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씨네 인터뷰] "내 영화의 출발은 실험적 내러티브" -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 김소영 감독
2017-05-25
글 : 정지혜 (객원기자)
사진 : 최성열

1860년 러-청 베이징 조약 체결 이후 연해주는 러시아의 땅이 되었다. 생존을 위해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에 따라 17만여명의 고려인들은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지로 강제 이주된다.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다. 영화연출가이자 영화평론가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상이론과 교수인 김소영 감독은 오랫동안 고려인들의 이산의 흔적을 좇았다.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개봉 5월 25일)는 그중에서도 연해주에 있던 고려극장의 배우들이 이산 이후 카자흐스탄에 세운 고려극장, 그곳의 여성 예술가들의 삶과 노래를 전한다. 올해는 고려인 강제 이주가 시작된 지 80주년 되는 해로, 현재 한국에 거주하는 고려인 4세대의 합법적 체류 자격 획득을 위한 ‘고려인 특별법’ 개정을 추진 중이다.

김소영 감독은 영화의 이론과 현장에서 젠더, 공간, 민족 등을 끌어안는 ‘트랜스’(trans)적 접근에 촉수를 드리워왔다. 김소영 감독과 긴 시간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오랜 연구와 영화적 모티브로서의 중앙아시아, 여성에 대해 들었다. 이것은 평론가로서 그녀가 감지하는 현재의 한국영화, 그 안의 페미니즘적 흐름과도 이어지는 지점이었다.

-2014년 평론집 <비상과 환상>을 펴낸 후 가진 <씨네21>과의 인터뷰(976호)에서 ‘사운드 오브 노마드’라는 기획으로 카자흐스탄에 가서 고려극장 디바들을 만날 예정이라 말했다. 그것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로 완성됐는데 어떻게 시작된 기획인가.

=이 작품은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2014)으로 시작된 ‘망명 3부작’의 2부에 해당한다. <눈의 마음: 슬픔이 우리를 데려가는 곳>은 애도 속에서 시작한 작품이다. 당시 나의 아버지, 우리 아이들의 아버지, 나의 멘토인 선생님이 차례로 돌아가셨다. 또 그때 내가 안산에 있는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에 관심을 뒀다. 그 무렵 어느 고려인 할머니가 간직하고 있는 새하얀 수의를 찍은 사진 한장을 봤는데 그 이미지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분에게 수의는 슬픔의 상징이 아닌 자신의 조국의 한 편린으로서 죽음의 시간으로 가져가고 싶은 그 무엇이었다. 키르기스스탄으로 가서 또 다른 고려인들을 만나 다시 한번 그들의 수의를 보게 됐고 그곳 천산에서 아버지의 첫 제사까지 드렸다. 내 아버지(고 김열규 교수)는 중앙아시아, 러시아 고려인들을 연구하신 분이다. 아버지의 유지, 고려인들의 수의, 개인적이고 집단적인 고려인의 슬픔과 트라우마까지. 슬픔이 나를 거기로 데려갔고 그곳에서 고려인의 역사와 만난 것 같았다. 우발적이고 우연적인 모든 것들의 마주침이었다. 그 뒤 카자흐스탄의 고려극장에 갔는데 그곳에 있던 여성 가수들의 이야기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마침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아시아의 디바에 관한 기획을 제안하기도 했다. 모든 우연들이 이어진 셈이다.

-고려극장의 예술가들 중에서도 유독 여성 예술인들에게 관심을 가진 이유가 궁금하다. 특히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으로는 처음으로 인민배우로 인정받은 이함덕 선생과 그다음 세대라 할 수 있는 1970, 80년대 고려극장의 디바인 방타마라 선생을 주목했다.

=소비에트 시절의 중앙아시아, 그 변방에서도 소수민족인 고려인, 그들이 세운 극장의 디바라니. 아시아의 접경 지역이고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문제가 겹친다는 점에서 새로운 조합이었다. 그들의 언어 역시 고려말, 한국어, 러시아어가 뒤섞여 있다. 내가 아는 아시아의 범위를 뛰어넘는 또 다른 아시아로서 상당한 관심이 생겼다. 이함덕 선생은 고려극장 역사상 가장 중요한 분이다. 이분이 남긴 노래가 채록돼 있다. 배우로서, 가수로서 뛰어났고 또 훌륭한 여성이다. 콜호스(집단농장) 노동조합에서 프로파간다를 위한 노래를 많이 부르셨다. 방타마라 선생은 여성 예술가로서 내게 공명이 되는 부분이 컸다. 그 혹독한 조건 속에서도 러시아 대중가요, 민요, 그리고 재즈에 한국 노래까지 월드뮤직을 구사한다. 1970년대 재즈는 소비에트에 공식적으로 금지돼 있었는데 말이다. 이함덕 선생은 역사적 의미로서, 방타마라 선생은 월드뮤직의 디바로서 영화의 중심에 두고 조명하고자 했다.

