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동아수출공사에서 독립한 동아엔터테인먼트 대표 이호성
2002-04-10
“한방 아닌 잽으로 승부하겠다”

명가(名家)라고 예외는 없었다. 지금으로부터 4년 전. 갑작스레 몰아닥친 시련 앞에 25년 동안 쌓아올린 명성은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동아수출공사. 1973년부터 83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해온 전통의 명가였지만, 삼성영상사업단을 비롯한 대기업들마저 뒷걸음치게 한 국제통화기금(IMF)이라는 한파와 계속되는 흥행실패의 부담을 견뎌내진 못했다. 30억원이 넘는 제작비를 들였으나 서울 관객 5천명도 끌어들이지 못한 채 1주일 만에 종영한 <러브>를 끝으로 한국영화 제작 일선에서 물러나야 했던 것. 당시 아버지인 이우석 동아수출공사 회장과 함께 자금난을 수습하느라 뛰어다녔던 이호성(39) 대표에게 98년은 ‘악몽의 연속’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1월21일 동아수출공사에서 떨어져나와 새로 둥지를 튼 동아엔터테인먼트는 이호성 대표에게 각별하다. 한국영화 제작에 다시 뛰어들겠다는 일종의 ‘재기’ 선언이기 때문. 지난 2월 청담동에 새 사무실을 차리고 난 뒤 얼마 전부터 시나리오 개발 등 본격적인 업무에 들어간 그를 만나 각오를 들었다.

분사한 지 한달이 됐다.

사무실 새로 내고 나서 한동안 어수선했는데, 이제 좀 정리가 됐다. 진짜 내 맘에 드는 것 하고 싶어 나오긴 했는데, 내가 판단하고 내가 책임져야 하니까 부담도 없지 않다. 남에게 맡겨놓으면 결과가 안 좋을 경우 핑계라도 댈 수 있는데. (웃음)

동아수출공사에서 떨어져나온 계기는.

동아수출공사 하면 역사도 좀 있고 하니까 아무래도 신생 영화사보다 일하기가 편한 것은 사실이다. 근데 한참 쉬다가 다시 한국영화 제작하겠다고 나서려고 보니 신선한 느낌이 없더라. 그래서 이번 기회에 아예 소프트웨어는 젊은 사람들이 주도해서 맡고, 기존의 동아수출공사는 극장 같은 하드웨어를 맡는 식으로 분리했다. 물론 완전히 선을 그은 것은 아니다. 동아수출공사가 지분을 갖고 있으니까. 아버지 후광을 어떻게든 써먹어야 한다는 ‘얍삽한’ 생각은 여전하다.(웃음)

일종의 독립선언인데. 아버지와 한 회사에서 일하는 불편이나 부담도 작용한 것 아닌가.

그런 점도 있긴 하다. 아버지가 틀에 박힌 것을 고집하는 분은 아닌데, 아무래도 사회적인 위치도 있고 그러니까 조금은 리스크 없이 안정적으로 가려고 하신다. 다 경험에서 나온 얘기이다 보니 내 입장에서는 의견이 다르더라도 결국엔 쫓아갈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독립을 택한 거다. 나이 먹어가면서 머리는 굳어지는데, 그 전에 뭐 하나 걸고 해보려고.

이우석 회장이 흔쾌히 수락했나.

처음에는 사실 ‘너, 무슨 소리 하는 거냐’는 반응이었다. 그러다가 주변의 조언들을 수렴하시고선, ‘이눔아, 나가서 한번 고생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허락하신 것 같다.

동아수출공사의 경우 3년 전 <러브>를 마지막으로 제작에선 한동안 손을 뗐는데.

순제작비만 30억원을 썼는데 흥행결과가 안 좋았다. 무엇보다 미국쪽 스탭들을 쓰느라 인건비가 엄청 많이 나온 데다 찍으면서 시행착오로 인해 버젯이 오버됐다. 거기에 <하드레인> 같은 외화도 250만달러 정도 주고 샀는데, 막상 풀 때 보니 달러가치가 2배 이상 뛰어 환차손이 엄청났다. 우여곡절 끝에 80만달러 깎아서 겨우 해결했는데 마음고생이 다들 심했다. 회사 분위기가 그러니 나도 움츠러들었고, 이후 제작 준비중이던 작품들도 다 엎었다.

