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오른 <악녀>(2017)팀에서 단연 시선을 사로잡은 이는 배우 김서형이었다. 운동으로 다진 탄탄한 복근을 거침없이 드러낸 상의하며 옆 머리칼을 시원하게 쳐올린 쇼트커트 스타일까지. 레드카펫이면 어떤가. 아니 레드카펫이라 더욱더 입고 싶은 대로 입고 멋지게 걸어나가겠다는 투다. 여성배우들의 레드카펫 의상이라고하면 곧바로 떠오르는 드레스들, 그 전형에서 저 멀리 벗어난 선택이었다. 이러한 다른 시도가 ‘할리우드 스타들’에게만 익숙한 그림이고, ‘할리우드’라는 이유로 용인의 문턱이 낮았던 게 사실이다. 어째서 한국 여성배우들에게선 흔한 일이 되지 않아왔던가 반문해보게 되는 게 현실인 만큼. ‘보이시’, ‘메니시’라는 수식도 뻔하다. 그저 배우 김서형이 궁금해 만남을 청했다. <악녀>에서 김서형은 숙희(김옥빈)를 국정원 요원으로 키워 작전에 투입하는 상사 권숙 역을 맡았다. 역할의 비중이나 극중 활용도로 보자면 아쉬운 캐릭터다. 김서형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김서형은 여성배우들에게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장르물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점을 기분 좋은 출발로 삼았다. 드라마 <아내의 유혹>의 신애리로 소위 ‘악녀’라 불리는 표독스러운 옷을 걸쳐보기도 했고 능력 있고 차가운 전문직 직장 여성 역도 척척 소화해왔다. 드라마 <어셈블리>의 당 대변인 겸 초선의원 홍찬미, <굿 와이프>의 로펌 대표 겸 변호사 서명희 모두 사사로운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제 영역의 일을 해내는, 그러면서도 상대방에게 선을 넘지 않는 존재감을 드러낼 줄 아는 인물들이었다. 그런 김서형이 영화 작업의 이력이 많지 않은건 또 한번의 아쉬움이다. 스튜디오에 들어선 김서형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2002) 때 찍은 자신의 사진을 발견하고는 한참 들여다본다.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2003) 이후 참으로 오랜만에 <씨네21>과 만났다.
-칸국제영화제 의상으로 많은 주목을 받은 얘기부터 해보자.
=한국의 지인들에게서 문자를 굉장히 많이 받았다. 화제성을 의도한 건 아니었고 그저 그 옷이 마음에 들어 입었다. 헤어스타일은 작품이 끝날 때면 마음이 어수선해져서 바꾸곤 하는데 그때가 딱 그럴 때였다. 원래는 삭발을 하려 했다. 배우들은 역할에 따라 헤어스타일을 바꿔야 하니까 늘 일정 정도 길이를 유지한다. 나는 커트냐 단발이냐에 상관없이 대체로 세련되고 강인해 보이는 도시 여성 역할이 들어오더라. 그럴바에야 좀더 확실하게 머리칼을 잘라도 되겠더라. 어차피 비슷한 역할을 할 거면 머리를 더 길러둘 이유가 뭔가. 제대로 잘라서 보여주면 날 더 찾지 않겠나 싶었다. 그런데 헤어숍에 갔더니 삭발은 안 된다며 말렸다. 괜히 이상한 기사만 뜰 거라고. (웃음) 평소에도 운동을 좋아해서 다년간 필라테스를 꾸준히 해왔다. 그래도 복근 만들기는 쉽지 않았다. 칸에도 필라테스용 롤러를 챙겨가 아침저녁으로 운동하고 조깅하고. 영화제를 떠나서 축제를 즐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악녀>의 시나리오를 받고 처음에는 ‘왜 나를?’이라며 의아해했다고 들었다.
=감독님을 처음 만나 뵌 날 솔직히 말씀드렸다. “왜 제게 시나리오를 주세요?”라고. 여성배우가 출연하는 영화가 왜 이렇게 없느냐는 말을 많이 하지 않나. 활약한다고 하는 여성배우들도 가뭄에 콩 나듯 일을 하는 형편인데 나한테 차례가 올까 싶었다. 내가 영화 출연 편수도 많지 않은 데다 일하면서 물먹은 경험도 많고. 그런 걸 생각해보면 나한테 어울리는 역할이라고 해도 상업적으로 영화가 더 잘되려면 내가 하는게 맞나 싶더라. <악녀>가 예산이 꽤 되는 상업영화이지 않나. 작품을 위해서라도 인지도가 더 큰 배우를 써야 하는 게 아닌가 했다. 물론 권숙 캐릭터, 영화에 대한 설명을 들을수록 하고 싶었다. 늘 목말랐던 액션물에 누아르적인 면모까지 있는 작품이었으니까.