-고려극장의 디바들, 아리랑 가무단의 유랑, 그 후속 세대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이어지며 본격 ‘음악다큐멘터리’라고 명했다.

=사람이 가만히 있다가 입을 열어 소리를 낼 때, 노래하거나 허밍할 때, 그 순간이 정말 좋다. 그것이 내겐 영화적인 즐거움과 맞닿아 있는, 나의 판타지다.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2014)에 허밍과 노래가 많은 것도 그래서다. 나윤선, 강허달림 등의 노래를 들으며 <경>(2009)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는데 이처럼 내게는 음악이 먼저 오고 그걸 바탕으로 뭔가를 쓰거나 편집하는 식이 익숙하다.

-앞서 잠시 언급됐지만, 영화에는 다양한 언어들이 뒤섞여 있다. 전문 통역가를 두지 않고 직접 고려말을 하며 인터뷰이들과 대화를 시도하고 그로 인해 서로 잘못 알아듣는 일도 생긴다. 그간 트랜스아시아 문화연구를 통해 영화와 영상이 문화적 차원의 번역이라 말해오기도 했다.

=내 트랜스 연구에서 트랜스레이션이 중요한 키워드다.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에서도 번역이 중요한 주인공이다. 그때도 전문 통역가를 쓰지 않았고 고려인 커뮤니티에서 살아온 사람에게 통역을 맡겼다. 그러다보면 오역도, 예상치 못한 소음도 많다. 그 과정을 영화에 고스란히 담았다. 그게 다큐멘터리가 되는 거다. 이런 것도 있다. <김 알렉스의 식당: 안산-타슈켄트>의 주인공 중 김허스베타씨는 통역 과정에서 내게 숨기고 싶어 하는 부분이 있었다. 숨기려 한 그것에 그의 진짜 역사가 있는데 그걸 나는 다 찍어둔다. 오해와 오역, 숨겨진 것에서 문화적 코드와 윤리를 읽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번 영화에는 고려극장 예술가들의 이야기 외에도 실험적 이미지 숏들이 들어가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부동항의 차갑고 푸르스름한 기운 속에서 홀로 걷는 여인의 형상이나 이함덕 선생의 묘지를 이야기할 때 공동묘지를 트래킹 숏으로 훑을 때가 대표적이다. 애상과 영적기운이 전해지는 것 같다.

=실험적 내러티브가 내 영화의 출발이었다. 내가 한국영화아카데미 1기 출신인데 그때도 그런 시도를 해서 졸업작품 F학점을 받았다. (웃음) 실험적인 내러티브가 체화돼 있다. 영화학자인 내 친구는 내 영화를 “오리지널 이미지와 아카이브 이미지를 경계 없이 써서 급진적 효과가 나는 방식의 영화”라고 하더라. 추상적 단위의 것과 일상적인 그것이 갑자기 붙어버린다는 평도 있다. 그게 내 영화언어이고 영화미학이며 내가 주장하고 싶은 부분이다. <경> 때도 나 나름대로는 대중영화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는데 2년 뒤 다시 보니 ‘실험영화였네?’ 싶더라. (웃음) 그런 시도가 관객에게 좀더 받아들여지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평론집 <비상과 환상>의 프롤로그에 ‘영화의 예지력’에 대해 말하며 ‘동시대와 미래의 수상한 기류를 스크린에 포착해내는 힘’을 영화가 담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번 영화에서 관객이 어떤 기류를 읽어내길 바라나.

=영화에 우발적인 역사성이 기입되고 예측하지 못한 것들이 엮여간다는 의미다. 우발성의 유물론일 수 있겠다.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한 게 아닐까 싶다.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가 지난해 개봉에서 올해 개봉으로 바뀌었는데 올해가 고려인 강제이주 80주년이다. ‘기억과 동행’위원회가 발족되는 등 각종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고려인 특별법’을 위한 움직임도 있다. 역사적 우연성이 이어지고 있는 거다.

-영화평론가의 시선으로 최근 한국영화 가운데 언급하고 싶거나 인상적이었던 작품, 혹은 어떤 흐름이 있나.