동아수출공사는 배급이나 극장사업 하는 걸 보면 지나치게 조심스러워 보인다.

아무래도 그때 까먹은 돈이 많으니까. 또 대기업 하고 같이 경쟁할 수 있을 만한 자금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까 두 작품 이야기만 했지만, 사실 그 무렵 내놓았던 <똑바로 살아라> <바이준>까지 잘 된 게 없었다. 만사에 굴곡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여기서 어떻게 더 내려가나 싶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지금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바이준>만 하더라도 스토리가 조금만 탄탄했으면 젊은 관객에게 반응을 얻지 않았을까 싶고.

제작비가 많이 들어가는 시대극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첫 작품치곤 위험부담이 너무 크지 않나.

<조선검>이라는 프로젝트인데, 가장 먼저 들어가는 작품은 아니다. 시나리오 작업 한 지는 꽤 됐고. 아마 그게 4년쯤 됐지. 주주이기도 한 경인미술관의 이석재 관장이 썼는데, 처음 받아봤을 때만 하더라도 제작비가 너무 커서 포기했었다. 그러다 <쉬리>를 기점으로 흥행작이 나오면서 한국영화 제작환경이 좋아졌고 그래서 다시 잡게 된 거다. 주위에서는 <무사> <단적비연수> <싸울아비> 등이 먼저 나오면서 ‘막차 탄 것 아니냐’고 그러는데, 스토리도 다르고 흥행성이 다분하다고 여기고 있다.

설정을 미리 좀 일러준다면.

조선 건국 초기에 정도전이 이성계의 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음모를 꾸민다는 설정이다. 당시에는 왕이 개국공신들에게 검을 하사했는데, 사당을 짓고서 보관할 정도로 귀했다. 그것을 잃어버리면 멸문지화를 당할 정도로. 그래서 정도전이 친일세력을 이용, 한 가신의 어검을 탈취하고, 그 가문에서는 일본까지 건너가서 검을 되찾지만, 결국 전국시대의 혼란한 상황에 휘말리면서 돌아오지 못하고 몰살당한다는 내용이다. 설정이 간단한 것만은 아니라서 4명의 시나리오 작가가 달라붙어 쓰고 있다.

파이낸싱을 염두에 둔 파트너가 있나.

어림잡아 순제작비만 70억원이다. 일본쪽과 합작하는 형태로 갈 것이다. 지금 현재 이 관장이 소설로 먼저 쓰고 있고, 영화사업도 하는 일본의 가도가와 서점쪽에서 출간할 것이다. 그쯤 되면 파이낸싱을 위한 파트너 찾기도 원활하게 진행될 것으로 본다.

일본쪽 영화사들과 좋은 관계를 갖고 있는데.

도호, 도에이, 쇼치쿠 등 일본쪽 라인은 다들 관계가 좋다. 2∼3년 거래한 것도 아니고, 벌써 30년이나 됐으니까. 옛날에는 외국영화 수입이 쿼터로 묶여 있는 상황이어서 할리우드영화만 하더라도 우리가 직접 거래하는 게 아니라 일본쪽에서 한국 판권까지 샀고 그걸 다시 한국에 되팔았으니 자주 왕래했다. 그때부터 이후 일본영화를 수입하는 지금까지 쭉 쌓인 거다.

공동투자를 끌어낼 만한 신뢰의 수준인가.

<건드레스>처럼 이미 합작을 경험했고. 일단 상황이 유리하게끔 되어 있다. 일단 아시아권에서 자국영화가 재미보는 곳은 한국하고 타이, 두 나라뿐이다. 반대로 일본이나 홍콩의 경우, 상황은 반대이다 보니 합작을 하는 것이 그들 입장에서 제작비도 줄일 수 있고, 한류 등을 이용해서 자국 내에서의 집중도도 높일 수 있고, 해외시장도 넓힐 수 있다. 3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 앞으론 중국이 끼어들 거다. 우리가 보기에도 엄청난 시장 아닌가. <비천무>만 하더라도 DVD가 50만장 팔렸다고 하는데, 그곳 가격이 장당 1달러라고 하지만 무려 50만달러이다.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만큼 수입제한조치도 곧 풀어질 것이고. JC그룹이나 골든하베스트 등과의 관계를 다지는 것도 중국을 향한 확실한 루트를 확보하려는 목적에서다.

