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이에 왜 미용실을 다니고 그래. 파마에, 염색에.” 손홍주 사진기자가 인터뷰 장소에 도착하자 이준익 감독이 인사차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젊어지려고 그랬다는 답이 돌아오자 “젊어서 어디다 써”라고 다시 한번 농담을 건넨다. 하지만 올해 59살인 이준익 감독은 현재 충무로에서 청춘의 이야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다루는 중견 감독이다. <동주>(2015)는 일제강점기를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어내다 으스러져간 두 청년 윤동주(강하늘)와 송몽규(박정민)의 모습을 보여줬고, 개봉을 앞둔 <박열>의 박열(이제훈)과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는 억지 주장으로 그들을 재판정에 세운 일본 내각을 역으로 조롱하며 그들이 아나키스트로서 가진 신념을 세상에 알리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의 모습에서 시대를 아우르는 보편적인 청춘의 속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난 청춘이기도 하고 청춘이 아니기도 하고 청춘이어도 괜찮고 아니어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이준익 감독을 만나 나눈 이야기를 전한다.
-20여년 전 제작자로서 <아나키스트>(2000)를 준비할 때 박열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이 인물을 지금 영화로 다루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아나키스트>를 만들 당시만 해도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거의 없었다. 과감한 시도였지만 쓰라린 실패를 경험했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작품에 함부로 덤벼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하고 우선 소재를 묵혀둔 거지. <소원>(2013) 이후 <동주>를 준비할 때도 고민이 많았다. 시인이 주인공인 영화를 흑백으로 만들때 망하지 않을 만한 제작비를 계산해보니 5억원이더라. 그래서 저예산으로 찍은 거다. 이 작품이 실패하지 않고 다행히 큰 비난도 받지 않아서, 그럼 이제 <박열>에 도전해보아도 되겠다 싶었다. <동주>가 일종의 검증 과정이었던 셈이다.
-구체적으로 <동주>의 어떤 점이 <박열> 역시 가능하겠다는 판단을 서게 했나.
=여태까지 일제강점기를 다룬 영화는 거의 대부분 피해자의 억울함,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한 내부 조직의 자중지란을 다뤘다. <동주>엔 이런 게 없다. 반일감정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는 어떤 설정 대신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한 젊은이의 온전한 시의 세계와 신념만 있다. 이렇게 만든 <동주>가 관객에게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으니 <박열>도 통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던 거지. 지금도 국가주의나 민족주의 프레임에 갇혀있는 아시아 국가가 있는데, 박열은 이미 1920년대에 탈민족적 세계관을 갖고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정에서 선언을 하고 온전하게 자기주장을 기록으로 남긴 인물이다.
-“나는 감독 이전에 제작, 배급, 수입업자 출신이다 보니 사이즈에 대한 감이 확실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도>와 <동주>의 성공 이후 더 큰 규모의 제작비로 영화를 찍는 것도 가능했을 텐데, 왜 26억원으로 영화를 만들어야겠다는 계산이 나온 건가.
=첫 번째 이유는, 망하기 싫어서다. 성공도 해보고 망해도 보니까 망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두 번째 이유는 영화의 방향성과 관련 있다. <동주> 당시 윤동주와 송몽규의 아이덴티티는 오히려 부족한 제작 조건 안에서 구현해냈을 때 표현된다고 봤다. <박열>은 6주 동안 24회차에 걸쳐 찍었다. 100m 달리기하는 마음으로 만드는 게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100억원대 제작비를 들여서 야스쿠니 신사에 엄청난 폭도들이 모여 있다거나 지진이 일어나는 모습을 규모 있게 표현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건 오히려 관객이 주인공의 내면에 접근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봤다.
-<동주>와 달리 <박열>을 컬러로 촬영한 이유가 있나.
=시는 하얀 백지에 쓰인 검은 글씨로 컬러를 상상하는 매체다. 이것을 컬러로 보여주게 되면 시로부터 상상할 수 있는 다양한 색깔이 본의 아니게 한 가지로 규격화될 수 있다. 반면 <박열>은 실제 있었던 사실에 대한 실존 인물들의 입장이 더 중요했다. 박열이 가진 논리 정연한 신념,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가진 인식 체계 같은 것 말이다. 이런 것이 흑백으로 표현되면 그 시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오히려 지나치게 미화될 수 있다. 이번에는 있는 그 자체의 현상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다.
