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민의 오독의 라이브러리]
봉준호의 <옥자>를 보고 떠올린 리처드 플라이셔의 <소일렌트 그린>
2017-07-06
글 : 박수민 (영화감독)
돼지고기와 녹색 과자
<옥자>

늘 식당에 가면 별 고민 없이 즐겨 고르는 메뉴가 제육덮밥이다. 제육덮밥은 내게 미각의 정체성이고, 솔푸드이며, 완벽한 물질(?)이다. 나는 삶에서 아주 오랫동안 제육덮밥을 즐겨왔고, 다른 어떤 육류보다 돼지고기를 선호한다. 십몇년 전의 언젠가, 무슨 얼어죽을 체육대회의 만찬 준비를 위해 암퇘지 한 마리를 통째로 굽는 작업을 감독한 적이 있다. 나는 한 마리 짐승을 밤새 골고루 익히고 그 해체를 지켜보면서 계속 술을 들이켰고, 부산물을 포함해 거의 모든 부위를 맛보았다. 돼지는 정말로 버릴 게 없다. 근처 정육식당에서 초빙한 통구이 전문가 아저씨는 내게 말했다. “돼지에서 안 먹는 부위는 없어. 딱 두개만 빼고.” 그게 뭐냐고 내가 묻자 그는 “눈알”이라 답했다. 나는 윽 하는 리액션을 했을 뿐, 이후에도 고기를 멀리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아무튼 올해 6월 29일, 0시가 되길 기다려 나는 TV에 연결된 엑스박스 원을 켜고 넷플릭스를 통해 기대해 마지않았던 <옥자>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자 나는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과연 나는 제육덮밥을, 아니 돼지고기를 끊을 수 있을까?’

TV와 콘솔을 끄고 책상 앞으로 되돌아와 앉으며 책장에서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2009)와 업튼 싱클레어의 <정글>(1906)을 꺼내 괜히 뒤적였다. <정글>의 ‘유르기스’는 잔인하고 야만적인 돼지 도살을 보고서 처음엔 자신이 돼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안도했다. 그러나 이어진 깨달음이란, 노동자인 자신 역시 돼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었다. 통조림 공장주들은 돼지로부터 모든 이익을 쥐어짜내듯, 임금노동자에게서도 그와 똑같은 것을 원했다. 자본가들의 계산 방식으론 “100명의 인간 생명이 1펜스의 이익만큼의 값어치도 없는 것”이었다. 나는 책을 책장에 도로 꽂다가 옆의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와 아래 프리모 레비의 책들이 있는 걸 보고 등골이 약간 오싹했다.

무의식적으로 인간과 짐승의 홀로코스트를 같이 분류해놓는 장서가는 비인간적인가? 하지만 비인간적인 것이야말로 인간만이 취할 수 있는 초(超)인간적인 태도 아니야? 설마 이렇게 다들 사이코패스가 되는 걸까? 육식을 즐기고 책 좀 냉정하게 분류한 이유로? <옥자>는 이런 생각을 잠시나마 하게 만드는 영화다. 아니, 감독부터 아직 고기를 안 끊었다잖아. 육식의 세계에서 혼자 채식한다고 뭐가 달라져? 물론 문제는 뭘 먹느냐가 아니라 이 먹거리를 생산하는 시장의 횡포와 과정의 무자비함이다. <옥자>는 영화의 내용처럼 포맷까지 역설의 줄타기 혹은 줄다리기를 한다. 국내의 3대 멀티플렉스 체인이 이 영화의 상영을 거부하면서 자신들이 극장이 아닌 영화 편의점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다른 매체를 통해 동시에 내용을 접할 수 있다면 굳이 극장에서 틀 필요가 없는 콘텐츠로서 영화의 가치를 축소, 격하시킨 셈이다. 그런데 <옥자> 자체는 글로벌 스트리밍 공룡 넷플릭스의 전액 투자를 통해 만들어졌다. 같은 영화만 온종일 트는 멀티플렉스에서 취향을 잃고 서성이는 좀비가 되거나, 매달 자동이체로 카드 결제를 하며 온갖 다양한 콘텐츠의 바다에 스스로 뛰어들어 익사하거나, 돈을 내는 관객과 시청자는 늘 그렇듯 시장의 노예일 뿐이다. 노예임을 자각하든 대충 뭉개고 살든 똑같다.

