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우혜경의 영화비평] 죄책감을 섣불리 해소한 <언노운 걸>
2017-05-09
글 : 우혜경 (영화평론가)

거친 일반화를 허락한다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을 포괄할 하나의 감정은 ‘불편함’일 것이다. 정제된 ‘날것’이 주는 불편함이랄까. 실제로 일인칭 핸드헬드 카메라에 몸을 실은 그(들)의 영화는 관객을 꼼짝없이 잡아 앉혀 날것 같은 불편함에 고스란히 대면하도록 했다. 그러니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다르덴 형제의 ‘팬’들은 이 불편함을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일 테다(나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10번째 영화 <언노운 걸>(2016)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안온(安穩)하다. 불법 이민자 소녀의 죽음과 이를 방조한 사회를 다루었으니 소재 탓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놓고 언급하는 죄책감이나 책임감이라는 문제 역시 그리 편안한 지점처럼 보이진 않는다. 그렇다면 이 낯설기만 한 안온함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문 밖’이 아니라 ‘문 안’으로 들어온 카메라

먼저 이 세 장면을 떠올려보자. 소년 환자로부터 호출을 받은 제니(아델 에넬)는 서둘러 소년의 집을 찾는다. 하지만 소년의 상태가 악화됐을까 걱정하며 방문을 연 제니 앞에 펼쳐진 건, 소년이 정성스레 준비한 깜짝 파티다. 다르덴 형제의 영화에서 좀처럼 만나기 힘든 이 아름답고 따뜻한 에피소드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영화의 서사에 어떠한 기여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아픈 소년은 두번 다시 등장하지 않으며, 제니 역시 소년의 집을 더이상 찾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따뜻한’ 장면은 다시 한번 반복된다. 당뇨로 발이 불편한 환자를 찾아온 제니는 그를 대신해 일을 처리해주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이 환자 역시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다. 방문 진료 후 잊고 온 빵을 환자 할머니가 2층 창문으로 떨어뜨려주는 세 번째 장면 또한 성격은 동일하다. 영화의 ‘데드 타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텅 빈 이 장면들이 <언노운 걸>에 기대치 않은 리듬감과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건 사실이지만, 철저하게 경제적인 영화를 찍는 다르덴 형제가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한 이 장면들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 진료시간이 끝난 후 찾아온 방문자를 거절한 제니는 자신이 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소녀가 다음날 죽은 채로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소녀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낀 제니는 동네를 수소문하며 이름도 알 수 없는 이 소녀가 누구인지, 어떤 사연으로 죽음에 내몰리게 됐는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탐문’(探問) 과정을 조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딱히 수사 도구라 할 만한 것을 갖추지 못한 제니는 자신에게 진료를 받는 동네 주민들을 ‘진찰’하고 ‘진단’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단서를 찾아간다. 소녀의 사진을 보고 심장 박동수가 빨라진 소년을 추궁하고,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을 호소하는 남자의 맥박을 확인하고 약을 챙겨주다가 남자가 마음이 약해진 틈을 타 소녀에 대한 정보를 얻어내기도 한다. 이들의 진술을 확보하는 데 의사와 환자간 비밀 유지 서약은 더할 나위 없이 탁월한 수사 장치가 된다. 말하자면 지치지 않고 탐문을 해갈 수 있는 동력이 제니의 ‘죄책감’ 혹은 ‘죄의식’이라면, 이 탐문을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의사’라는 제니의 ‘신분’인 셈이다. 이때 그녀가 왕진을 다니는 의사라는 설정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영화는 의도적으로 제니가 환자의 집을 방문해 초인종을 누르고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장면을 반복해 보여준다. 이때마다 문이 열리고 제니는 집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받는다. 자연스럽게 초인종을 누르고도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었던 이름 없는 소녀는 제니의 대척점에 놓인다. 전화와 초인종에 응답하며 끊임없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던 제니와 달리 소녀의 이름은 (‘inconnue’ 혹은 ‘unknown’)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제니 스스로 이야기한 것처럼, 살아 있는 자신과는 달리 소녀는 죽고 말았다. 제니는, 아니 영화는 문 밖(outside)에 서 있는 소녀의 세상을 정반대의 지점(inside)에서 바라본다. ‘불편’하게 문 밖 세상을 떠돌던 카메라도 제니의 시선으로 옮겨와 관객의 자리를 문 안쪽(inside)에 마련한다. 다르덴 형제에게 있어 이 전례 없는 방식이 영화의 안온함을 자꾸만 부추긴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아직 남아 있다.

