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영을 알아간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그는 늘 한번에 한 단계씩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문을 열어준다. 첫술에 아주 속깊은 대화를 나누겠다는 욕심이나, 지름길 따위를 찾겠다는 기대는, 버리는 편이 낫다. 하지만 한 문을 통과하고 나면 그는 배신하지 않고 다음문을 열어준다. <천사몽>으로 처음 만났을 때 그저 그는 예쁜 소녀였고, <후아유> 촬영장에서 다시 만난 그는 욕심많은 배우의 향기를 슬쩍 흘렸다. 그리고 오늘, 지난번 볼 때보다 훨씬 밝아진 것 같다고, 말도 많이 편해진 것 같다고 했더니, “우리, 이제 세번째 만나는 거잖아요” 한다. 오른쪽 입술 끝이 씩 올라가면서 시작되는 그 매력적인 미소가 금세 얼굴 전체에 크게 번진다.
3년 전 입은 상처 때문에 세상을 향한 귀를 반쯤 닫아버리고 살아가던 수족관 다이버 서인주와 게임기획자 형태(조승우)와의 ‘숨바꼭질’ 같은 사랑을 담은 청춘영화 <후아유>는 이나영에게는 “심리적 데뷔작”이나 다름없다. “말투나 행동이나 옷입는 것조차 내게 딱 맞는 시나리오였어요. 물론 나와 인주가 똑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 감성을 충분히 끌어내올 수 있는 많은 공통점을 가진 건 사실이에요.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 낯을 가리는 것이나 어떤 부분이 많이 닫혀 있다는 거나, 뭐 하나 꽂히면 정말 열심히 하는 거나….”
눈물을 흘리는 순간에도 누가 볼까, 이 기분을 들켜버릴까, 또로록 예쁘게 흘러내릴 틈도 안 주고 쓱쓱 바쁘게 닦아내버리는 인주의 모습이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가 싫어, 날 설명해야 하잖아” 같은 극중 대사는 어쩌면 이나영을 보고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극중에 인주가 휴대폰으로 메시지에 ‘from 자폐소녀’라고 쓰는데, 저도 그런 면이 있나봐요. 벽이 너무 많대요. 예의 바른 말만 한다고, 거리감 느껴진다고 싫어하시는 분들도 있던걸요.”
하지만 인주가 형태 혹은 사이버상의 ‘투명친구 멜로’를 만나가며 서서히 변화해갔듯이 <후아유>라는 마음 통하는 친구와 두 계절을 보낸 이나영은 분명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이번 영화 찍으면서 독하다는 말 많이 들었어요. 원래 스트레스는 울어서 푸는 편인데 <후아유> 찍으면서는 한번도 운 적이 없었어요. 그냥 여기서 울어버리면 다시는 못 일어날 것 같다는 느낌, 주저앉아버릴 것 같다는 그런 느낌…. 왜 그랬을까? 한 신을 찍어도 왠지 그날, 그 시간이 아니면 못 찍을 것 같았어요. 글쎄요, 뚜렷이 기대치가 있었던 건 아니에요. 끝나고 나면 나 이 정도 배우가 되어 있어야지 하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아요. 그냥 열심히 하고 싶다는 생각밖엔….”
화장품 CF에서 공기보다 가볍게 오렌지보다 상큼한 웃음을 날리는 그녀에게 반하지 않을 남자가 몇이나 있을까? 그러나 이나영은 묘하게도 이런 이성적인 매력 뒷면에, 힘들어하는 벗에게 조용히 빈 어깨를 내줄 것만 같은 속깊은 이성친구의 느낌을 동시에 품고 있다. 이렇게 순수하면서도 중성적인 이나영의 이미지는 배두나의 발랄한 엉뚱함이나 이요원의 새침한 여성스러움이 위치한 반대편 꼭지점에서 팽팽한 트라이 앵글을 만들어낸다.
지하철 건너편에 선 남자의 초콜릿 사이로 보이던 그 아련한 얼굴. 그 어디에도 없을 것같이 생긴 소녀와 만난 지도 벌써 5년이 흘렀다. “너 생각보다 꽤 오래 버틴다, 그런 말 들었던 적이 있어요. 글쎄 어떤 부분 강해지고 고집도 세진 것 같아요. 이곳에서 다치기 싫어서, 물들기 싫어서요. 물든다는 게 나쁜 게 아니고 배우란 늘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니까 원래 내 모습을 잃어버리기 싫어서 고집을 부리는 걸 테지만….” 은근한 황소고집에 외골수인 이나영에겐 곡선이 주는 유연함보다는 직선이 주는 명쾌함이 있다. 다소 뻣뻣해보인다는 오해를 살지라도 곁눈질하지 않고 머리굴리지 않고 계산하지 않는 직선의 삶이 주는 ‘쿨’함을, 그는 알고 있다(<후아유> 중 춤추는 모습을 보면 그가 얼마나 막대기인지를 알게 된다. 농담이다) .
“물론 배우로서의 이런저런 역할을 해보고 싶은 욕심도 있지만 지금은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것부터 해보이고 싶어요. 제가 자신없어 하는 연기를 관객이 좋게 볼 리가 없잖아요. 사실 관객은 아직 내 진짜 모습도 제대로 못 본 상태인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