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창재 감독의 <노무현입니다>는 보이지 않는 위협 속에서 온갖 불이익을 감수하며 이야기를 기획하고 제작비를 충당하고 자료를 수집해야 했던 제작진의 노고가 일궈낸 결과물이다. 심지어 영화 제목조차 어디 가서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극장에 내걸린 지금, 영화는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의 신기록을 세울 기세로 흥행몰이 중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백두대간에서 이광모 감독과 함께 예술영화 전용관 극장 운영 및 영화 수입과 배급에 힘써왔던 최낙용 부사장은 이 영화를 위해 사비를 털어 제작비를 충당해가며 제작사를 설립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이창재 감독을 도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어렵고 고된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게 했던 것일까. 혹은 제작 과정에서 우리가 미처 몰랐던 숨은 어려움은 없었던 것일까. 이번 영화의 고된 제작기와 더불어 극장 운영과 수입·배급을 두루 경험한 그에게서 예술영화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상황에 대한 고민도 들을 수 있었다.
-개봉 일주일 만에 80만 관객을 돌파했다. 다큐멘터리로는 이례적인 흥행이다.
=관객 성향을 조사해보니 혼자 보는 관객이 많다. 조조와 심야시간대의 관객수도 의외로 많다. 첫날 첫회 상영이 거의 매진된 걸로 보아 많은 이들이 극장에서 보길 기다렸던 모양이다. 혼자 극장을 찾는 관객은 조용히 각자의 추억을 되짚어보고 싶어서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이창재 감독이 원래 안 그러는 사람인데 개봉 전 시사회 관객과의 대화(GV) 때 “대통령이 해적에게 질 순 없지 않습니까?”라는 농담도 했다. (웃음)(<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가 하루 먼저 개봉했다.-편집자)
-나 홀로 관객이 많다는 점이 흥미롭다. 정치인으로서의 행보보다 인간적인 면을 부각했던 작품 방향이 마음을 울린 덕분일까.
=이창재 감독이 앞선 인터뷰에서 밝혔듯 특히 마지막 장면이 정말 뭉클하지 않나. 나 역시 그 장면을 처음 자료 화면으로 보자마자 숨이 막혔다. 2000년, 새천년민주당 부산 북강서을 후보로 출마했을 때의 모습이다. 이번 영화를 위해 미리 찍어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구성 단계 때부터 엔딩으로 논의됐던 맞춤 장면이다. 뿐만 아니라 지금의 영화 제목에 확신을 갖게 해준 장면이기도 했다. 관객에게 그런 의도가 잘 전달됐다고 생각한다.
-개봉 전 어느 정도의 관객수를 기대했었나.
=투자자에게 해를 끼치지 말자는 정도였다. (웃음) 그게 손익분기점인 20만 관객 정도였다. 이 영화에 투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이익을 받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꼭 극장 수익이 아니더라도 부가판권까지 챙겨서 수익을 만들어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극장 개봉마저 불투명한 상황에서 지역이나 공동체 상영을 해서라도 수익을 맞춰주고 싶었다.
-이창재 감독에 따르면 투자 과정에서 최낙용 PD의 힘이 굉장히 컸다고 한다.
=모두의 예상을 깨고 투자 과정이 너무 순조로웠다.(웃음) 영상 자료의 가격 때문에 못해도 3억원 이상은 필요할 거라 예상했다. 이창재 감독도 준비되는 제작비 규모에 맞춰서 만들어보겠다고 하기에 일단 사비 2500만원을 털어 그 돈으로 시작했다. 그즈음 주변 친구들로부터 도와주겠다는 연락을 받아 제작비를 십시일반 모을 수 있었다.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는 것조차 해당 회사와 개인에 불이익이 갈 수 있는 상황이라 투자자들의 아내 이름을 크레딧에 올렸다. 심지어 전주국제영화제 시네마프로젝트에 선정되는 것조차 영화제에 부담이 갈까봐 조심스러웠다. 김영진 수석 프로그래머가 “괜찮다, 같이 한번 해보자” 하기에 진행됐다. 개인 투자자들에게 지원받으니 아무런 간섭이 없어서 좋더라. (웃음)
-이창재 감독과는 <길 위에서>(2012)의 배급을 백두대간에서 진행하면서 인연을 맺은 이후, <목숨>(2014)에 프로듀서로 참여했다. 오래전부터 이번 영화도 두 사람이 함께하기로 계획했던 것인가.