-분량 면에서도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권숙이 국정원의 실장급 인물이다보니 영화에서 지시, 명령하는 일만 할 뿐 액션 장면을 전혀 볼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웠다.
=감독님께 한번이라도 액션의 합을 넣어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여건상 그렇게 되지 않았다. 추운 겨울 촬영에 나만 쉽게 숟가락을 올린 것 같다. 다음 영화에서 액션의 한을 풀어야지 어쩌겠나. 액션, 정말 탐나는데! (웃음) 액션영화 제안? 아직은… 없다. (웃음) 정병길 감독님 덕에 장르영화의 물꼬를 터 상당히 감사하다. 적어도 영화로만 보자면, 다들 나를 벗는 영화(<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에 나온 배우로만 기억하잖나.
-권숙은 어린 시절부터 킬러로 키워진 사연 많은 숙희를 국가 비밀 조직에 스카우트하는 예리한 구석이 있고, 숙희에게 냉정하게 굴면서도 언젠가는 이런 생활을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며 담금질한다.
=어쩌면 권숙은 숙희의 미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권숙은 캐릭터의 앞뒤 설명이 전혀 없다. 그렇다보니 내가 파고들어야 할 건 숙희였다. 권숙은 숙희를 살인병기처럼 키워야 했다. 숙희와 같은 길을 이미 걸어봤을 법한 사람이기도 해 어떤 면에서는 여유 있어 보였다. 또 권숙은 숙희를 인간적으로 보이게 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권숙은 임무 완수를 위해 상사로서 숙희를 대하기도 하지만 아린 마음으로 숙희를 보기도 한다. 감독님께도 계속해서 숙희에 대해 물었다. 엉뚱한 곳에서 캐릭터에 대한 단서를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힘들어진다.
-권숙이 숙희의 총구를 자신의 가슴팍으로 끌어오며 숙희에게 마음 아픈 말을 할 때 눈물 흘리는 순간 같은 게 권숙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장면이었다.
=인간적인 권숙의 개인사가 짧게 스쳐지나가긴 하지만 결국 숙희에게 권숙이 상사로만 남은 게 아닐까 싶어 사실 많이 답답했다.
-<악녀>에서 권숙이 가장 많은 영향을 주고받는 인물이 숙희다. 배우 김옥빈과의 호흡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옥빈씨도 여성배우와 맞붙은 게 <여배우들>(2009)빼고는 없었던 걸로 안다. 감독님과 옥빈씨와 회의를 많이 했다. 그럴 때마다 숙희의 감정, 숙희의 이야기를 많이 들으려 했다. 그러면서도 옥빈씨에게 ‘지금 내가 당장 답을 줄 수는 없다’는 얘길 하기도 했다. 나는 현장 상황에 따라, 상대의 호흡에 따라 연기의 톤이 확확 바뀌는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 걸 만들어가는게 컸다.
-그런 면은 다년간의 연기 경험에서 나온 것도 있겠으나 어느 정도는 본능적으로 타고난 기질의 영향이라고 해도 될까.
=운명적으로 타고난 기질인 것 같다. <봄>(2014)의 조근현 감독님도 “서형씨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배우 같다”고 하시더라. 그런 면에서 나는 연기를 평생 할 수 있을 것 같다. 20대는 방황의 시절이었고 30대에는 40대에도 내가 살아남기 위해선 열심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달렸다. 기존에 해온 작품들로부터 탈피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하고 싶은 연기에 대한 목마름으로 여기까지 온 것 같다. 40대인 지금이 정말 좋고, 앞으로의 내가 더 기대된다.
-악녀 아니면 도도한 전문직 여성이라는 한정된 역할, 고정된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다. 앞서 말한, 머리를 짧게 자른 이유에도 제한된 역할의 반복에 대한 답답함이 묻어났던 것 같은데.
=‘여배우’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그럼 남배우라는 말도 써야지. 반감을 갖고 싶진 않지만 뭘 하나 해서 잘한다고 하면 어떤 타이틀이 생기더라. 예컨대 ‘악역 전문 배우’. 잘해냈기에 붙는 타이틀이니 물론 좋다. 하지만 뭔가를 잘했다고 하면 그걸 배우의 가능성으로 봐줘야 하는데 그 말로 오히려 배우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리려 한다. 내가 악역을 전문으로 하려고 배우를 한 것도 아니고, 악역 전문이라는 게 누구의 전유물이 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영화든 드라마든 빨리빨리 만들어내고 빨리 수익을 내야 하다보니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서라도 재생산을 빠르게 하려고 하는 게 문제다. <악녀>의 경우도 그간 ‘여자’ 액션물이 워낙 없었기에 ‘여배우 액션’이라는 말로 홍보를 하고는 있지만 사실 배우라면 다 할 수 있는 것을 여기 나온 배우들이 한 것뿐이다. 이런 걸 보면 영화를 만드는 창작자들이 너무 한정적으로 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관객은 오히려 더 열려 있다. 내가 악역을 했다고 악역 전문 배우라고 말하기보다는 ‘뭘 해도 잘하겠구나’라고 얘기해주는 분들이 더 많았다. 영화 창작자나 영화계 관계자들이 스스로를 더 가둬두는게 아닐까. 정병길 감독이나 이런 시도의 영화에 투자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드리고 싶다. 물론 앞으로 감독님들이 나를 더 많이 활용해줬으면 좋겠고.