성실한 의사의 미담으로 ‘감정적 면죄부’를 제시한다

다르덴 형제는 한 인터뷰에서 <언노운 걸>은 (제니의) 죄책감에 대한 영화라고 소개한 바 있다. 그리고 제니의 이러한 죄책감이 다른 이들을 어떻게 건드리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 죄책감이 제니로 하여금 소녀의 죽음에 다가가도록 하는 힘이라는 데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영화에서 제니의 죄책감이 어떻게 ‘해소’되는지에 더 주목해야 한다. 이제 앞에서 지적한 세개의 장면으로 돌아가야 할 때이다.

꼬리를 문 탐문을 통해 제니는 소녀의 죽음에 여러 형태로 ‘가담’(加擔)한 이들을 찾아낸다. 실족사한 소녀의 죽음에 직접적인 살인자는 아무도 없지만, 그 이면엔 자기 편의에 따라 소녀를 이용하거나 무시한 결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다. ‘내가 문을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소녀가 죽었다’는 제니의 죄책감은 소녀를 매춘에 이용한 사람들, 이를 외면한 가족, 어려움에 처한 소녀를 유린한 남자, 이를 구경만 하고 있던 소년들과 공유되고 ‘분담’(分擔)된다. 이름도 알지 못하는 소녀의 죽음에 ‘공동’으로 기여한 이들은 각자의 죄책감을 전이하고, 나누며 안도한다. 둑 아래로 떨어진 소녀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지 못한(않은) 남자는 소녀의 죽음에 괴로워하다가 그 사실을 제니에게 털어놓으며 “당신이 문을 열어주었다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외친다. 이를 바라보는 제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지만, 자수를 권유하는 제니의 태도에는 자기가 유일한 ‘죄인’은 아니라는 불온한 안도감이 스쳐간다. 결국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한 제니의 수사과정은 결국 어느 순간 자신의 죄책감의 무게(擔)를 나누기 위한(分) ‘공범 찾기’의 여정으로 변질된다. 이 은밀하고 불순한 여정을 이제 영화가 돕기 시작한다.

소녀의 죽음을 따라가는 제니의 탐문이 주된 플롯이지만, 다르덴 형제는 이 플롯과 평행하게 제니가 책임감 있는 의사로 변모해 가는 과정을 배치한다. 업무 시간이 끝난 피곤한 상태에서 환자를 보면 안 된다며 소녀의 방문을 거절했던 제니는 어느 순간 한밤중에도 환자 왕진을 나서고, 환자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 의사로서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때 앞서 지적한 세 장면은 서사에 직접 기여하지는 않지만, ‘닥터 다뱅’의 ‘미담’으로 훌륭히 작동한다. 여기에 안정적인 일자리까지 포기하고, 불법 이민자들의 위협에도 꿋꿋하게 의사의 책무를 지키는 제니의 모습까지 덧붙는다. 많은 이들이 <언노운 걸>에서 죄책감과 책임감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영화가 제니가 (인간으로서 느낀) 죄책감(guilt)을 (의사로서 져야 할) 책임감(responsibility)으로 슬며시 치환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이때 소녀의 죽음을 추적하며 공범들을 찾아 죄책감을 덜어가는 제니의 모습과 헌신적인 의사로서 책무를 다하는 닥터 다뱅의 미담이 치밀하게 직조되면서 관객은 ‘불편함’에 대한 ‘감정적 면죄부’를 얻게 된다. 영화의 마지막, 소녀의 언니가 찾아와 제니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며 울먹이는 모습도, 그런 그녀를 안아주는 제니의 모습도 이 죄책감을 서둘러 봉합하려는 (다르덴 형제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게 안전한) 조급한 시도에 다름 아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다르덴 형제는 영화 속 인물들의 문제를 한번도 ‘그들’(outsider)의 문제로 다룬 적이 없었다. 핸드헬드로 따라가는 그(들)의 카메라는 ‘문’을 열고 ‘밖’(outside)으로 나가는 걸 망설이지 않았다. 난민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유럽에서 이렇게 안온한 ‘인사이더’(insider)의 논리가 다르덴 형제를 통해 날아올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