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겟 아웃>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얘, 너 피나.”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낀 우아한 여인의 입술에서 옆집 언니 같은 말투가 촐랑촐랑 흘러나온다. <꿈의 제인>의 트랜스젠더 제인(구교환)은 등장부터 관객의 호흡을 앞지르고 예측을 비껴난다. 선악과 희로애락의 구분은 이 배우의 연기 매뉴얼에 없다. 제목대로 제인은 이상적 인간형이다. 인생은 대체로 불행하므로 어울려 살아야 한다는 믿음을 가진 그녀는 불행의 달인이고 행복의 감식자다. 그래서 알록달록하고 반짝이는 것들을 소중히 여기고 나누고자 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순간도 시시해지지 않는 제인. 페드로 알모도바르 영화 속에도 스르륵 잠입할 법한 캐릭터다.
05/17
전도유망한 사진가 크리스(대니얼 칼루야)는 여자친구 로즈(앨리슨 윌리엄스)의 부모와 처음 인사를 나누러 주말 여행을 떠난다. 로즈는 흑인 애인은 처음이라면서도 가족에게 크리스의 피부색을 미리 말할 필요 없다고 장담한다. 아프리카계 남자친구를 데려간다고 따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촌스럽다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로즈에게 크리스는 더이상 토를 달지 않는다. 과연 딘(브래들리 휫퍼드)과 미시 아미티지(캐서린 키너) 부부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현관부터 딸 커플을 포옹으로 환대한다. “법만 허락했다면 오바마를 대통령으로 세번 뽑았을 걸세”라고 호언하는 로즈 아버지는 집 안에 진열된 다양한 여행 기념품을 자랑하며 다문화 체험의 가치를 예찬한다. 그러나 이 집안의 공기는 어딘가 뒤틀려 있다. 세 식구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상하다는 것이 시나리오의 좋은점 중 하나다. 아버지는 과한 친밀함을 과시하고 어머니는 심판관의 눈으로 관찰하고 동생은 육체적으로 크리스와 겨뤄보지 못해 안달이다. 한편 흑인 고용인들도 마네킹처럼 움직인다. 크리스는 찜찜하지만 흑인의 피해의식을 드러내는 꼴이 아닐까 불안을 다스린다. 그의 앞에는 세상에서 가장 긴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
조던 필레 감독의 호러 무비 <겟 아웃>이 동시대 미국 사회에서 발굴한 괴물은 인종주의다. KKK나 네오 나치, 유색인종이 열등하다고 믿는 노골적 인종주의가 아니라 포스트 인종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고 자부하는 사회에 여전히 잠복한 소극적 인종주의라는 점이 중요하다. “내가 타이거(우즈)랑 안면이 있어요.” “팔 단단한 거 봐. (은근히 눈짓하며) 로즈, 정말 좀 달라요?” “아무래도 이제 어두운 피부가 유행이죠.” 크리스와 로즈가 도착한 이튿날, 공교롭게(?) 열린 파티에서 크리스를 향해 백인 손님들이 건네는 말은 호감을 앞세우고 있지만 동시에 모조리 크리스가 흑인이라는 사실에만 사로잡혀 있다. 즉 “여기서 당신만 흑인이야”라는 메시지를 다양한 버전으로 던지고 있는 셈이다. 인종주의 따위 키우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이 교양인들은 흑인의 피부색, 육체적 특성, 유명한 흑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 외에는 개인으로서 크리스와 대화하는 방법을 모른다. ‘비인간화’까지는 아니어도, <겟 아웃>의 백인들은 크리스를 살아 있는 개인이 아닌 고착된 오브제, 감상되고 연구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한다. 한편 극중 누군가는 “피부색은 내 눈에 안 보여”라며 편견으로부터의 자유를 자랑한다. 그러나 이것도 엇나간 해결책이다. 피부색을 비롯한 모든 차이는 인지돼야 한다. 다만 그것이 고유한 개인에 관한 이야기의 전부여서는 곤란하다.
애초부터 크리스의 주말 여행에 반대했던 친구 로드(릴렐 하워리)는 크리스에게 수상쩍은 상황을 전해 듣자마자 “너, 성 노예로 잡혀간다”라고 펄쩍 뛴다. 물론 코믹 효과를 의도한 대사이긴 하지만 이어 드러나는 진실은 로드의 경고와 동떨어져 있지 않다. <겟 아웃>의 늙은 백인들은 흑인을 사냥하고 경매한다. 백인의 뇌로 움직이는 흑인의 육체로 여생을 살고 싶어서다. 더 날쌔고 더 강하고 더 쿨해지고 싶은 그들은 흑인의 특정한 인종적 속성과 예술성을 동경하되 궁극적으로 백인 주체가 흑인의 장점을 전유하는 방식이 가장 바람직한 종합이라고 믿는다. 여행을 예찬하고 수집품을 애지중지하는 딘의 다문화주의가 해당 문화를 창조한 주체에 대한 존중이 결여한 페티시즘인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컨대 <겟 아웃>이 풍자하는, 표면적으로 인종차별을 극복한 사회에서 비백인 문화는 오직 백인의 교양과 발전을 도울 자원으로 존재한다. “크리스, 인생의 목적이 뭐지?” 영화의 3막에서 딘이 던지는 질문은 “흑인인 네게도 한층 고차원적 목적에 삶을 바치는 쪽이 유의미하지 않겠냐”는 강변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들린다.
