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보다 덩치가 세배는 큰 상대에게 겁도 없이 뺨을 들이미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이하 <불한당>)의 “혁신적 또라이” 현수(임시완)처럼, 변성현 감독은 20대 때부터 겁 없이 영화라는 세계와 맞짱을 떴다. 20대의 청춘으로서 하고 싶었던 얘기를 첫 영화 <청춘 그루브>(2010)에 담았고, 폰섹스를 소재로 한 <나의 PS 파트너>(2012)로 도발을 했고, 새로운 장르적 갈증으로 누아르영화 <불한당>을 만들었다. <불한당>은 조직의 2인자 재호(설경구)와 잠입경찰 현수의 관계 변화를 따라가는 영화다. 누아르영화이면서 멜로영화의 감정선을 따라가는 이 영화는 익숙한 듯 낯선 시도들을 계속한다. 그러한 시도덕인지 <불한당>은 올해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받았다. 칸으로 떠나기 전 변성현 감독을 만났다.
-<불한당>이 칸국제영화제 미드나이트 스크리닝 부문에 초청됐다. 칸에서의 상영은 예상했나.
=전혀. 영화제에 가려고 만든 영화가 아니라 상업영화를 만든 거라 예상 못했다. 영화사에서 칸에 출품한다고 했을 때도 그냥 ‘그러세요’ 하고 말았다.(웃음) 초청 소식을 들은 날엔 기분이 좋아서 술도 꽤 마셨는데 지금은 담담하다. 일을 하다보면 좋은 일도 있고 나쁜 일도 생기는데, 그냥 중간에 굉장히 기분 좋은 일이 하나 생긴 거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영화제가 좋아할 만한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 (웃음)
-데뷔작 <청춘 그루브>는 힙합을 소재로 한 청춘영화였고, <나의 PS 파트너>는 폰섹스를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세 번째 영화 <불한당>은 앞선 영화들과 장르적으로 상당히 다른 지점에 있는 영화다. 두편의 영화를 만든 뒤 어떤 영화적 갈증이나 욕구가 있었던 건지.
=<청춘 그루브> 때부터 가졌던 목표가 각기 다른 장르의 장편영화 다섯편을 만드는 거였다. 감독은 배우나 다른 파트의 스탭들에 비해서 영화를 많이 만들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보고 싶었다. <나의 PS 파트너>를 찍을 때부터 <불한당>을 구상했는데, 당시 현장에서도 계속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 다음 영화는 무조건 남자영화 찍을 거라고.
-왜 하필 남자영화였나.
=<나의 PS 파트너> 땐, 말랑말랑한 감정 신을 찍는데 스스로 뭐가 오케이이고 뭐가 아닌지 모를 때가 있었다. 그래서 스크립터가 여성이었는데 계속 물어보게 되더라. ‘지금 이거 사랑스러운 거 맞아? 난 좀 징그러운 것 같은데. 어때?’ 말랑말랑한 감정 신에 확신이 안 생기다보니 다음엔 내가 평소에 즐겨봤던 장르, 지금과는 반대되는 지점의 영화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더커버를 소재로 한 누아르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불한당>이 출발한 건가.
=일단 장르적으로 접근해 만든 작품은 <불한당>이 처음이다. 외피는 누아르인데 멜로의 감정을 가져가는 영화였으면 했다. 보통 언더커버 영화는 이 사람의 정체가 탄로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제일 중요한 문제로 다뤄지는데 그런 건 배제하고 접근하려 했다. 두 인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로 접근한 다음 영화의 스타일에 대해서 스탭들과 오래 고민했다.
-<도니 브래스코>(1997), <무간도>(2002), <신세계>(2012)등 이미 언더커버 소재의 누아르영화들이 꽤 있다. 장르적으로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어떻게 승부를 보고자 했나.
=물론 장르의 컨벤션을 다 피해갈 순 없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천재이면 좋겠는데 그렇진 않으니까. 그래서 스타일로 차별점을 두자,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룩(look)을 만들어보자고 했다. 콘티 작업에 공을 많이 들였다. 프리 프로덕션이 3개월이었는데 3개월 동안 거의 콘티 작업에만 매달렸던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쓰면서는 누아르나 언더커버 영화들이 아니라 멜로영화를 계속 봤다. 작품 수로 따지면 누아르를 더 많이 봤는데, 반복해서 본 건 멜로였다. <러브레터>(1995),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2003), <8월의 크리스마스>(1998) 같은 영화들을 틀어놓고 시나리오를 썼다. 멜로의 감성에 계속 취해 있으려고.
