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셜2]
[스페셜] 우리가 가지 않은 길을 묻는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신작 <세일즈맨>
2017-05-10
글 : 송경원

89회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이 아니더라도, 2016년 칸국제영화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지 않았더라도 이 작품을 주목했을 것이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이란 이름에는 그만한 믿음과 무게가 실려있다. 2002년 첫 장편 <사막의 춤>으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린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이란의 현실을 꾸준히 알려왔다. 이란영화 최초로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던 <씨민과 나데르의 별거>에 이어 또 한번 아카데미의 영광을 차지한 신작 <세일즈맨>은 감독의 시상식 불참과 함께 안팎으로 화제에 올랐다. 아서 밀러 원작의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배경으로 한 <세일즈맨>에서 아스가르 파르하디는 다시금 도덕과 윤리에 관한 딜레마를 제시한다. 차별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는 등 그는 자신의 영화 속 인물들처럼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선택을 이어가고 있다. 지금 여기, 영화라는 무대 위에 이란 사회의 초상과 보편타당한 시대정신을 반영한 공연의 막이 올랐다.

인생이란 선택의 궤적이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크고 작은 선택을 이어가다 보면 어느새 좁고 유일한 길이 만들어진다. 그 길의 형태야말로 ‘나’라는 존재의 증명이자 개성이다. 우리는 지나온 길을 되돌아볼 때마다 생각한다. 어떤 선택은 뿌듯하고 어떤 선택은 안타깝다. 선택이 어려운 건 정답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기 때문이다. 이랬으면 저랬으면 하는 가정법을 반복하지만 답이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걸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것은 선과 악,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그저 가능성의 문제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그래서 늘 가지 못한 길을 상상하며 뒤돌아본다. 답이 없는 선택, 어떤 쪽을 골라도 괴로운 양자택일, 우리는 그것을 딜레마라고 부른다.

어쩌면 딜레마란 가장 인간적인 고민의 형태인지도 모르겠다. 어떤 쪽도 편안하지 않지만 그래도 끝내 선택함으로써 나다움, 혹은 인간다움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숱한 이야기들이 주인공을 딜레마 속에 몰아넣는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건 답이 아니다. 선택 앞에 망설이는 손짓, 괴로운 떨림, 그럼에도 끝내 선택을 하고야 마는 과정이다. 근자에 딜레마적 상황을 가장 정확하게 구현하는 감독을 꼽으라면 단연 아스가르 파르하디가 돋보인다. 그는 언제나 인물들을 양자택일의 상황에 던져놓는다. 용서냐 단죄냐, 결별이냐 포용이냐, 적응이냐 죽음이냐. 아스가르 파르하디의 영화에서 삶이란 B(Birth, 태어남)와 D(Death, 죽음) 사이 끊임없는 C(Choice, 선택)의 흔적으로 증명된다. 정답은 없다. 나를 증명하고 인간답게 만드는 선택만이 있을 뿐이다.

