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침묵>(1991), <필라델피아>(1993) 등을 연출했던 조너선 드미 감독이 지난 4월 26일(현지시각), 73살로 세상을 떠났다. 솔직히 말해, 부고를 보고서 그의 이름을 오랜만에 떠올렸다. 조너선 드미는 꽤 오랜시간 동안 나의 관심 밖에 있는 감독이었다. <양들의 침묵> 같은 탁월한 작품을 만들기는 했지만 그건 거의 30년 전 영화이고, <찰리의 진실>(2002)이나 <맨츄리안 켄디데이트>(2004) 같은 작품에 그리 깊은 인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물론 홈비디오 스타일이 독특했던 <레이첼, 결혼하다>(2008)나 메릴 스트립이 훌륭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어바웃 리키>(2015) 같은 작품이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조너선 드미는 희미한 색깔의 감독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성실하게 영화를 계속 찍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완전히 구축하지 못한 ‘애매한’ 감독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생각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 여긴다. 동시에 나의 게으름이 부끄럽기도 하다. 그는 많은 영화를 찍었고 다양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그 안에서 ‘작가적 야심’이라 부를 만한 자신만의 테마를 깊이있게 추구해왔다. 이제 막 드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기 때문에 섣불리 얘기하기는 어렵지만, 나는 조너선 드미가 저평가된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우리에게 여전히 덜 알려진 감독이다.
악역 캐릭터의 비애를 포착하다
조너선 드미의 작품 목록을 검색해보면 그가 생각보다 훨씬 많은 영화를 찍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드미는 공식적으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 TV드라마, 단편을 포함해 모두 61편의 작품을 연출했다. <양들의 침묵>으로 일약 ‘스타 감독’이 되기 전 드미는 이미 약 20편의 작품을 발표한 ‘중견 감독’이었다.
드미의 초기 경력이 상대적으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건 중기작인 <양들의 침묵>과 <필라델피아>가 너무 많은 인기를 얻었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의 영화 경력이 전형적인 ‘B급 영화’로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자 수용소>라는 민망한 제목으로 알려진 1974년작 <Caged Heat>는 드미의 연출 데뷔작이자 B급영화의 거장 로저 코먼이 제작한 작품이다. 로저 코먼은 당시 영국에서 활동하던 젊은 광고 제작자이자 영화 홍보업자였던 조너선 드미를 직접 발탁해 각본을 맡기고 곧이어 연출까지 맡겼다. 그렇게 만들어진 <여자 수용소>는 지금 보아도 ‘잘 만든’ 영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교도소에 갇힌 여성주인공들은 아무 이유 없이 옷을 벗거나 찢으며, 역시 아무 이유 없이 폭력적인 행동을 벌여 막무가내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그의 후기작들과 이 데뷔작을 비교하면 새삼 뚜렷한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등장인물들이 사회, 심지어 다른 범죄자들 사이에서도 적응을 못하고 있으며, 영화는 그들에게 감정이입한다는 점이다. 드미는 주인공들을 흉악한 범죄자이자 인간적 약점을 가진 자들로 그리지만 끝내 그들을 매몰차게 대하지 못한다. 그리고 미리 얘기하면 드미는 많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를 계속 유지했다. 그는 어떤 장르를 만들든 사회의 기준을 맞추지 못해 고생하는 사람들을 등장시킨 뒤 그들에게 따뜻하고 진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런 맥락에서 드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양들의 침묵>은 그의 필모그래피 중 가장 이질적인 작품이며, 동시에 그의 특징을 역설적으로 잘 드러내는 영화임을 알 수 있다. 드미의 초기 경력은 앞서 이야기한 B급 장르물, 그리고 기본적으로 밝은 분위기를 유지하는 코미디(<섬씽 와일드>(1976), <멜빈과 하워드>(1980))와 멜로드라마(<위험한 유혹>(1984))로 이루어져 있다. 이중 <멜빈과 하워드>는 오스카 각본상을 수상하며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드미는 놀랍게도 인간의 가죽을 벗기는 살인마와 인육을 즐겨 먹는 또 다른 살인마가 등장하는 스릴러 소설 <양들의 침묵>을 영화화하기로 한다. 이 영화의 제작 배경에는 원작자와 제작자 사이의 복잡한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어떻게 드미가 최종적으로 연출을 제안받았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만들어진 결과물을 보고 짐작할 수 있는 건 드미가 악당 버팔로 빌(테드 레빈)과 한니발 렉터(안소니 홉킨스)에게 깊은 흥미를 느꼈다는 사실이다. 특히 영화는 버팔로 빌이 어떤 상처를 간직한 연약한 인물이라는 암시를 숨기지 않는다. 즉, 타고난 인간적 특징 때문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악역을 맡아야 하는 인물들의 비애를 포착하려 한다. 만약 드미가 단순히 ‘악’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 쾌감을 느끼는 유형의 감독이었다면 그는 <양들의 침묵>의 성공에 힘입어 비슷한 종류의 영화를 계속해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알려진 것처럼 그는 한니발 렉터를 주인공으로 한 다른 작품들의 연출을 거부했고, 변함없이 ‘사회에 적응할 수 없는 사람들’과 ‘주변의 인물들’이라는 자신의 테마에 집중하였다.
느슨한 공동체를 꿈꾼 감독
그렇게 드미가 만든 영화들에는 백인 에이즈 환자와 흑인 변호사의 우정을 그린 <필라델피아>, 전쟁 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괴로워하는 군인이 주인공인 <맨츄리안 켄디데이트>, 재활원에서 갓 나온 마약 중독자와 가족들의 갈등을 그린 <레이첼, 결혼하다>, 가혹한 사회 구조와 불행한 가정 환경 때문에 살인자로 몰린 소년의 이야기 <더 킬링>(2013~14), 괴팍한 성격 탓에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로커가 등장하는 <어바웃 리키>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장르는 물론 전반적인 분위기도 모두 다르지만 드미가 오랜 시간 어떤 인물과 어떤 주제에 관심을 가져왔는지 뚜렷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만큼이나 음악을 사랑했던 드미는 뮤지션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여러 편 찍었는데, 그중 하나인 <저스틴 팀버레이크+테네시 키즈>(2016)에서는 꽤 긴시간 동안 콘서트 무대를 세우는 육체 노동자들의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의 색깔을 드러내기도 했다. 주인공은 물론 화려한 조명을 받는 저스틴 팀버레이크이지만, 드미는 ‘콘서트 영화’를 만들 때도 무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고야 마는 감독이었던 것이다.
아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조너선 드미는 악을 섬뜩하게 묘사한 스릴러 걸작 <양들의 침묵>을 만든 감독으로 기억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면 드미는 상처를 숨기느라, 또는 타고난 괴팍한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인물들을 즐겨 그렸으며, 그런 사람들도 타인과 어울려 살아갈 수 있는 느슨한 공동체를 꿈꾸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 불가능하고 낭만적인 기획이 조너선 드미를 특별한 감독으로 기억하게 만든다. 그의 이러한 매력을 너무 늦게 알았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