-실제로 <박열>은 “이 영화는 고증에 충실한 실화”이며, 등장인물 역시 모두 실존 인물이라는 자막이 영화 처음에 뜬다. 허구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던 <동주>와는 차이가 있는데.
=야마다 쇼지가 쓴 가네코 후미코 평전을 보면 실제 사건을 근거로 한 필요 인물이 너무 많다. 사실 더 많은 인물을 등장시켰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2시간 러닝타임으로 압축하는 과정에서 우선순위가 밀린 사람이 너무 많다. 굳이 어떤 허구의 인물, 상상한 사건이 필요 없다. 기록의 차이다.
-지난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할복> 관객과의 대화(GV)를 가지며 <박열>을 두고 “<동주>보다 더한 반일영화”라는 농담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정작 <박열>은 반일 정서와 거리가 멀다. 박열은 “일본 권력에 대해서는 반감이 있지만 민중한테는 오히려 친밀감이 들지”라고 말하며 후미코에게 호감을 갖고, 예심 판사 다테마스 가이세이(김준한)는 박열과 후미코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딜레마를 겪지 않나. 일제강점기 배경 영화 중에서는 독특한 접근인 것 같은데.
=박열의 그 대사가 바로 영화의 관점을 수식한다. 박열이 상대한 것은 일본이라는 집단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고, 그러니 민중에게는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반일영화일 수도 있다. 일본의 기득권 세력이 국수주의를 향해가고 있고, 그 입장에서 보면 반일이 아니겠는가.
-촬영 때 테이크를 많이 가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몇번 찍어도 결국 편집 과정에서는 첫 번째 테이크를 선호한다던데.
=항상 그랬다. 이번에도, <동주> 때도, 지금까지 찍은 영화 12편이 모두 그랬다. 배우에게는 첫 테이크에서 한 연기가 첫 경험이기 때문에 그때의 긴장감이 화면에 온전히 담기게 된다. 두 번째 테이크만 가도 이전 경험을 기억해 연기를 자꾸 계산해서 하게 된다. 첫 테이크에서 보여준 연기에는 현장에 임하는 배우의 의식이나 무의식의 ‘엣지’가 담기기 때문에 관객도 그 텐션을 따라갈 수 있다.
-<박열>을 힙합에 비유한 적이 있다. 말 안 듣는 조선인 중 가장 말을 안 듣지만 뚜렷한 주관을 당당하게 말하는 박열의 ‘스웨거’ 캐릭터가 바르고 모범적인 이미지의 이제훈과 영화를 보기 전에는 단번에 매치되지 않았다는 반응도 있다. 실제로 파격적인 연기 변신이라는 말이 나왔고. 이제훈의 어떤 점에서 박열과의 공통점을 찾았나.
=이제훈의 기존 이미지가 박열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선입견이다. 인간은 모두 스웨거의 본성을, 박열 같은 속성을 갖고 있다. 그게 바로 자존감 아닌가. 이제훈이 박열을 한다고 결심하는 순간 그는 박열이 될 수 있다. 어떻게 보이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조작된 것이고 일종의 장식이 가미된 것이기 때문이다.
-타이틀롤은 박열이지만 후미코의 존재감이 만만치 않다. 실제로 후미코의 이야기에 보다 흥미가 간다거나 후미코의 영화 같다는 일부 반응도 있는데.
=박열과 후미코는 같은 뜻을 향해가는 동지이자 부부니까, 서로를 빛나게 하며 둘 다 빛나는 것이 더 발전된 형태의 결과물이다. 이 커플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게 아니라 둘이 만나서 각자 한 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굉장히 진보적인 인간관계를 보여준다. <동주> 역시 마찬가지다. 윤동주가 있기에 송몽규의 인생이 보이고 송몽규가 있기에 윤동주의 삶이 보이며, 누구의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동주>는 매번 다르게 읽힐 수 있다. 만약 <동주>를 송몽규의 영화로 보거나 <박열>을 후미코의 영화로 본다면 그건 관점이 너무 편협한 거다.