<조선검> 이외에 개발중인 작품이 있다면.

<쾌락천사>(가제)라는 코미디영화가 있다. 4명으로 구성된 무명 록그룹이 판을 내주겠다는 이의 말에 속아 사채를 빌려쓰게 되고, 결국 사기를 당해 그를 잡으러 중국을 유랑하게 되는 영화다. 이 작품과 다른 프로덕션과 합작 논의를 거치고 있는 작품, 이렇게 두 작품 중 1편을 골라 올해 하반기에 들어갈 것 같다. 덧붙여 2년에 3편씩 꾸준히 내놓는 크리에이티브한 회사로 남았으면 하는 소망이다.

유년 시절 이야기 좀 해달라. 집안 분위기도 좀 달랐을 것 같은데.

배우들이랑 감독들이랑 집에 자주 왔던 것 말고는 별로. 다만 초등학교가 당시 아버지 사무실이 있던 남산 근처여서 수업 끝나면 애들 데리고 가서 그 앞에서 제기차면서 배우들 얼굴 훔쳐보고 그랬다. 중학교 때 성룡이 방한했을 때도 여자애들 인사시켜주고 밥 얻어먹기도 하고. 그러다 본격적으로 이 일 해야겠다고 맘먹은 건 미국 유학가기 직전이다. 공대에 진학을 하긴 했는데, 한 학기 어슬렁거리다 그해 10월에 미국엘 갔다. 그때도 영화하겠다고 아버지와 담판을 벌이긴 했지만, 영화과는 딴따라라고 보는 눈들이 많아 그곳에선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곳에서 대학다니면서 <깊고 푸른밤> 미국 로케이션에 합류한 게 기억에 남는다.

스탭으로 참여했나.

딱히 하는 일은 없고 옆에서 구경하다 대리 운전해주는 정도였다. (웃음) 스탭과 배우들이 코리아타운 근처의 한 집에서 함께 숙식해가며 찍었고 고생한 만큼 에피소드도 많은 영화다. 하나만 꺼내자면, 배창호 감독님이 촬영 도중에 장미희씨랑 이야기가 잘 안 맞는기라. 열받았는지 나보고 드라이브 가자고 해서 30분 거리의 샌타모니카 해변까지 모시고 갔다. 도착해서 난 차 안에 있는데, 배 감독님이 모래사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더니 무릎을 딱 꿇고선 한 30분간 기도를 하는 거다. 그러더니 와서는 아무 말 없이 ‘가십시다’ 해서 온 적이 있다. (웃음) 영화일을 하게 된 건 그런 촬영현장의 풍경들을 보면서 자연스레 동화돼서 택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제작자로서 같이 작업해 보고 싶은 감독이 있을 법하다.

<파이란>의 송해성 감독. 울릴 줄 안다. <라이터를 켜라>의 장항준 감독은 실제로 만난 적도 없고, 아직 완성된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자신이 하는 영화랑 실제 삶이랑 비슷한 것 같아 언젠가 한번 현장에서 함께 일해보고 싶다.

어쨌든 설렘만큼이나 져야 할 부담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나부터 좀 젊어져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아내도 그게 걱정되는지 나보고 노친네들이나 친구들 만나지 말고 그 시간에 서점 가서 애들 보는 잡지 사보라고 한다. 지금부터 ‘뭐, 합네’ 하고 큰소리치고 다니고 싶은 마음은 없다. 영화판이 ‘뻥’으로 먹힐 만큼 만만한 것도 아니고. 급하게 뭘 내놓아야겠다는 욕심보다는 처음에는 일단 여러 번 잽을 먹여보다가 관심을 받을 정도가 되면 한방 먹일 수 있는 찬스를 갖고 싶다. 찬찬히, 아주 찬찬히 지켜봐달라.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