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박흥식 / 출연 문소리, 이재응, 윤진서 / 제작연도 2005년
나는 90년생이지만 어렸을 적부터 70, 80년대에 대한 향수가 짙었다. 그때의 노래들, 그때의 도시 풍경들을 보면 괜히 마음이 차분해지고 뭉클해졌다. 게다가 난 엄마에 대한 사랑도 유독 짙다. 우리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사람이라서 그냥 횡단보도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걷는 것만 봐도 너무 귀엽다. 이런 나에게 <사랑해, 말순씨>는 그야말로 제격인 영화가 아닐 수 없었다.
70년대 말. 주인공 광호(이재응)에겐 엄마 말순(문소리)과 4살 된 여동생 혜숙이 있다. 중학교 2학년인 광호는 사춘기에 접어들고 있다. 동생은 귀찮고 엄마는 더 귀찮다. 바보라 불리는 동네 형 재명 때문에 아침부터 창피를 겪는 광호. 같은 집에 하숙하는 누나 은숙(윤진서)은 그런 광호가 귀여운지 종종 말상대를 해준다. 광호는 은숙이 좋다. 광호의 시점에서 그 시절 자연스럽게 광호를 스쳐가는 소소한 일부터 소소하지 않은 일까지 영화는 보여준다. 어느 날, 영국에서 시작된(?) 행운의 편지를 받은 광호는 저주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주변 사람들에게 답장을 보낸다. 하지만 아무도 광호처럼 답장을 하지 않는다. 오래지 않아 광호는 그들에게 답장을 보낸 걸 후회한다.
말순은 광호를 떠난다. 문소리가 연기한 말순은 우리 엄마처럼 귀여운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 점만 빼곤 우리 엄마랑 판박이다. 정이 많고 싹싹하며 순하면서도 독하고 독하면서도 순하다, 모든 엄마들이 그러하듯. 아마 광호에게도 세상에서 제일 귀여운 말순이겠지. 우리 엄마의 엄마는 우리 엄마가 준비도 인사도 못한 어느 날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우리 엄마가 19살에 겪은 일이다. 당시 엄마는 본인 역시 더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도 아빠를 만나 결혼하고 언니를 낳고 나를 낳았다. 하늘나라에서 외할머니는 우리 엄마에게 얼마나 미안할까. 그래서 난 가끔 외할머니가 환생한 게 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엄마가 안방에서 멀쩡하게 자고 있는데도 사무치게 엄마가 보고 싶은 밤이면.
<사랑해, 말순씨> 코멘터리를 들으니 ‘말순’ 캐릭터에는 박흥식 감독님의 어머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는 것 같았다. 감독님의 코멘트 하나하나에 어머님에 대한 애정과 유년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얼마 전에 또래 감독과 나눈 생각이기도 한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이 유독 깊은 작가들이 자기 고백적인 이야기를 쓰는 것 같다. 내 맘대로식 일반화이지만. 그 이유를 생각해보자면 이렇다. 엄마를 너무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소심하거나 늘 걱정이 많다. 어느 날 엄마가 팍 사라지거나 죽어버리는 게 아닐까 무섭고 슬프기 때문이다. 작은 겁쟁이들. 겁쟁이들은 피곤하다. 피곤하면 잠을 많이 자고 꿈을 많이 꾸게 된다, 나처럼. 그럼 자연스럽게 자기 고백적인 영화를 찍게 된다. 크크 말도 안 돼.
여동생 혜숙과 둘이 남게 된 광호. 엄마 옷을 끌어안고 엄마 냄새 난다며 하늘이 찢어져라 울어대는 혜숙을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광호는 모른다. 엄마 옷을 뺏는 일밖에는. 하지만 광호는 3학년이 되었고 늠름해질 것이다. 혜숙을 사랑으로 품고 잘 길러내겠지. 언젠가 혜숙이 광호를 귀엽다고 생각할 날도 있지 않을까. 이제부턴 광호가 혜숙에게 엄마이기 때문이다.
정가영 영화감독. 장편 <비치온더비치>(2016)를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