굴욕과 경멸의 드라마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공연을 준비 중인 부부가 있다. 에마드(샤하브 호세이니)는 ‘세일즈맨’을 연기하며 학교에서 수업도 병행한다. 어느 날 주변의 무리한 공사로 살고 있던 아파트가 무너지려 하자 긴급히 대피한 부부는 당분간 머물 곳을 물색한다. 극단 동료의 소개로 들어간 건물에는 이전 세입자가 미처 빼지 못한 짐들이 가득하다. 에마드가 극단 일로 늦어지는 사이 아내 라나(타라네흐 알리두스티)는 먼저 집에 돌아간다. 늦게 돌아온 남편인 줄 알고 무심코 문을 열어준 라나는 정체불명의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 큰 부상을 입는다. 뒤늦게 사정을 안 에마드는 범인을 찾으려 하지만 라나가 경찰에 신고하는 걸 원치 않는다. 부부는 없었던 일로 덮고 일상으로 돌아가고자 하지만 곳곳에 남은 흔적들이 수시로 아픈 기억을 되살린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이 도덕적 딜레마를 설정하는 방식은 비교적 단순하다. 서로 다른 두 가족을 보여주고 충돌시키는 것이다. 괴한에게 습격을 당한 후 주변의 오해와 불쾌한 시선으로 모욕감에 시달리는 부부가 있다. 그리고 범인에게도 가족이 있다. 영화는 말미에 두 가족의 상황을 충돌시킨다. 이 결말을 먼저 밝히는 건, <세일즈맨>은 아내를 습격한 범인이 누구인지 찾아가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에마드는 집요하게 범인을 쫓고자 한다. 찾아서 자신들이 받은 모욕과 경멸감을 되갚아주고 싶어 한다. 아내가 부상을 입은 것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에마드를 괴롭히는 건 주변 사람들로부터 받는 오해와 가벼운 경멸이다. 아내가 샤워 중에 습격을 당했다는 것, 이전 세입자가 문란한 생활을 한 여자였다는 것, 범인은 아마도 그런 여자를 방문한 남자 중 하나일 거라는 사실이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불편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불안에 떠는 라나는 에마드에게 곁에 있어줄 것을 원하지만 에마드가 신경 쓰이는 건 라나의 상처라기보다는 훼손된 본인들의 명예다. 이를 회복하기 위해 범인을 밝혀내야 한다. 하지만 범인이 밝혀졌을 때 에마드는 망설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연극 중인 세일즈맨의 주인공, 늙고 초라한 남자가 현실이 되어 눈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세일즈맨>은 굴욕과 경멸에 대한 이야기다. 사건 후 부부는 크고 작은 모욕감 속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라나와 에마드가 일방적인 피해자라고 보기 어렵다. 무신경하게 타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순간들은 영화 내내 반복된다. 부부는 이사 갈 집에서 짐을 빼지 않고 버티는 여자의 방을 허락 없이 열고 짐을 집 밖에 내놓는다. 이웃들은 예전에 살던 세입자 여자가 난잡한 생활을 했다며 범인이 그 여자의 손님일 거라고 멋대로 추측한 뒤 한마디를 남긴다. “그런 인간들은 망신을 줘야 해요.” 편견어린 시선.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거친 태도는 에마드 안에서 악의를 더해가며 부풀려진다. 이웃의 불쾌한 시선에 지친 에마드는 자신을 존경하던 학생이 수업 중 자신에게 장난을 쳤다는 이유로 그의 휴대폰을 뒤지고 모욕을 준다. 일종의 화풀이나 다름없다. 매춘부가 살던 집을 아무런 언질 없이 소개한 극단 동료 바바크(바바크 카리미)를 향해 연극 무대 한가운데에서 대사까지 바꿔가며 외친다. “네 놈 돈은 필요 없어. 쥐새끼 같은 놈!” 에마드의 복수란 이런 식이다. 그의 복수는 범인을 향해야 하건만 영화가 보여주는 건 범인에게 쏟아내는 감정이 아니라 범인을 찾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발산되는 날선 반응들이다. 매순간의 감정들이 에마드의 선택이라고 해도 좋겠다. 에마드는 좀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아내의 심정을 헤아리고, 앞선 세입자를 이해하며, 이웃에게 친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되는 스트레스 속에 에마드는 자신이 받은 모욕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고 싶은 것처럼 공격적인 반응들을 쏟아낸다.

그러나 놓고 간 차를 추적해서 잡아낸 범인은 늙고 초라한 노인이자 누군가의 아버지이고 신뢰받는 가장이다. 에마드가 연기 중인 세일즈맨 윌리의 또 다른 모습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이다. 물건이 아니라 스스로를 팔러다닌 세일즈맨처럼 백발의 노인은 자신의 늙고 쓸모없는 육체를 끌고 한줌의 노동력을 팔고 있다. 에마드는 노인을 경멸할지언정 노인의 가족에게 진실을 까발리는 굴욕을 쉽사리 안기진 못한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을 통해 노인의 처지를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에마드는 선택해야 한다. 자신의 정당한 복수를 행사할 것인지, 침묵할 것인지. 에마드의 선택을 두고 함부로 용서라고 단정짓진 않겠다. 이것은 복수와 용서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차라리 딜레마, 그 자체에 대한 관찰이라고 보는 편이 적절할 것 같다. 어떤 선택을 하건 우리는 양쪽을 다 존중할 수밖에 없다. 거기서부터 다시 질문이 시작된다. 당신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을 것인가. <세일즈맨>은 우리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상상이자 질문인 셈이다.

