑스(<자전거 탄 소년>), 마리옹 코티야르(<내일을 위한 시간>), 그리고 이번에는 아델 에넬이 출연했다.

이 때문인지 드라마는 밝아졌다. <로제타>의 그녀처럼 가스통의 밸브를 열어놓고 죽음을 기다리는 결말 같은 무거운 엔딩은 지양 됐다. 대신 <자전거 탄 소년>처럼 새로운 가족의 탄생에 대한 희망이 보였고, <내일을 위한 시간>처럼 화합과 타협에 대한 여지를 보여줬다. <언노운 걸>도 적어도 비극적인 엔딩은 아니다. 처절한 죽음, 처절한 패배로 그려진 다르덴 형제의 영화가 점점 희망을 기대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동전의 양면 같다. 스타의 출연과 밝은 엔딩은 관객의 외연을 넓히는 데 기여할 테지만, 반면에 다르덴 형제 영화의 적극적인 지지자들로부터는 조금씩 멀어지고 있다. 그 멀어짐이 영화 연출의 정점, 혹은 치열함에서의 멀어짐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닌지 약간 염려된다. 그럼에도 <언노운 걸>은 <자전거 탄 소년> 이후 새로운 길을 모색 중인 다르덴 형제의 계속된 실천으로 보인다.

<내일을 위한 시간>

다르덴 형제의 스타 캐스팅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는 알려진 배우들이 등장하지 않았다. 벨기에 리에주 지역의 산업도시 세랭에서 작업하는 형제는 그 도시의 하층민처럼 보이는 사람들을 배우로 기용했다. 현실성을 더욱 고양시키려는 의도일 것이다. 마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처럼, 허구의 세상 속 인물이 아니라 우리의 이웃 같은 사람들이 배우로 나섰다. 그래서 다르덴의 영화는 더욱 강력하게 현실처럼 보였다.

이런 캐스팅에 변화가 온 것은 <자전거 탄 소년>부터다. 유명 배우 세실 드 프랑스가 미용사로 등장했다. 우리에겐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히어애프터>(2010)의 주연으로 잘 알려진 배우다. 놀라운 변화였다. 세실 드 프랑스를 보는 순간 관객은 대부분 그 역할이 당연히 연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현실성이 약화된다. 다르덴 형제는 <로제타>부터 이름을 알린 감독들인데, <자전거 탄 소년>은 형제들의 영화가 노출된 지 10여년이 지난 뒤의 작품이다. 말하자면 그의 고정 배우들, 올리비에 구르메, 제레미 레니에, 파브리치오 론지오네(세명 모두 <언노운 걸>에 출연한다) 등이 배우로 각인된 이상, 이제 무명배우를 통한 현실성 확보가 별 의미가 없어졌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왔다.

<내일을 위한 시간>에선 최고급 스타인 마리옹 코티야르가 출연했다. 코티야르의 연기는 눈부셨다. 다만 지금 우리가 다르덴 특유의 사회적 아픔을 그린 영화에 공감하고 있는지 혹은 코티야르의 연기력에 감탄하는 것인지, 묘한 위치에서 어색함을 느꼈다. 이번에는 아델 에넬이 출연했다. 베르트랑 보넬로 감독의 <라폴로니드: 관용의 집>(2011)으로 우리에게 알려진 배우다. 사색적이고 내향적인 캐릭터를 잘 연기한다. 다르덴 형제는 앞으로도 유명 배우를 캐스팅 할 것 같다. 다르덴 형제의 리얼리즘을 지지했던 한 사람으로서, 캐스팅에 대한 형제 특유의 매력이 사라져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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