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에드워드 양 / 출연 오념진, 금연령, 오가타 이세이, 조너선 창 / 제작연도 2000년
서른에 잔치는 끝난 줄 알았다. 변변한 잔치를 열어본 적도 없는 나의 30대에 최영미의 선언이 아프게 박혔다. 어느 날 눈을 떠보니 멍청한 30대가 되어 요절할 기회조차 사라진 허망함이랄까. 이미 잔치가 끝났으니 남은 세월을 가끔 <서른 즈음에>나 부르며 일상이나 대충 수습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기실 나는 잔치를 벌여본 기억조차 없었다. 2000년 당시 다큐 전문 채널에서 방송 마감에 허덕이는 나날 속에서 나만의 유사 잔치를 꿈꾸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한달에 한두번 운 좋게 쉬는 주말에 간혹 ‘100만원의 날’을 정하고 하루 새 100만원을 쓰곤 했다. 아침에 현금으로 100만원을 뽑아서는 당일 운좋게 만난 이와 젊은 졸부처럼 탕진하거나, 홀로 맞는 날엔 한두곡외 별로인 음반이나 사도 안 사도 그만인 책들을 수십여만어치 사기도 했다. 공허와 권태에 대한 나름의 반동이었고, 돈을 잘 벌어서가 아니라 돈 쓸 여유조차 없던 시절이었기에 그에 대한 보상심리였다. 피자 라지 한판을 들고 종일 선릉공원에 누워 전리품들을 향유했고, 날이 저물면 영화관을 갔다. 관객 두명밖에 없는 영화관에서 캔맥주를 마시며 그 영화를 봤다. 느린 취기와 세 시간이나 되는 러닝타임으로 인해 졸면서 한번 보고, 깨면서 한번 더 봤다. 당시의 영화관은 그랬다.
<하나 그리고 둘>은 마른 걸레를 짜내는 듯한 회사 생활과 권태와 공허에 녹아내리던 일상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깨우는 영화였다. 불완전하다 못해 하자투성이인 인생들을 바라보는 감독의 깊은 연민과 온기, 나아가 엷지만 깊은 희망들이 이 영화에서 새벽안개처럼 피어올랐다. 하나(一)와 하나(一)가 합쳐져 둘(二)을 이루는 타이틀에서 보여지듯 가족이지만 서로 분리된 개인들이 가족과 삶의 함의를 재발견해가는, 하지만 강요하거나 무리한 드라마에 의존하지 않는 영화였다. “아빠 보는 걸 난 못 보고 난 보는데 아빤 못 봐요. 둘 다 보려면 어떻게 해요? 왜 우린 뭐든 반만 봐요.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니까 반밖에 모르잖아요.” 그래서 사람의 뒷모습을 찍는 간양양처럼 에드워드 양은 삶의 이면을 드러낸다. 삶의 깊은 스펙트럼을 닮은 풀숏과 프레임 내에서 벌어지는 잔잔한 긴장을 담은 롱테이크는 영화적 스타일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사유가 녹아든 영상이랄까. 그간 영화를 보며 주눅들어 근처에도 못 가게 만드는 영화적 천재들을 많이 봤다. 에드워드 양은 영화적 천재가 아니다. 그냥 ‘인생의 천재’라고 할까. 인생과 사유에서 영화의 존재 이유가 있음을 이 영화는 증명한다. 나는 이 영화를 통해 영화에의 강박을 많이 벗어버렸고 생의 이면에 눈길을 돌릴 수 있었다. 영화에서 일본인 사업가로 나와 주인공 엔제이에게 삶의 영감을 돌려주는 오가타 이세이는 <토니 타키타니>에서 다시 한번 내 기억을 돌려줬다. 무덤덤한 배우가 깊은 일상을 연기로 표현할 때 우리는 거꾸로 일상에서 예술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 그리고 둘>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며 퇴사를 결심했다. 그래 뭔가를 추구하자. 그저 권태가 무서운 일상보다는 한결 의미 있는 무언가를. 영화를 시작하자. 그해 유학을 준비하고 다음해에 퇴사했다. 가는 길이 무척이나 험하고 멀기 때문에 오히려 도전해볼 만한 영화로의 여행이 <하나 그리고 둘>로 시작되었다. 무엇보다 영화를 넘어선 인생이 목표로 보였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종착지가 요원한 그 길 위에서 걷고 있다.
이창재 다큐멘터리 감독.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 부교수. <사이에서>(2006), <길 위에서>(2012), <목숨>(2014), <노무현입니다>(2017) 등을 연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