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노 맨스 랜드
2017-06-14
글 : 김혜리
<더 서클>

<더 서클>은 이른바 ‘투명사회’를 직격 비판하려는 야심 큰 영화다. 극중 공룡IT기업 ‘더 서클’은 페이스북과 유사한 ‘트루유’ 애플리케이션을 근간으로, 만인이 자발적으로 사생활을 공유함으로써 완벽히 개방되고 연결된 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는 유토피아니즘을 성공적으로 판다. CEO 에이몬(톰 행크스)이 뽑아낸 슬로건 “비밀은 거짓말이다”가 특히 의미심장하다. “남이 보지 않을 때 인간은 악하고 약한 면을 드러내게 되므로 완전한 사생활 공유야말로 진보”라는 논리에, 젊은 엘리트 사원들이 갈채로 동조하는 광경은 모골이 송연하다. 이해 못할 바도 아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 기업에 입사해 세상을 바꾸고 있다는 쾌감, 여가와 노동이 하나된 쿨한 기업 문화에 도취돼 있다. 흥미로운 설정을 충분히 전개하지 못한 각본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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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말 어느 날 유학 중 영국 하원의 토론을 중계하는 텔레비전을 무심코 틀어놓고 과제를 하던 나는, 불현듯 내 눈앞의 그림이 뭔가 잘못돼 있다는 느낌에 사로잡혔다. 인구의 반이 생물학적 여성인데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의 압도적 다수가 남성인 광경에 대해- 놀랍게도- 처음으로 기괴하다고 체감한 것이다. 어이없게도 공적 영역의 성비가 훨씬 기울어진 한국에서 살아온 27년간은 당연시한 나머지 무감했던 그림이었다. 머리로는 불평등을 인지했지만, 사고를 작동하기 전에 눈이 먼저 소스라친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이다

묵은 기억까지 뒤진 건 <원더우먼>의 어떤 장면들 때문이다. 영화의 장단점을 세세히 따지기 전에 <원더우먼>은 우리가 결여하고 있었으나 결여했다는 사실마저 잊고 있던 이미지를 커다란 스크린에 펼치는 것만으로 심박수를 펌프질한다. 주요 액션 시퀀스 중 아마조네스들의 섬 데미스키라의 군사 훈련 및 전투, 그리고 영화 중반 적에게 점령된 벨기에 마을에 다이애나(갤 가돗)가 포화 속을 뚫고 진입해 수복하는 과정이 그랬다. 먼저 관객은 프레임이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 인물로만 채워져 있는 광경이 반대 성(性)의 경우와 달리 얼마나 생소한지, 그리고 그들이 목적을 갖고 움직여 공간을 장악하는 모습이 얼마나 장쾌한 감동을 주는지 데미스키라 배경의 1막에서 깨닫게 된다.

말과 무기와 어우러진 그들의 애크러배틱은 여성 전사라는 핑계 아래 제공되곤 하는 남성 관객용 눈요기가 아니다. 패티 젠킨스 감독은 액션의 주체인 아마조네스들의 호흡과 쾌감을 앞세운다. 예컨대 코스튬이 액션 동작에 따라 어떻게 몸을 노출시킬 것인가는 <원더우먼>의 안중에 없다. 활과 창검의 고전적 무기, 강한 콘트라스트, 동작의 속도를 늦췄다 높였다 하는 비주얼은 DC 확장 유니버스에 계속 관여하는 잭 스나이더의 <300> 액션과 스타일을 같이하지만 상당한 차이가 보인다. 아마조네스들의 무장은, 적보다 자연에 먼저 다칠 것처럼 헐벗은 스파르탄의 그것과 달리 실용적이다. 패티 젠킨스 감독이 밝히는 액션 연출의 레퍼런스는 전란을 묘사한 르네상스기의 역사화들이다(아마존족의 탄생 기원을 올림포스 신들의 전쟁을 통해 밝히는 설명 플래시백 시퀀스도 같은 양식으로 연출됐다). 한편 <300>이나 아류 영화들과 달리 <원더우먼>에는 사지가 절단되고 두개골이 꿰뚫리는 고어 표현도 없다. 물론 등급의 영향이 절대적이다. 그러나 다이애나를 포함한 아마존 전사들의 액션에서 중요한 테크닉은, 먼저 공격하고 때려눕히기보다 상대방의 힘의 반동을 이용하고 정확하게 에너지를 집중시키는 능력이다. “싸움이 공정할 거라는 생각을 버려!” 이모인 안티오페 장군(로빈 라이트)이 방심한 다이애나의 허를 찌르고 경고할 때, 어떤 여성 관객은 이 대사의 중의적 교훈을 새기며 “예, 언니!”라고 속으로 복창할지도 모른다.

영화 중반 마침내 1차대전 벨기에 전장으로 진출한 다이애나가 마을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모두의 만류를 뿌리치고 ‘무인지대’(No Man’s Land)를 가로지르는 순간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팔찌는 공격을 튕겨내고 정확하게 받아쳐서 길을 연다. 이 대목의 감흥은 일렉트로닉 첼로를 앞세운 한스 짐머/루퍼트 그레그슨 윌리엄스의 스코어에도 적잖이 빚지고 있다. 다분히 관습적일지언정 <원더우먼>은 <슈퍼맨>에 비할 만한 진한 인장의 팡파르를 확보했다.