05/18
호러로서 흔치 않게 <겟 아웃>은 2차 관람의 가치가 충분하다. 프롤로그부터 엔딩까지 비명의 횟수를 채우기 위해 샛길로 빠지는 법 없이 대주제와 사건의 전모를 착실히 쌓아올려서다. 영화 전체의 미니어처인 프롤로그부터 핵심은 분명하다. 길을 잃고 밤의 백인 중산층 주거지역을 홀로 헤매는 흑인 남성(레이키스 스탠필드)은 수상한 차가 다가오기 전부터 공포를 느낀다. 이 장면은 첫째, 영화에 흔히 묘사되는 흑인 구역에 간 백인이 느끼는 위협을 역전시키고 둘째, 단지 검은 후드티를 입었단 이유로 의심받아 사살된 흑인 소년 트레이본 마틴 사건을 연상시킨다. 처음에 심상히 보아넘겼던 <겟 아웃> 전반의 몇몇 장면은 퍼즐이 맞춰진 관람에서는 등골에 한기를 흘려보낸다. 예컨대 로즈가 부모에게 크리스의 피부색을 언급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파티에서 손님들이 크리스의 취미를 화제로 삼은 것은 각기 취향에 부합하는 몸을 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미티지가 사람들의 금연에 대한 열정은, 크리스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한밤중 정원을 질주하고 거울을 들여다보던 월터와 조지나는, 다시 얻은 젊은 육체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하나만 보태자면, “장총으로 위협당하면서 잔디밭에서 도망치고 싶진 않아”라는 크리스의 농담은 약 48시간 후 정확히 현실화된다.
05/19
<여고괴담> 1, 2편이 진심으로 무서웠던 까닭은 관객이 한국 교실의 경쟁과 소외가 만들어내는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팔로잉>의 여운이 길었던 이유는 섹스와 성년의 도래를 맞이하는 보편적 공포를 호러의 문법으로 적절히 형상화했기 때문이다. <겟 아웃> 역시 현실에 만연된 두려움과 제대로 접속하는 공포영화다. 조던 필레 감독은 리버럴이건 아니건 다수의 백인에 둘러싸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흑인/소수자 구성원이 느끼는 불안과 압박을 위트 있는 신체 호러로 변환했다. 인종이 다른 연애에서 두 사람의 관계가 주변으로 확장될 때 마이너리티에 해당하는 쪽이 예감하는 배척, 반항하는 무례한 흑인의 스테레오타입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상대의 차별적 발언을 웃어넘기는 안간힘, 만약 항의하면 무슨 결과가 올지 우려하는 두려움을 <겟 아웃>은 겁나게 잘 알고 있다. <겟 아웃>의 파티 장면에서 유일한 일본인 참석자- 아마도 백인과 동일시하는- 가 뜬금없이 묻는다. “크리스, 오늘날 아프리칸 아메리칸으로 산다는 것은 상대적 메리트인가요, 핸디캡인가요?” 통계와 현상이 입증하는 객관적 불평등을 무시하고 몇몇 문화적 코드를 근거로 다수자가 역차별당하고 있다는 주장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겟 아웃>이 그리는 현재의 세계는 흑인들이 뺑소니를 당해도 빨리 구조받지 못해 도로 위에서 죽어가고, 실종돼도 찾는 이가 없이 멀쩡히 굴러가는 세상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시민들의 나라에서 살고 있다는 자부심이 넘쳤던 오바마 전 대통령 임기에 기획되어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한 1월 20일 직후 선댄스영화제에서 공개된 타이밍은 참으로 절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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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아닌 나
<겟 아웃>에서 가장 슬프고 무시무시한 연기를 보여주는 배우는 가정부 조지나역의 베티 가브리엘이다. 조지나는 그려붙인 듯한 미소를 띠고 완벽한 백인 상류층화법으로 말하며 아미티지가의 집안일을 돌본다. 그러나 때때로 그녀는 보이지 않는 상대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듯 넋을 놓는다. 의식의 지하에 잔존하는 흑인 여성의 자아가 이식된 백인 부인의 의지에 저항하는 순간이다. 영화 후반에 밝혀지는 복잡한 내막을 몰라도 베티 가브리엘의 얼굴 클로즈업은 관객을 휘어잡는다. 특히 친밀한 흑인의 슬랭으로 크리스가 조지나에게 말을 걸었을 때 클로즈업숏에 잡힌 리액션은 압도적이다. 크리스의 신호로 일깨워진 조지나의 슬픔은 눈물로 새어나가지만, 뇌가 지배하는 얼굴은 미소를 띤 채다. 마치 두개의 얼굴을 동시에 보는 듯한 체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