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도쿄, 이렇다 할 성과는 없지만 패기만은 넘쳤던 아나키스트 박열(이제훈)은 불령사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든다. 그에게 호감을 느낀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적극적으로 동거를 제안하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자는 뜻을 함께 품는다. 한편 관동대지진으로 어수선해진 분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6천여명의 조선인이 무차별 학살당하는 참극이 벌어진다. 일본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폭탄 제조를 시도했으나 실패한 박열이 히로히토 황태자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우려 한다. 하지만 박열과 후미코는 자진해서 형무소에 들어간 후 그들이 받은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많은 사람의 관심이 쏠린 재판장을 일본 제국주의를 조롱하고 아나키스트로서의 신념을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길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버린다.
이준익 감독의 전작 <동주>가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여백의 영화였다면, <박열>은 시종일관 뜨거움으로 가득 차 있다. 박열과 후미코가 보여준 과감한 행동이나 꼿꼿한 신념을 실화에 기반해 온전히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특히 후미코는 최근 개봉한 한국영화의 여성 캐릭터 중에서 단연 돋보인다. 싸워야 할 대상이 일본의 권력층이라는 점을 확실히 하는 접근도 새롭다. 이미 결과가 정해지다시피한 재판을 맡았지만 심문 과정에서 의심을 품고 딜레마를 겪는 다테마스 가이세이(김준한)나 적극적으로 박열과 후미코를 옹호하는 변호사 후세 다쓰지(야마노우치 다스쿠)의 캐릭터가 그 예다. 다만 배우들의 연기 톤이 균질하지 않은 탓에 연기 합이 조화롭지 못한 순간이 눈에 띄거나 마무리의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것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