-그게 도움이 되던가.
=도움이 됐던 것 같다. 그 영화들에서 무언가를 참고하겠다는 게 아니라 멜로영화의 감정을 간직하는 게 중요했다. 두 인물의 감정을 계속 생각해야 했으니까. 개인적으로는 현수에 대한 재호의 감정은 그것이 어떤 형태든 사랑이라 생각했다.
-얘기한 것처럼 영화는 배신의 서사가 아니라 우정의 서사를 취한다. “사람을 믿지 마라, 상황을 믿어야지”, “내가 누굴 믿는 게 가능하겠니?”라는 대사가 반복되지만 결국 그건 믿음의 문제를 부각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언더커버 영화가 보여줄 수 있는 장르적 쫀쫀함이 이 영화엔 없다고 생각한다. 의심하고 배신함으로써 벌어지는 긴장을 더 넣어야 하지 않겠냐는 얘기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다른 영화들과 다를 게 없지 않나. 이야기가 시간 순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은데, 그렇게 과거와 현재를 교차했던 것도 관계의 타이밍, 믿음의 타이밍에 대한 얘기를 하고 싶어서였다. 살다보면 그런 거 있잖나. 타이밍만 좋았으면 좋았을 관계 같은거. 일할 때도 연애할 때도 타이밍이 안 맞아서 뒤틀리고 어긋나는 일들이 많다. 죄책감도 그런 데서 비롯되는 감정이라 생각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외피는 누아르지만 시나리오를 쓸 때는 연애물이라 생각하고 썼기 때문에 영화를 보고 그런 감정이 느껴졌다면 나로선 성공한 거라 생각한다.
-앞서 콘티 작업을 하면서 새로운 룩에 대한 욕심이 있었다고 했는데 미술이나 촬영 등 뻔한 그림을 피해가려고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이더라. 한신 한신, 신 자체의 완성도에도 신경을 많이 쓴 느낌이고.
=신의 완성도가 높게 나왔다면 그건 마스터 신 촬영(편집을 고려해 동일한 상황을 사이즈나 앵글을 다르게 해서 촬영하는 것)을 안 해서 그렇다. 초반엔 오히려 배우들이 이렇게밖에 안 찍어도 되냐고 걱정했을 정도다. 현장에선 내가 생각한 대로 편집이 될 수 밖에 없게끔 찍는다. 웬만하면 콘티대로 찍는 편이다. 현장에서의 즉흥성을 별로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게 신의 밀도를 높이려 했고, 배우들도 차츰 내 방식을 좋아하게 됐다. 쓸데없는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고 집중도 잘되니까.
-교도소 안에서 거구와의 뺨 때리기 장면 같은 경우도 미국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장면이지 한국의 교도소를 생각했을 때 쉽게 연상할 수 있는 그림은 아니었다.
=한아름 미술감독님과 첫 미팅할 때 이 영화는 현실 기반의 영화가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이미 오프닝에서부터 총이 등장하지 않나. 소음기 안 낀 총을 항구에서 쏘고 시작하는 영화니까 이후에 좀더 과감한 표현을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교도소도 한국에선 볼 수 없는 스타일의 교도소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철창 있고 침대 있는 교도소도 괜찮다고. 한국적 상황이나 실정에 맞추지 말고, 버터 냄새 좀 나게 가보자고.
-액션 신에서 가장 공들인 장면은 후반부 최 선장 사무실에서 벌어지는 난투극인 듯싶은데,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의 장도리 신이 연상되기도 했다.