=이창재 감독과 ‘거짓말’이라는 가제를 붙여 노무현 대통령의 말과 글에 대해 다뤄보자는 이야기를 나눈 적 있다. 노 대통령 이후 정권을 잡은 대통령들이 모두 자기 글과 말에 책임을 안 지는 것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한 이야기였다. 2015년 초, <목숨> 개봉 이후 계획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합류했다.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백두대간 차원에서 참여할 수는 없었지만 내게는 노 전 대통령 이야기를 한다는 그 의미 자체가 가장 컸다. <목숨>을 함께 작업하면서 이창재 감독이 나와 잘 맞는 사람이란 믿음이 생긴 이유도 있다.
-이번 영화 작업을 위해 제작사 ‘영화사 풀’을 새로 꾸렸다. 회사명을 ‘풀’이라고 지은 이유도 궁금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성정 같은 걸 상징하는 건가 싶었다.
=내가 워낙 김수용 시인의 <풀>을 좋아하기도 하고. 실은 풀을 영어로 명함에는 ‘FULL’이라고 적었는데 발음대로라면 바보라는 뜻의 ‘FOOL’로도 읽을 수 있다. ‘영화사 바보’라고 이름을 지으면 너무 노골적이지 않나. 다들 알 것 같아서. (웃음) 나 나름대로는 바보의 정신을 기리는 뜻에서 지은 이름이다.
-제작자로서 이창재 감독과 의견을 달리했다거나 완성된 영화에 아쉬운 부분은 없었나.
=후반 CG 작업에 더 시간을 들이고 싶었다. 장영규 감독의 음악도 신의 한수였다고 생각하는데 지금 버전 외에 <임을 위한 행진곡>을 서정적이면서 가라앉은 목소리 톤으로 불러 삽입했다면 어땠을까, 그런 상상도 해보곤 했다. 물론 완성된 영화는 감독과 치열하게 논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이 영화 전체의 방향이 인간 노무현에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에 혹시나 다른 연출자가 정치인 노무현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든가, 봉하마을에서의 일들을 다뤄본다면 적극 추천해주고 싶다. 우리가 못했던 일들이다.
-<길 위에서>로 연을 맺은 이후 이창재 감독과 오랜 시간 함께해왔는데 옆에서 보기에 그는 어떤 사람인가.
=인간으로서는 구도자 같은 사람이다. 틈만 나면 명상을 한다든가 수련을 하면서 근본적인 영성을 찾으려고 하는 성향이 강한 사람이다. 연출자로서는 대단히 감각이 뛰어나다. 예술가로서의 기질이 강한 개성을 갖고 있다. 그런 두 존재가 내면에서 부딪치기도 하고 강하게 표출되기도 하는 사람이다. 이번에 새로 확인한 것은 그가 극영화 연출도 잘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다큐는 상황 통제가 어려운데 <노무현입니다>처럼 데이터를 가지고 마음껏 구성하니까 정말 목표했던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을 보면서 극영화가 더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영화를 제작하면서 제작 전과 후에 인간 노무현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나 달리 생각하게 된 점이 있나.
=그보다 오히려 젊었을 때, 20대 시절의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어주었다. 그때 내가 좀더 세상을 넓게 봤다면, 옳다고 믿었던 것들을 지켜냈다면 세상이 달라졌을까, 노 전 대통령은 어떤 순간에도 자신과 주변인에게 정직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면서 자기 삶을 고양해나갔던 모습이 지금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백두대간에 몸담기 이전에는 어떻게 영화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도 궁금하다.
=20대 때 연극판에 있었다. 마당극이나 노동연극을 하면서 현장에서 사회운동하는 사람들과 교류했고, 우리끼리 16mm 단편영화 워크숍 모임을 가졌었다. 당시 그 모임에 나왔던 정윤철 감독이 오랜 친구다. 공교롭게도 그가 연출한 <대립군>으로 개봉 시기에 만나게 됐는데 농담처럼 우리가 이렇게 만날 사이는 아니지 않느냐는 인사를 주고받기도 했다. (웃음) 아무튼 그 당시에 내가 영화 현장 일을 할 수 있게 도와준 분이 이용관 선생님이다. 그러면서 김성수 감독의 <런어웨이>(1995) 연출부로 현장 일을 시작했다. 당시 감독님이 시드니 폴락 감독의 <코드 네임 콘돌>(1975)을 보고 리포트를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셨던 기억도 있다. (웃음) 그리고 그즈음 또 한명의 스승인 이광모 감독을 만나면서 백두대간에서 일하게 됐다.
