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욱의 만화가 열전]
[오승욱의 뒷골목 만화방] 츠바나 <제7여자회 방황>
2017-05-04
글 : 오승욱 (영화감독)

만화 속에 등장하는 마을이 주인공들 못지않게 기억에 남는 만화들이 있다. <내일의 죠>에서 떠돌이 불량소년 죠가 어슬렁거리며 찾아들었다가 권투 선수로 운명이 바뀌어버린 도쿄의 변두리 공장지대 빈민촌. 부자인 아카네의 대궐 같은 집과 극악의 빈민 진의 무덤 옆 판잣집까지 함께 모여서 사는 <괴짜가족>의 무대가 되는 마을. <원펀맨>의 대머리 슈퍼히어로 사이타마가 사는, 매일매일 언제나 당연하다는 듯 괴수가 나타나 파괴되는 Z시. 고등학생들이 전철역에서, 뚝방에서, 뒷골목에서, 공원에서 매일같이 피터지게 싸움질을 하는 <크로우즈>의 스즈란 고등학교 주변 마을. 슈퍼맨과 더티 해리를 닮은 이발사, 안녕이라 인사하며 순찰차를 박살내는 사이보그 소녀와 쓸데없는 물건만 발명해내는 박사님, 참새를 키우는 호랑이 신사가 사는 <닥터 슬럼프>의 펭귄 마을. 기괴하기 짝이 없지만, 헌책방과 신간 서점이 한 블록 건너에 자리하고, 괴기 소설을 쓰는 이상한 작가와 그보다 더 이상한 부인, 그들보다 더더욱 이상한 어린 딸이 살고, 길 하나만 건너면 귀신이 살고 있는 집과 병원, 요괴들이 거처하는 신사가 있는 <시오리와 시미코>의 이노아타마쵸. 이런 마을들은 만화 속 마을이기는 하지만 꼭 한번 가보고 싶은 허황된 생각이 드는 곳들이다.

이상야릇한 마을에서 친구를 찾는 아이

이노아타마쵸처럼 귀신과 요괴들이 항상 출몰하는 집과 장소가 널려 있지는 않지만 심심찮게 요괴들이 등장하고, Z시처럼 매일 괴수들이 출몰하여 거리와 건물을 뭉개버리지는 않지만 간혹 괴수가 나타나 고질라가 지나간 자리만큼의 흔적을 남기기도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에 붙어 있던 외계인이 하룻밤 사이에 빵집을 사라져버리게도 하고, 공터의 한구석 간이 화장실에 들어가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트루먼 쇼>처럼 시트콤보듯 즐기고 있는 토끼들이 우글거리는, 매우 흥미진진한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서 어른들의 존재는 희미하다. 어른들은 불가피하게 꼭 필요한 에피소드에서 잠깐 등장하고 사라져버리는 소녀들과 소년들의 세계이다. 그뿐 아니다. 죽은 소녀의 뇌 속의 기억과 사고가 데이터로 전환되어 홀로그램 형태로 현세에서 태연하게 살아나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업시간에 입을 벌리고 잠을 자기도 한다.

이 마을의 고등학교에서는 ‘친구선정’이라는 제도가 시행되어 신입생이 입학하면 추첨에 의해 고등학교 3년간 짝이 될 학생을 선택하고 짝이 된 학생들은 3년간 친구로 살아가야 하며 그들의 친구관계는 점수가 매겨져 성적으로 남게 된다. 만화의 주인공 타카기는 친구가 없다. 그녀에게는 전학을 할 때마다 길게는 두어달, 짧게는 한달 동안 같이 학교생활을 했던 학생들이 이별의 선물로 준 비망록이 한 상자 있을 뿐이다. 마치 영화 <허공에의 질주>의 주인공 대니(리버 피닉스)처럼 타카기는 발명가 아버지의 떠돌이 생활 덕분에 자신을 ‘집시 킹’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타카기는 더이상 친구 없는 생활은 싫다며 아버지에게 항의한다. 항의의 결과 타카기는 이사와 전학이 없는 정착생활을 하면서 이 만화는 시작된다. 한 마을에서 계속 살아가는 생활을 보장받은 타카기가 처음으로 한 일은 입학할 고등학교를 고르는 것. 오랜 떠돌이 생활로 타카기가 공부를 잘할 리는 절대 없고, 그만큼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고등학교 수도 적어진다. 타카기는 올해 처음으로 ‘친구선정’이라는 제도가 시행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로 결정하고, 그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난생처음 공부란 것을 머리에 쥐가 나도록 하여 입학에 성공한다. 드디어 친구선정! 모든 학생들은 자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친구에 대해 자세히 적어서 학교에 제출한다. 물론 그것이 친구선정에 반영되는지는 모르는 일이지만. 타카기의 희망사항은 차고 넘쳐서 지면이 모자랄 지경이다. 그녀가 원하는 친구는 귀엽고, 키가 너무 크거나 작아 올려다보거나 내려다보지 말아야 하고, 항상 자신에게 상냥하고, 자신이 잘못해도 용서해줘야 하며 항상 사랑해주고. 하하하! 그중 타카기가 별표에 동그라미까지 쳐서 강조한 부분은 바로 ‘자신을 절대 배신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한편 ‘친구선정’에 대해 심드렁한 소녀가 있으니 그녀는 카네무라 마치코. 카네무라는 친구관계가 성적으로 매겨진다는 것에 대해 약간의 반감을 가진 “친구 따위야 뭐 아무렴 어때” 하는 소녀다. 배신하지 않는 이상적 친구를 절대적으로 원하는 타카기와 어른스런 소녀 카네무라, 두 소녀는 추첨에 의해 운명적으로 7번의 번호표를 가슴에 달게 되고 이로써 배트맨과 조커, 톰과 제리, 데드풀과 스파이더맨에 버금가는 인류 최강의 ‘제7여자회’라는 전설로 남는 친구가 탄생한다.