노예가 돼지를 잡아먹으면서 기쁘기만 한 이 세계가 언젠가 돼지를 멸종에 이르게 만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인간 아래의 푸드 체인이 모두 바닥나는 공포를 오래전에 그린 영화가 있다. 영화작가보다 위대한 고용감독, 리처드 플라이셔의 <소일렌트 그린>(1973)이다. ‘최후의 수호자’라는 비디오 제목으로도 알려졌던 이 고전 SF영화의 존재를 처음 안 것은 포스터의 유명한 그림 때문이었다. 포클레인이 인간들을 한삽 퍼서 버리고 있는 강렬한 이미지를 한동안 잊을 수 없었는데, 나중에 시네마테크에서 확인한 결과 영화가 그리는 미래 사회는 정말로 인간을 굴착기로 퍼다버릴 만한 곳이었다. 인구 폭발로 5천만명이 살고 있는 2022년 뉴욕에서 인간이란 종은 그런 취급을 받는다. 기업 간부나 공권력의 수하들, ‘가구’(Furniture)라고 불리는 고급 매춘부만이 집에서 살고 있다. 그렇지 않은 이들은 건물 바깥의 계단이나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뒹군다. 그것은 버려져 있는 쓰레기들이고, 남아돌고 넘치는 잉여의 덩어리들이다. 이 덩어리들로 결국 뭘 해결할 수 있을까? 아포칼립스 SF 특유의, 왜 이렇게 암울한 미래 사회가 되었는지 설명하기 위해 으레 깔아주는 세계관 설정 오프닝에서 텍스트 롤을 열심히 올리거나 내레이션으로 장황하게 떠들지 않는 대신, 영화는 산업혁명에서부터 환경오염에 이르는 이미지의 콜라주로 유려하게 시작한다. 치명적인 식량난으로 사람들은 ‘소일렌트 그린’이라 명명된 인스턴트 가공식품을 배급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찰턴 헤스턴이 잿밥에 관심이 더 많은 형사 로버트 손으로 나와 살인사건 현장에서 증거물 확보보다는 주변의 레어 아이템을 슬쩍 빼돌리는 일에 집중하는 모습으로 세계의 상황을 곧장 그려낸다. 그의 조언자인 노교수 솔 로스(에드워드 G. 로빈슨)는 로버트가 슬쩍해온 과일, 채소, 소고기, 비누 등을 보고 풍요로웠던 과거를 떠올리며 눈물을 뚝뚝 흘린다. 영화의 대낮 장면은 카메라 렌즈에 그냥 오렌지색 필터를 끼워서 찍은 것이 틀림없고, 극중 인물들은 모두 ‘온난화’를 표현하기 위해 온몸에 물을 묻히고 땀을 흘리는 척한다. 그러나 이런 소소한 아이디어들은 요즘 영화의 현란한 CG보다 훨씬 효율적으로 SF의 진정성을 더한다.

<소일렌트 그린>

그러고 보면 찰턴 헤스턴은 은근히 원조 묵시록적 영화의 왕자였다. <오메가맨>(1971)에서 그랬고, <혹성탈출>(1968)도 그렇다. 생각해보면 <십계>(1956)와 <벤허>(1959)도 모두 한 세계와 질서의 멸망과 종말을 다루고 있으니 아포칼립스물이나 다름없다. 생전에 전미총기협회에서 기조연설을 하며 장총을 높이 치켜들고, “내 총은 절대 못 뺏어간다!” 외친 것도 평생 이러한 영화들에서 공연한 영향인지 모른다. 그는 인류에 총이 필요 없는 아름다운 미래 따위 절대로 가능하지 않다고 진심으로 믿었음에 틀림없다. 길을 가다 천원 정도에 살 수 있는 인도네시아산 싸구려 비스킷 정도로밖에 안 보이는 인류의 유일한 대체 식량, 소일렌트 그린의 제조에 얽힌 가공할 만한 비밀을 알게 된 노교수. 그는 경악하고 절망하여 ‘집’(Home)이라 불리는 도시 한가운데의 돔형 건물로 향한다. 아마 신이 있다면 거기 있을 거란 극중 대사처럼 ‘집’은 이 세계에 절망한 인간이 삶을 포기하는 걸 돕는, 실로 전율의 행정을 서비스하는 기관이다. 노인은 마지막으로 와인을 한잔하고 하얀 침대 위에 누워 안락사를 기다리며 준비된 시청각 자료를 감상한다. 그것은 세계가 지금처럼 되기 이전의 아름다운 풍경을 담은 영상이다. 교수를 말리러 간 로버트도 그 영상을 보는데, 아마도 세계가 이렇게 된 이후에 태어난 세대인 그 역시 처음 보는 광경에 노인과 마찬가지로 눈물을 줄줄 흘린다. 녹색 과자의 정체는 너무나 유명한 까닭에 구태여 의미를 보탤 필요는 없겠지만, 영화에서 정말로 의미심장한 부분은 마지막 엔딩 크레딧 시퀀스다. 나는 1973년에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본 관객의 기분이 어땠을까 늘 궁금하다. 영화가 엔딩 크레딧의 배경으로 보여준 영상은, 노교수가 죽기 전에 보던 영상과 똑같다. 그러니까, 그 순간 극장 안에 있던 관객은 사라질 과거(바로 현재)를 마지막으로 바라보던 ‘집’ 안의 자살자들과 똑같았던 것이다. 내 생각에 이건 엄청난 영화 경험이 아니었을까? 극장에 들어가기 전과 나온 이후가 관객의 삶을 바꿀 만한 체험. 고민 없이 누리는 지금이 사실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자각.

다시 나의 지금으로 돌아와서, 나는 스트리밍의 편리함에 쉽게 무릎 꿇고 <옥자>를 집에서 감상했다. 스트리밍으로 보는 영화와 극장에서 보는 영화는 경험의 차원에서 분명 다르다. 나는 영화가 던진 화두에 일정 부분 공명했지만, 당장의 제육덮밥을 끊을 결심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영화를 보기 위해 타인들과 함께 극장에 잠시 갇혀 있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고 우겨보고 싶다. 하지만 앞으로 고기를 먹을 때는 한동안 옥자가 떠오를 것 같다. 그 생각이 쌓이다보면 어떤 결심과 행동으로 이어질지도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옥자>는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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