-2년 전, 백두대간 21주년 기념 영화제 당시 가졌던 인터뷰에서 백두대간의 한국영화 제작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바 있다. 이후 진행 상황은 어떻게 되는지도 궁금하다.
=콘텐츠진흥원 시나리오 대상을 받은 작품으로, 추사 김정희에 대한 영화를 준비 중이다. 예술가 추사가 아니라 사회개혁가, 혁명가로서의 추사에 주목하는 이야기가 될 것 같다. 19세기 중반에는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웬만한 책들은 다 접할 수 있었는데 책벌레인 추사가 마르크스와 같은 사상 서적을 읽었을 거라는 상상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김씨 왕국이 무너지던 당시 조선 땅에서 추사는 뭔가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지 않았을까. 그리고 2006년부터 꽤 오랫동안 준비해온 시나리오가 하나 있는데 80년대부터 현대사를 관통해오는 남자의 이야기다. 책으로도 출간하려고 함께 기획 중이다.
-백두대간이 운영과 기획을 함께하는 아랍영화제도 올해로 6회를 맞이했다. 운영 면에서 지난 성과와 앞으로의 과제를 짚어본다면 어떤 점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한국 아랍소사이어티에서 처음 제안이 왔을 때만 해도 이렇게 잘될 줄 예상치 못했다. 당시에 아랍영화를 보고 그 수준에 깜짝 놀란 기억이 생생하다. 재미도 있고 의미도 있는 영화들을 일회성으로 보여주는 게 아쉬워 우리가 오히려 아랍소사이어티쪽에 사무국을 꾸리고 정례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영화를 수입하는 나도 모르는데 관객은 더 모를 거라는 생각에 서둘러 진행했는데 선뜻 취지를 이해해줬다. 아랍과 이슬람 문화에 대한 오해들도 풀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 싶었다. 관객 반응이 굉장히 좋은 영화제다. 지난해에는 영화제 관객 점유율이 80%를 넘었다. 그 수치는 대부분 매진인데 아침 조조시간에 앞줄 정도가 비어 있다는 뜻이다. 장기적으로는 아랍영화 인력과의 교류도 가질 수 있으면 좋겠다. 10년 단위 계획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예술영화 전용관의 흥망성쇠를 몸소 겪으며 운영해온 입장에서 아트버스터라는 신조어가 생겨나는 등 변화하는 관객 취향에 예민할 것이다. 최근 극장을 변화시키는 관객 트렌드의 어떤 점에 주목하고 있나.
=예술영화 배급을 한 지 20년 정도 됐다. 요새 가장 크게 관심을 두는 것은 예술영화 및 독립영화 상영과 교육이 함께 결합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몇몇 극장을 상대로 단순히 영화를 소비하는 측면에서 예술영화의 인식 확대는 쉽지 않다. 영화 자체가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는데 그 진입장벽을 교육으로 상쇄할 수 있을 것 같다. 사회 전체의 문화를 성숙시킨다는 측면에서 상영과 교육의 통합이 이뤄지면 좋겠다. 또한 과거에 비해 관객층이 40, 50대 장년층까지 확장됐다. 양적 확대와 질적 확대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 또 예술영화에 대한 소비, 관람 패턴이 점점 연성화되는 것 같다. 감동하기 쉽고 약간 고급스러운 영화에 몰리는 형태다. 사실 영화라는 게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 수도 있고 미학적으로 새로울 수도 있고 정치적으로 어려울 수도 있다. 이들을 다양하게 소비하던 시기가 있었다. 때문에 이제는 수입·배급에 관한 제도적 장치도 필요해 보인다. 좋은 예술영화는 1년에 몇편 정도 수입 지원을 해서라도 극장에서 볼 수 있게 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가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간다.
-극장 운영 및 수입과 배급, 제작에 이르기까지 두루 경험해본 영화인 최낙용의 다음 행보는 무엇이 될까.
=영화계에 연출부로 입문했기 때문에 언제나 연출에 대한 꿈을 갖고 있다. <노무현입니다>는 불이익이 생길 거라는 걱정보다는 ‘이런 프로젝트를 내가 할 수 있다’라는 기대감에서 시작했다. 매력적인 일을 할 수 있다는 두근거림이 있었다. 연출이든 제작이든 이처럼 의미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고 싶다는 정도로 열어두고 싶다. 물론,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건 백두대간에서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