=우선 만화적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를테면 설경구 선배가 사람을 한대 치면 그 사람이 한 바퀴 휙 돌아가는 액션들. 그런데 허명행 무술감독님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얘기를 하니까 한숨을 쉬시더라. (웃음) 너무 만화적이지 않냐고. 내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찍기를 원한다는 걸 캐치한 다음부턴 허명행 무술감독님도 액션의 합보다는 영화의 호흡을 더 생각하며 작업해줬다. 최 선장 사무실 액션 신도 그렇게 탄생했다. 조형래 촬영감독님과 그런 얘기는 나눴다. 카메라가 수평으로만 움직이면 <올드보이> 얘기가 나올 것 같으니 카메라를 한 바퀴 돌려보자고. 그랬더니 촬영감독님이 하는 말이 ‘거기서 카메라를 왜 돌리죠?’였다. 앵글이든 워킹이든 워낙 의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이라 ‘그냥’이 없다. (웃음) 그런데 박찬욱 감독님의 <올드보이>는 워낙 클래식이고 너무나 잘 찍은 액션 신이어서 혹시 그 장면을 보고 <올드보이>가 연상된다 해도 개의치 않는다. 그 장면에선 그저 액션이 신나 보였으면 좋겠다.
-만화적인 스타일과 누아르영화의 감정이 부딪히진 않을까, 하는 우려는 없었나.
=주변에선 걱정을 했는데 나는 걱정 안 했다. 오히려 부딪히는 게 재밌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뻔한 얘기이고 장르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조금씩이라도 비틀어야지 관객이 ‘고민 좀 하면서 찍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고민을 많이 하면서 성의 있게 찍은 영화로 봐주셨으면 좋겠다.
-캐스팅 역시 예상치 못한 지점이 있다. 임시완은 그간 남성적인 매력이나 액션배우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준 적이 없는 배우다.
=그래서 캐스팅했다. 그동안 보여준 적 없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기본적으로 연기를 잘하고 진정성이 느껴지는 배우다. 그 친구가 울면 우는 연기를 잘하는구나 그런 느낌이 아니라 내가 다 찡해지는게 있다. 물론 처음부터 무겁고 남성적인 모습을 보여주면 생경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고, 서서히 캐릭터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관객도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얼굴이 너무 좋다. 찍다보면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잘생겼지’라는 생각이 든다. 설경구 선배도 워낙 얼굴이 좋은데 의외로 ‘간지’나는 캐릭터를 안 하셨더라. 충분히 장르적으로 멋있는 얼굴이다.
-나이 차이나는 선배 배우와 작업할 땐 나름의 소통 기술도 필요했을 것 같은데.
=내 디렉션이 어떤 스타일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설경구 선배는 담백하고 정확해서 좋다고 말씀해주긴 했는데, 사실 디렉션할 때 겁은 좀 났다. 내 생각과 배우의 생각이 다르면 어쩌지, 하는. 그런데 설 선배는 말로는 내가 요구하는 걸 안 들어줄 것처럼 하면서 슛 들어가면 디렉션한 그대로 연기를 한다. 아마 감독의 디렉션을 가장 정확히 지키는 배우가 아닌가 싶다. 대사의 조사 하나도 틀리는 법이 없고 시나리오의 말줄임표까지 다 지키면서 연기한다. 그게 좀 놀라워서 술자리에서 너무 정확히 안 하셔도 된다고, 편하게 하셔도 된다고 했더니 ‘감독이 나보다 더 고민 많이 했을텐데 감독 의도대로 해야지’ 그러시더라.
-촬영 중 술자리도 자주 가졌나.
=촬영이 70회차가 좀 안 될 텐데 80번은 먹은 것 같다.(웃음) 배우들은 다이어트도 해야 하고 몸도 만들어야해서 많이는 못 먹고 주로 스탭들이랑 뭉쳤다. 간혹 무리해서 마신 날엔, 나는 설경구 선배 핑계대고 설선배는 감독이 총대 메는 거라 그러고. 그래서 현장에서 별명이 설근혜랑 변순실이었다.(웃음) 물론 편하고 친하니까 그런 농담도 할 수 있다.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현장이었다. 이번 현장이 좀 특별한 경우였는데, <나의 PS 파트너> 찍을 땐 술 한잔도 안 마셨다.
-차기작으로 써놓은 시나리오가 있다고.
=1960~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정치물이다. 요새 정치물이 많이 나와서 비슷하다는 얘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역시나 어떻게 다르게 찍어서 보여줄 건지가 관건일 듯하다. 멜로영화를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다. <불한당>도 일종의 멜로라 생각하고 만들었지만 제대로 된 멜로, 요즘은 실종돼버린 정통 멜로도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