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내 인생의 영화] 이지혜의 <토니 타키타니> 삶은 죽음과 함께
2017-05-10
글 : 이지혜 (찬란 대표)

감독 이치가와 준 / 출연 미야자와 리에, 잇세 오가타 / 제작연도 2004년

이토록 찬란하고 슬픈 봄날,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토니 타키타니였다”.

2004년 가을 즈음이었다. 일상의 모든 사소한 일들이, 청춘이 지나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출근길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Ride into the Sun>을 들으며 문득 떠오른 추억에 내 청춘도 가고 있다고 느꼈다든지, <토니 타키타니>를 보며 처음으로 죽음이 내 삶과 아직 무관한 그 무엇이 아니라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되었다든지.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고작 30대 중반에 그런 치기 어린 감상에 사로잡히다니…. 그때는 그랬다. 그해 봄 긴 연애의 종지부를 찍었으며 부모님에게서 독립하여 ‘혼자 있음’에 혹독하게 적응하고 있었다.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가 남긴 수천장의 재즈 레코드와 아내가 남긴 수천벌의 옷, 남기고 떠나는 것에 대한 엄청난 무게감, 남겨진 이의 상대적인 고독이 이상하리만큼 절실하게 와닿았다. 그렇다고 엄숙한 깨달음으로 이어진 건 아니고, 다만 물건과 수집에 대한 집착을 조금은 덜어내 가벼워졌으며, 허락된다면 부디 생을 마감하기 전 스스로 주변을 정리한 후 떠나고 싶다는 바람을 지니게 된 것 정도이다. 어느덧 삶이 죽음과 친해진 느낌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토니 타키타니>는 원작에서처럼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토니 타키타니였다”라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이 기이하지만 중독성 있는 대사는 니시지마 히데토시의 건조하고 단정한 목소리와 어우러져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내겐 마치 “삶의 진짜 이름은 죽음이었다”로 변주 가능한, 드디어 삶이란 죽음과 별개가 아닌 함께 가는 동반자임을 선언하는 주문과도 같았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대로 연상되는 주인공 잇세 오가타와 미야자와 리에의 공허한 아름다움, 단조로운 반복의 리듬을 매혹적으로 구현해낸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이 더해져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보다도 더 무라카미 하루키적인, 감히 활자 그 이상의 영상으로 쓰여진 작품이 완성됐다. 2006년, 다른 영화의 프로모션으로 내한한 니시지마 히데토시는 <토니 타키타니>를 상영한 종로의 한 극장에서 흔쾌히 뒤로 돌아 조용히 그 대사를 읊어주었다. “토니 타키타니의 진짜 이름은 토니 타키타니였다.”

2017년 봄, 대개의 인생이 그렇듯 세상사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희망과 좌절, 기쁨과 어려움이 뒤섞인 역동적인 시간이 흘렀으며, 2011년과 2013년에는 가까웠던 이들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한때의 치기 어린 깨달음도 있었고 이젠 그런 나이가 된 것인가 싶다가도 진짜 죽음과 맞닥뜨릴 때면 매번 속수무책이다. 지난 4월 벚꽃이 흩날린 어느 비오는 날 버스 안, 막 기일이 지난 친구를 떠올리고 있을 때 라디오에서 잊고 있던 옛 노래가 흘러나왔다. ‘밤이 아름다워, 잠이 오지 않아. 창을 열고 가만히 벽에 기대어. 창가에 흐르는 별들을 바라보며 갈 수 없는 내 사랑을 노래합니다….’ 세상을 떠난 또 다른 친구가 신입생 환영회에서 불렀던, 스무살의 그와 더없이 잘 어울리던 노래. 오랜만에 들으니 좋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리웠다. 삶은 죽음과 함께 있는 것일까. 이토록 찬란하고 슬픈 봄날에도….

이지혜 영화 수입·배급사 찬란 대표. <이브 생 로랑의 라무르> <테이크 쉘터>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 <카페 소사이어티> 등을 수입·배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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