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중목욕탕을 처음 가본 것은 교토에서였다. 1995년 여름, 아내와 함께 도쿄를 거쳐 교토로 여행을 떠났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신칸센 대신 완행기차를 타고 여행을 했다. 교토행 야간열차를 탔게 되었는데, 불행하게도 그날은 일본의 추석 ‘오봉’ 전날이었다. 열차 안은 귀향하는 사람들로 발 디딜 자리조차 없었다. 하룻밤을 서서 보낸 후 아침에 도착한 교토에서, 절실했던 것은 관광보다는 자는 것이었다. 정오에, 게스트하우스에서 우리는 간신히 일어났다. 어렵게 예약해두었던 가쓰라별궁을 찾아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건축가 브루노 타우트부터, 르 코르뷔지에, 발터 그로피우스가 감탄했던, 다다미, 벽, 구조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된 직각디자인, 일본 건축의 형식미에 매혹되기에는, 내 교양이나 몸의 생리적 상황이 적합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목욕 시설이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동네목욕탕 이용권을 나누어주었다. 일본의 끈적끈적한 8월 날씨 속에, 우리는 젖은 솜처럼 무거운 몸을 이끌고 목욕탕을 찾아갔다. 더빙한 일본 만화를 한국 만화로 오해할 정도로 비슷한 일본의 생활습관은 우리를 쉽게 목욕탕으로 이끌었다. 수건과 비누를 한손에 들고 교토의 골목길을 지나 도착한 곳은 영화 속 목욕탕과 흡사한 단층건물이었고, 남자와 여자의 출입구는 나누어져 있었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가면 바로 왼쪽으로 영화에서처럼 주인아저씨가 높은 의자에 앉아서 표를 받고 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표를 건넨 후 나는 곧 목욕탕의 구조를 깨닫게 되었다. 목욕탕 주인은 남자 탈의실과 여자 탈의실을 모두 바라볼 수 있는 중간 벽 앞에 앉아 있었다. 순간 나는 반대편으로 들어간 아내를 생각하며 잠시 동안 머뭇거렸다. 하지만 마음속 갈등에도 불구하고 곧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상황때문인지, 이미 들어와버린 관성 때문인지, 혹은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이기 때문인지, 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른 문화는 그것이 만들어진 맥락과 상황이 존재하고 있다는 상식적인 원칙에도 불구하고 모두 동등한 관계인 혼탕과는 다르게, 목욕탕 주인에게만 ‘특권’을 주는 일본의 목욕탕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이었다. 남녀의 벗은 몸이 그다지 대수인가라는 생각과 함께, 여행지 에피소드로 지나갔던 교토의 ‘의문’이 <행복 목욕탕>(2016)을 보면서 다시 떠올랐다.
일본의 목욕탕 그리고 <행복 목욕탕>
<행복 목욕탕>은 시한부 불치병에 걸린 후바타(미야자와 리에)가 남은 가족을 위해서 자신이 없는 미래를 준비하는 영화다. 소심한 딸 아즈미(스기사키 하나)와 말도 없이 사라졌던 남편 가즈히로(오다기리 조), 그리고 그 남편이 밖에서 데려온 딸 아유코(이토 아오이)가 그녀의 가족이다. 다소 진부할 수도 있는 이야기는 영화 속 다양한 복선을 통해서 활기를 띤다. “미래에 발생할 사건에 대하여 그에 관련된 일을 미리 넌지시 암시해 보이는 일”이라는 복선의 반복적인 사용은, 엄마가 자신이 없는 미래를 준비한다는 영화의 구조와 조응한다. 복선을 만들기 위해 사용된 다소 부자연스러운 설정이 영화에 작위적인 느낌을 주지만, 시간차를 갖고 계속 드러나는 복선의 결과들은 영화를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영화 속 복선 중 첫 번째는 중학생 딸 아즈미의 속옷에 관한 것이다. 빨래를 개던 후바타는 딸의 낡은 속옷을 발견하고 미래의 딸을 위해 꽃무늬 속옷을 준비한다. 후바타는 아즈미에게 새 속옷을 건네며, 언젠가 남자친구가 생기면 필요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며칠 후, 학교에서 따돌림을 받던 아즈미는 교복대신 체육복을 입고 집으로 돌아온다. 체육시간 동안 누군가 아즈미의 교복을 갖고 가버린 것이다. 후바타는 교복이 없으면 학교에 가지 않겠다고 애원하는 아즈미를 체육복 차림으로 보낸다. 쉽게 새 교복을 사주는 대신 아즈미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놀랍게도, 소심한 아즈미가 선택한 것은 수업시간에 체육복을 벗어버리는 것이다. 체육시간이 아닌 수업시간에는 교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규칙 아니냐고 외치면서, 속옷 차림으로 자신의 교복을 돌려달라고 말한다. 후바타가 새로 사준 꽃무늬 속옷을 입고 교실 책상 앞에 서 있는 아즈미의 모습을 통해서, 감독은 후바타가 딸에게 사주었던 것은 속옷이 아니라 자신감, 세상을 마주해서 버티게 해주는 자존감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감독의 기대와 달리(혹은 기대한 대로?) 나는 이 장면에서 뜬금없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생은 다른 곳에>를 떠올렸다.