-두 사람의 로맨스는 서로의 존재를 온전히 존중하는 것과 병행된다. 박열이 “후미코의 판단을 내가 얘기하는 것은 후미코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언급했다는 것을 후미코가 전해 듣는 장면이 이 영화에서 가장 로맨틱한 부분 아닌가. 페미니즘적 의미에서도 흥미로운데.
=맞다. 그렇게 박열이 여성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후미코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근대적 가치를 보여준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기 삶의 서사 안에서 구축된 페미니즘, 스스로 설립한 가치관을 보여준 인물이다. 버지니아 울프 등 서양의 책을 읽고 따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 권력인 일본 제국주의를 상대로 선명한 논리를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후미코를 이야기할 때 파격적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자기를 주체화한 후 그를 대상화하는 거라고 본다. 아나키즘의 핵심은 권력에 저항하면서 저항의 목표가 권력을 잡는 것에 있지 않다는 점에 있다. 때문에 동물 애호가, 환경 아나키스트, 페미니스트 모두 아나키즘적 이념과 본질은 일맥상통한다.
-<동주>는 동주가 자신의 유고시집 제목이 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말하는 프리즈숏으로 끝난다. 윤동주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박제되는 느낌이 있었다. <박열>은 아예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이 사진이 말해줄 것”이라며 도발적인 사진을 찍는 모습에서 끝나지 않나. 청춘의 한순간에서 멈추는 방식의 마무리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
=글쎄, 이유가 뭘까. (웃음) 원래 자신을 가장 모르는 사람이 본인이니까. 듣고 보니 그냥 내 습관인 것 같다. 사실 <왕의 남자>(2005), <라디오스타>(2006)도 모두 그렇게 끝냈다. 여기에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다.
-<동주>에 이어 <박열>까지 계속 청춘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를 하고 있는데.
=청춘을 다루겠다고 목표를 세운 적은 없다. 다만 한 인간이 어떤 순간에 어떤 행동을 했는데 그것이 가치있게 다가와서 그 매력을 표현하려고 했고, 그게 때로는 청춘이 된 것이다.
-래퍼 비와이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하거나 힙합에 대해 계속 언급하는 것 역시 현실의 청춘들에 대한 관심으로 보이는데.
=대선 투표독려 캠페인 ‘0509장미프로젝트’ 당시 진행하는 사람들에게 세대를 넓히자, 예를 들면 비와이를 참여시킬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요즘 세대의 아이콘처럼 인지되고 있으니까. 그렇게 캠페인을 함께하고 대화를 나누다보니 서로 공감하는 부분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콜라보레이션 작업으로 이어졌다. 요즘 힙합을 보면서 예전의 록의 저항 정신, 더 옛날로 가면 <왕의 남자>의 장생(감우성)이 하는 사설과 같은 패턴이라고 느꼈다. 힙합은 사회적 불만이나 개인의 아픔을 정면으로 고백하는 과정에서 자신을 극복해내는, 다소 과격할 수 있지만 결국 세상과의 소통과 이해를 도모하는 음악 아닌가. 모두 똑같다.
-스스로의 청춘 시절은 어땠다고 생각하나.
=별 볼일 없는 하찮은 인간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의욕은 앞서는데 실력은 따라오지 못한 데서 오는 열등감, 부족한 정보를 과신해서 스스로 말도 안 되는 궤변을 쏟아내는 어설픈, 지금과 같은 청춘이었다.
-하지만 <동주>와 <박열>이 그리는 청춘에는 아름다움이 녹아 있다.
=하찮은 것이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역설적이지만 별 볼일 없는 게 소중하다고 얘기하는 것이다. 사실 박열도 별 볼일 없는 인간 아닌가. 영화 속에서 <조선일보> 이석 기자(권율)가 말한 것처럼 박열은 허황된 이상주의자가 맞다. 누구나 하찮은 인간이지만, 그 하찮음 안에 아름다움이 있다는 거지.
-2015년에 <사도>가, 지난해에는 <동주>가 개봉했고, 올해는 <박열>이 공개된다. 데뷔 만 24년이 된 감독의 작업량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준비 중인 차기작이 있나.
=내 강점은 성실함이다. 부지런하니까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거다. 난 항상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다. 어떤 영화인지는 영업 비밀이니까 말할 수 없다. (웃음) 이번엔 현대물이라는 것만 언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