친구의 그림자를 느끼게 하는 에피소드들

매회 에피소드마다 이상한 기계가 등장하거나 외계의 괴물이 등장하고, 갑자기 땅이 갈라져 고독이 고드름처럼 주렁주렁 달려 있는 이상한 도시로 두 소녀가 모험을 떠나가나, 죽었던 같은 반 학생이 출몰하여 수업을 같이 듣는 기괴한 일들이 벌어진다.

가장 보석 같은 에피소드는 두 친구가 각각 혼자서 등장하지만 친구의 그림자가 깊게 스며 있는 에피소드들이다. 타카기는 저녁에 산책하던 도중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울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를 발견한다. 아이의 우는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아 옆에 앉아 왜 우는지 고민을 들어준다. 여자아이는 너무나 많이 이사를 다녀 친구가 하나도 없고 친구가 없는 자신의 미래는 절망적이라고 한다. 타카기는 그렇지 않다며 반드시 미래에 친구가 생길 것이라고 여자아이를 위로한다. 하지만 여자아이는 깊이 절망한 상태여서 타카기의 말이 들리지 않는다. “혼자는 싫어”를 계속 중얼거릴 뿐이다. 그때 타카기가 손에 쥐고 있던 것은 ‘잔존 타로’라는 아버지의 발명품이다. 이 발명품은 공간에 남아 있는 소리의 진동을 다시 주워 재생해주는 것으로 타카기는 이 기계를 들고 다니며 사람들이 5분 전 또는 7분 전에 내뱉었던 말들을 다시 듣는 재미에 푹 빠져 돌아다니다가 매미들이 울어대는 숲까지 왔던 것. 평소 덜렁거리고 손에 쥔 모든 물건을 망가뜨리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타카기였기에 숲에서 매미 소리만 나는 것이 지겨워 기계를 함부로 돌려 망가뜨리고 기계가 폭주한 상태로 자신이 이전에 살던 마을에 닿았고, 울고 있던 여자아이는 바로 자신의 몇년 전 모습이었던 것이다.

이 에피소드와 대구를 이루는 카네무라의 에피소드가 있다. 카네무라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로 가 취직을 하고 지내다 10여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다. 그녀는 타카기가 서서 매미 소리를 들었던 숲과 비슷한 곳에서 매미 소리를 듣는다. 이 세상의 매미는 이미 다 사라져 기계 매미들이 울고 있는 숲이다. 변한 곳도 있고, 안 변한 곳도 있는 동네의 골목을 걸어가다 예전에 그녀의 집으로 뻔뻔하게 들어와 무단 취식했던 미래에서 온 사이보그 소녀를 만난다. 사이보그 소녀와 함께 걸어 집 앞에 선 두 사람. 사이보그 소녀에게 카네무라는 자신을 마치코로 불러도 된다고 하자 사이보그 소녀는 “카네양이라고 해도 되나?”라고 한다. 그러자 카네무라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건 또 다르지”라고 하며 에피소드가 끝난다. ‘카네양’이라고 카네무라를 부른 것은 이 세상에서 오직 단 한명. 고등학교 시절 그녀의 짝이었던 타카기뿐이었다.

시끌벅적한 에피소드들 사이사이에 대사가 거의 없이 두 소녀가 나란히 걷거나 혼자 걷는 에피소드가 절묘하게 들어가 전체적으로 조용한 느낌의 만화가 되어버렸다. 가장 이상적인 친구가 되기 위해 항상 소중한 추억만을 만들어주겠다는 타카기의 대사에 찡한 느낌이 들어 30여년 전 나의 고교 시절 쓸쓸하고 스산했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만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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