-악녀, 나쁜 여자를 지나 능력 있는 직업 여성을 연기할때조차 권위와 기품을 잃지 않는 캐릭터를 그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악역을 맡았다고 해도 기본적으로는 선이 있기 때문에 악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전제에서 인물을 이해하려고 한다. 캔디는 주변에 도와줄 사람이 많지만 악인은 아무도 없어 정작 외롭지 않겠나. 그래서 상대 선인의 캐릭터를 더 많이 본다. 악한 사람에게서도 인간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하고. 실제 내가 민폐 끼치며 살지 말자, 인간적인 초심은 잃지 말자는 생각을 많이하며 산다. 결국 문제가 벌어지면 내 탓을 하는데 그래서인지 자존감이 낮다. 겸손과는 다르다. 겸손에는 관심도 없고. 그런 내 모습이 아마도 캐릭터를 분석할때도 영향을 주지 않나 싶다. 일할 때는 자존심과 자존감이 높은 편이나 일을 쉴 때는 최대한 백지 상태로 만든다. 그래서일까. 일이 들어오면 반작용으로 자존감이 확 높아져 몰두한다.
-중저음의 목소리에 발성과 발음이 좋다. 이런 특성이 역할의 분위기를 만드는 데 상당히 일조하는 것 같다.
=학창 시절부터 나는 당연히 배우를 할 거라고 생각했다. 특별활동도 방송반 활동을 했고 집에서 혼자 소리내 책을 읽고 녹음도 했다. 목소리 좋다는 얘길 몇 차례 들으면서 ‘그런가?’ 싶었다. 연기 경험 속에서 목소리를 활용하는 방법을 조금은 알게 된 것 같다. 캐릭터를 만날 때마다 목소리를 만들어내고 연습한다. 이미 주어진 걸로만 하려고 하면 연기하는 나도 재미가 없으니까. 목청이 좋은 건 집안 내력이다.
-고향인 강릉에서 보낸 유년기는 어땠을까 궁금하다.
=딴생각을 많이 하던 학생이었다. 문학반 활동을 하면서 시를 썼다. 통학버스를 두고 코스모스길을 걸으며 이문세의 노래를 듣는 걸 즐겼다. 그때 그런 게 배우로서의 내 감성을 만드는 데 정말 중요했다. 지금은? 가면 답답하지. (웃음) 이제는 좀 멀리 보고 싶다. 서울도 좁은가?
-올해 <씨네21>이 창간 22주년 기념으로 진행한 한국영화 최고의 여성 캐릭터(1100호) 특집에서 봉만대 감독은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의 자유로운 사랑을 꿈꾸던 신아를 가장 먼저 꼽았다.
=방황의 20대를 뒤로하고 31살 때 그 작품을 만났다. ‘이런 게 연기구나’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러니 내가 ‘연기를 알게 됐다’고 할 수 있는 게 얼마 되지 않은 거다. 그때 그 작품이 나에겐 30대의 10년간 연기에 대한 열정을 갖게 해준 시작의 작품이다. 그때의 상처나 경험들이 다져져서 지금은 밴드 하나 정도는 붙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지금도 가장 어려운 게 연기라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다음 작품으로 얘기되고 있는 게 있나. 혹은 탐나는 작품이 있나.
=작품에 들어가면 다른 건 신경을 못 쓰는 편이다. 이제 <악녀>를 마쳤으니 기다려봐야지. 물꼬를 텄다고 해도 크게 기대하지는 않는다. 평생 연기하기 위한 하나의 물꼬를 튼 것뿐이니까. 지금까지도 작품이 쏟아져들어온 배우도 아니었고. 드라마 <자이언트>(2010), <샐러리맨 초한지>(2012), <기황후>(2013)처럼 뭔가 다른 연기를 할 수 있는 작품을 찾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나 스스로 내 작품의 방향을 정해온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또 다른 기회가 온다면 정말, 땡큐다!
-돌아오는 주말에 <SNL코리아> 시즌9 생방송에도 출연한다고 들었다.
=떨리고 무서워 죽겠다. 그래도 내 이름을 걸고 하는건데 허투루 할 수야 없지. 또 한번 화제를 낳아야 하지 않겠나. 복근만큼! (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