소설 <생은 다른 곳에>에는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주인공 야로밀이, 한 저녁 모임에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가 있다. 술이 동반된 저녁 모임에서, 참석자들 사이에 야로밀과 한 여자를 연결해주려는 분위기가 생겨난다. 술과 낯선 장소가 만나서 생겨날 수 있는 하룻밤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야로밀은 지속적으로 이미 자신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겉으로 주장하는 고상한 동기 아래 야로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것은 그 당시 입고 있었던 낡은 팬티였다. 여자에 대한 이끌림보다 더 강렬하게, 야로밀은 낡은 팬티에 대한 ‘수치심’에 장악되었다. 쿤데라의 표현처럼, 팬티를 바지와 같이 벗을 수 있는 여유로움은 청년의 몫이 될 수 없다. 후바타가 사준 꽃무늬 속옷을 입고 서 있는 아즈미의 마음속에서 펼쳐질 미세한 감정의 변화를 추론하는 것은 가족영화 <행복 목욕탕>에 낯선 느낌을 준다.
예의바른 일본 서포터들의 거리 응원
나에게 일본 문화는 ‘형식의 세계’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형식이 가벼운 우리나라 교실에서 체육복 입은 학생이 이상하지 않을 수 있는 반면, 형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수치스런 행동이 될 수 있다. 일본영화를 보다 보면 형식에 대해 놀랍도록 깊이 있는 작품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러운 설정이나 행동들을 보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 나는 그런 일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역설적으로, 형식에 대한 집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건축사무소 아틀리에 바우와우(Atelier Bow-Wow)의 책 <버블경제 이후의 도시>에는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일본의 길거리 응원을 찍은 이미지가 있다. 아틀리에 바우와우의 설명에 따르면 일본 축구팀의 승리에 열광한 서포터들은 거리로 뛰어나왔다. 응원가를 부르며 인도로 몰려다니던 사람들은 횡단보도의 경찰 앞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파란색 신호등과 빨간색 신호등을 따라서 횡단보도를 왔다 갔다 하는 진자운동을 하는 것이었다. 규율 자체를 무너뜨려 차도를 점령하는 대신 인도까지만 점령하는 예의바른 일본 서포터들의 행동은 규율에 대한 일본인의 몸에 밴 집단의식을 보여준다.
세상은 언제나 예상치 못한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에 형식이나 규율은 필연적으로 어긋나는 상황을 만들어낸다. 남녀 탈의실을 바라보는 공중목욕탕 주인이나, 교실에서의 속옷 차림이나, 거리응원의 진자운동이나 모두 형식이 만들어낸 ‘변종’들이다.
아틀리에 바우와우의 또 다른 책 중에는 도쿄라는 도시가 만들어낸 흥미로운 ‘이종’ 건물들을 모아놓은 것이 있다. 경사지에 위치한 절이 앞 상업건물의 옥상을 마당으로 사용하는 경우나 백화점의 옥상을 운전교습학원으로 쓰는 경우, 고가도로에 주차장이 직접 연결된 경찰 건물 같은 것이 그런 예이다. 그리고 그 책의 이름은 <메이드 인 도쿄>다. 다른 곳의 삶은 언제나 흥미롭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