=여성, 공간, 시대적 시각으로 봤을 때 지난해는 연상호 감독의 <서울역>(2016)이 좋더라. 무엇보다 애니메이션 작화와 더빙이 마치 딱딱한 나무처럼 매끄럽지 않은데 그게 한수였다. 주인공이 여귀로 변하는 결말도 공포영화라는 장르적 옷을 잘 입은 결과로 보였다. 대중영화로서 <서울역>을 포함해 같은 감독의 극영화 <부산행>(2016)도 레디컬한 면이 있다.

-1988년 여성영상집단 ‘바리터’ 등을 만들고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초대 프로그램 디렉터와 공동집행위원장 등을 지내며 영화 내 젠더 이슈에 대한 이론적, 실천적 고민을 이어왔다. 오랜 연구자로서 지난해 영화계 안팎으로 터져나온 페미니즘 이슈, 여성 영화인들의 활동, 영화내 여성 주인공을 그리는 방식, SNS상 페미니즘적 영화읽기와 관련한 일련의 흐름에 대한 생각을 묻고 싶다.

=사회의 발언권이라는 걸 생각해보게 됐다. 우리 세대는 페미니즘의 역사를 공부하고 페미니즘적 언어를 구성하려 했다면 지금 세대는 여성 혐오를 미러링해야 한다. 20, 30대 여성감독들, 비슷한 세대의 여성관객이 SNS를 통해 세대의 이야기를 말하고 있는 거다. 지금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세대가 더 많이 말하는 게 중요하고 나는 그걸 들어보는 게 필요하다. 이 세대가 어떤 영화를 열렬히 좋아한다면 그 이유를 들어보고 나 스스로 생각해보는 거다. 내가 페미광장(페미니즘 정치 의제들을 토론하고 공론화하기 위한 페미니스트의 연대 모임이다.-편집자)의 초대 발기인이다. 초동 모임 때 만난 메갈리아, 워마드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기회가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더라. 요즘은 온라인 성범죄를 추방하고 소라넷 폐쇄를 이끈 DSO(디지털성폭력아웃)의 하예나씨의 작업을 주목하고 있다.

-변화된 시대에 비평의 역할은 무엇이라 말하겠나.

=‘I like’라는 취향이, SNS상의 셀럽 문화가 중요한 시대가 아닌가. 지면, 정황, 맥락이 과거와 너무 달라져 자칫 비평의 일이라는 게 판관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듣는다는 게 중요해졌다. 또한 대안적 비평의 지면을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다. 필자의 스펙트럼이 다양해져야 한다. SNS상의 움직임 못지않게 시네필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사는 것 역시 중요한 것 같다. 굉장히 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시네마를 만들어내는 시대다. 다른 서로를 지켜주는 비평적 사회, 공동의 지면이 필요해 보인다.

-전 정부가 주도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로 존폐 위기에 처한 시네마달을 구하기 위한 펀딩 사업이 종료됐다. 그 후원의 결과로 시네마달이 배급하는 첫 번째 작품이 <고려 아리랑: 천산의 디바>인데. 막중한 책임감을 짊어진 건 아닌가. (웃음)

=평론가로서 시네마달을 제대로 만났다고 할 수 있는 건 <두 개의 문>(2011) 때다. 용산참사를 겪으며 이런 시기가 과연 끝날 수 있을까 참담했다. 그때 시네마달이 영화의 배급을 결정했다. 작품 자체도 의미가 컸고 시네마달의 결단도 대단했다. 오죽하면 <비상과 환상>의 첫 번째 글이 <두 개의 문>이겠나. 그만큼 내겐 중요한 작품이다. 그때부터 시네마달의 김일권 대표를 존경하기 시작했다. (웃음) <다이빙벨>(2014)도 마찬가지다. 의인의 모습에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김일권 대표는 영화 의인의 첫 번째 케이스랄까.

-현재 망명 3부작의 마지막 <굿바이 마이 러브 N.K>를 편집 중이라 했다. 함께 준비 중인 또 다른 작품이 있나.

=한국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인 주세죽에 관한 비디오 작품을 만들었다. 10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신여성전’의 기획으로, <SF Drome>이라는 제목으로 상영한다. ‘SF’는 ‘Socialist Feminist’, ‘Science Fiction’을 의미한다. ‘Drome’은 카자흐스탄의 크즐로르다 근처에 있는 우주발사 기지인 코스모드롬에서 따왔다. 그곳에서 로켓 발사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았다. 근대의 발아기 여성 활동이라는 사회적 유토피아와 우주발사라는 근대의 유토피아가 만나는, 유토피아적이면서도 파국적인 순간에 대한 이야기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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