집, 도시, 가족,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왜 세일즈맨이었을까.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과 영화가 거울처럼 닮았다고 표현한다. 두 이야기를 관통하는 주제는 ‘굴욕과 경멸’이다. 연극 속 세일즈맨 윌리는 사회로부터 경멸당한 개인의 상징이다. 성장과 성공을 기치로 내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영혼을 떼다 팔던 세일즈맨은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살한다. 아니 그의 죽음은 사회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삶을 부정당한 존재의 마지막 자존적 선택이다. 영화 <세일즈맨> 역시 급격한 사회적 변화 속에 놓인 개인을 조망한다. 다만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이것을 좀더 개인적인 도덕의 차원으로 접근한다. 숨 가쁘게 변화하는 이란 사회에서 예술, 지식인 계층인 에마드와 라나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관찰이라고 해도 좋겠다. 에마드와 라나는 연극을 통해 ‘세일즈맨’의 삶과 부조리를 이해하고 있다. 그런 그들에게 세일즈맨과 그의 가족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가 주어졌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은 결코 답을 이끌어내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상황을 정교하게 깔아두고 여러 갈림길 앞에 관객을 데려다놓는다. 어떤 방향이든 영화는 결국 하나의 길을 가지만 관객은 가지 못한 길을 상상할 수밖에 없다. 아스가르 파르하디 감독의 영화가 중층적으로 읽히는 건 바로 이 ‘겹침의 힘’ 때문이다. <세일즈맨> 역시 숱한 질문을 남긴다. 에마드의 선택이 올바른가, 사적 복수는 정당한가, 법이 신뢰받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란 사회는 어떤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는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등등 의문과 해석은 페이스트리처럼 겹겹이 포개어진다. 그 결과 관객은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하며 균열이 퍼져나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목격한다. 어쩌면 그 균열의 무늬 자체가 사회의 단면이자 삶의 속살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세일즈맨>은 전작들에 비해 서로 다른 집단과 가치관을 거칠게 충돌시키진 않기에 다소 밋밋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연극과 영화, 삶의 겹침을 통해 특정한 무늬를 만들어나간다. 아스가르 파르하디가 보여주는 건 어쩌면 단지 극(혹은 이야기)이라는 형식이 전부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알맹이는 오직 관객과 스크린 사이에서 피어나고, 답은 관객 각자의 마음속에 머문다. 때문에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는 건 아마도 그 정교한 형식 정도일 것이다.

형식적으로 <세일즈맨>의 빼어난 지점은 연극, 영화, 삶을 중첩시키는 방식에 있다. 그렇다고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내용을 고스란히 옮겨오진 않는다. 차라리 특정 장면, 특정 대사가 불쑥 삽입되는 쪽에 가깝다. 현실의 부부는 상처를 마주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때 활용되는 것이 연극 속 인물들의 대사와 상황이다. 가령 영화 초반 집을 얻기 위해 차를 판 후 여러 명이 탄 택시에 동승한 에마드는 옆자리의 여성으로부터 불편하다며 자리를 옮겨줄 것을 요청받는다. 앞자리에 탔던 학생은 자신의 선생이 받은 굴욕감에 분개하지만 정작 에마드 본인은 속으로 삼키고 넘어간다. 바로 다음 장면, 에마드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주인공 윌리의 가장 수치스러운 순간 중 하나를 연습한다. 연극과 영화가 유사한 상황이나 대사를 반복하는 사이 경계가 점차 흐릿해지는 셈이다. 에마드의 학생 중 하나가 수업 중 “그 이야기 실화예요?”라고 묻자 에마드는 답한다. “아니. 하지만 실제로 착각할 만큼 분위기와 등장인물이 현실적이야.”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이 영화의 오프닝이다. 건물이 흔들리고 대피하는 사람들 사이, 주인공 에마드를 롱테이크로 따라가던 카메라는 마지막에 주인공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창밖의 공사 중인 포클레인을 바라보며 멈춘다.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이 장면은 급속한 개발과 변화 속에 흔들리는 이란 사회에 대한 형상화라 할 만하다. 요컨대 사람을 돌보지 않고 숨가쁘게 달려가다 일상의 균열마저 초래한 사회의 단면이다.

이 순간부터 쩍쩍 갈라져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에마드의 집은 세일즈맨과 그의 가족, 에마드와 라나 부부가 한자리에 모여 부조리극을 펼치기 위한 연극 무대가 된다. 극단 동료 바바크가 소개해준 집 주변을 둘러보며 에마드는 말한다. “폐허가 따로 없네. 싹 밀어버린 후에 새로 짓든가 해야지.” 바바크는 답한다. “그 결과가 이거야.” 오래된 것들을 파괴하고 거대하고 난잡한 무덤들을 채워나가고 있는 이란 사회는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배경인 1940년 뉴욕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금이 간 집은 더이상 안락한 쉼터가 아니고 우리 시대의 세일즈맨들은 선택을 강요받는다. 용서할 것인가, 복수할 것인가. 혹은 적응할 것인가, 떠날 것인가. 1940년대 세일즈맨은 죽었지만 우리 시대의 세일즈맨은 지금도 어딘가를 떠돌고 있다. 다만 연극과 현실 사이 결코 겹치지 않는 차이가 하나 있다. 당신은 여전히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오직 선택만이 나를 증명하고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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