<BBC>와 인터뷰에서 원더우먼의 액션 디자인에 관해 패티 젠킨스는 “최소한 원더우먼은 상대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는 유형의 히어로는 아니라는 정도의 가이드라인은 확실했다”라고 밝혔다. 혈혈단신 포화 속을 질주하는 해당 장면의 원더우먼은 확실히 ‘국제경찰’로서 간섭주의를 고수하는 미국의 엠블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적어도 새 영화의 코스튬은 더이상 성조기로 만든 속옷처럼 보이지 않는다(거꾸로 다이애나는 런던 백화점에서 코르셋을 무장으로 착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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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영화의 1편이자 기원담으로서 여타 수퍼히어로들과 차별되는 원더우먼의 성격을 정립하는 데에도 패티 젠킨스는 성공적이다. 데미스키라에 불시착한 미군 첩보장교 스티브 트레버(크리스 파인)와 함께 전쟁의 신 아레스를 막고자 1918년 런던에 당도한 다이애나는 물 밖에 나온 인어 같은 처지다. 이웃 마블 유니버스 중 물정 모르는 왕자가 나오는 <토르>와 1차대전 시대극인 <캡틴 아메리카: 퍼스트 어벤져>도 동시에 연상시키는 2막이다. 다이애나의 선악 개념은 회색지대가 없고 전쟁에 관한 이해는 나이브하다. 어찌 보면 철없는 여성을 합리적인 남성이 지도하는 구도 같기도 하다. 그러나 영화는 진실과 정의에 관한 다이애나의 천진한 믿음이 뜻밖의 돌파구를 뚫고 경험 많은 남자들을 설복하는 이야기로 발전한다. 리처드 도너 감독의 <슈퍼맨>(1978)을 참조했다는 젠킨스 감독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 나이브함은 그 자체로 원더우먼이라는 슈퍼히어로의 태생적 차별성이다. 프롤로그가 예고하듯 다이애나는 변하겠지만 그녀의 뿌리에는 순진한 인류애가 있다. 보다 주목할 점은 DC 트리오의 남성 멤버 슈퍼맨과 배트맨에게 언제나 중요한 동기로 작용하는 자아 집착과 메시아 콤플렉스, 폭력으로 번민을 해소하는 성향을 원더우먼에겐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이애나는 적어도 곤경에 처한 눈앞의 약자의 고통에 당장 감정을 이입하고 돕고자 하는 자연스런 메커니즘으로 움직인다. 인간의 도시에 도착한 순간부터 우리는 다이애나가 끊임없이 눈에 띄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고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동하는 감정을 표출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그녀는 아이스크림 맛에 찬탄하고, 섬에선 볼 수 없던 아기에게 달려간다(모성애 탓이 아니다). 여성 참정권 운동이 한창인 런던이 배경임에도 <원더우먼>은 다이애나에게 한번도 페미니즘을 주제로 한 독백이나 연설을 시키지 않는다.

제작진의 타협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 다이애나에게는 성차별의 개념 자체가 낯설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녀가 금녀 구역인 정치 회합에 끼어들고 다국어 능력을 발휘하고 남자들을 물리적으로 제압할 때 객석의 웃음거리가 되는 건 분위기 파악 못한 괴짜 여자가 아니라 개명 못한 당대 남자들이다. 영웅의 로맨스 상대이자 제2주인공으로서 결코 다이애나의 스포트라이트를 가로채지 않는 크리스 파인의 스티브는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맥스(톰 하디)와 같은 클럽에 속하는 적절한 조력자다. 여성이 비범한 능력을 발휘할 때 “남자인 나보다 낫네?”라는 리액션을 굳이 농담조로 던져 물을 타거나 웃어넘기지 않는 점이 훌륭하다. 심지어 다이애나의 장기를 눈여겨보았다가 전투 중 결정적 디딤돌이 되어주기도 한다. 극중에서 스티브는 당신이 인간 남자의 평균이냐는 다이애나의 질문에 “나는 평균 이상이다”라고 말하는데, 나 역시 큰 이의는 없다. (다음에 계속)

<8인의 수상한 신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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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까지!

기타노 다케시의 <8인의 수상한 신사들>에서 왕년의 야쿠자 류조(후지 다쓰야)는 보이스 피싱 사기에 걸려들 뻔한 사건을 계기로 어찌어찌 7명의 옛 동료를 모아 조직을 재결성한다. 하지만 야쿠자 올드보이들의 몸 상태는 운신하는 게 고작이고 도덕적으로도 그들이 응징하려는 본데없는 양아치들보다 우월할 게 없다. 그들은 관록의 슈퍼파워를 발휘하는 어벤저스도, 강호의 도를 세우는 8인의 사무라이도 되지 못한다. 다행스럽게도 기타노 다케시는 구식 야쿠자의 가치관에 향수를 보이는 대신, 이 영화를 더이상 원하는 만큼 쿨하거나 위협적일 수 없는 노년에 관한 철저한 농담으로 만들었다. “그래도 설마” 하며 반추의 시간을 기다렸던 관객을 감독은 가차없는 엔딩으로 일축한다. 적어도 그는 아직 그만큼은 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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