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박열>, 영화적 상상력과 역사적 진실
2017-07-20
글 : 김명섭 (강남대 교수)
아나키스트 연구자 김명섭이 본 영화 <박열>

90년 전 일본과 조선을 발칵 뒤집어놓은 두 남녀가 다시 2017년 여름의 한국을 달구고 있다. 영화 <박열>은 암울한 식민지 시대의 청년 박열과 천황제 제국의 민중인 가네코 후미코가, 단지 조선인이란 이유만으로 6천여명을 학살하고서도 변명할 거리만 찾는 일본 지배권력에게 죽음의 항변을 쏟아부어 150만 관객의 심금을 울렸다. 20년 전부터 고민해왔다는 이준익 감독에게 역시 20년 전부터 박열과 흑도회·흑우회 동지 등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들에 관한 논문을 써온 연구자로서 감사의 박수를 우선 보내고 싶다.

물론 지나친 ‘영화적 상상력’이 ‘역사적 진실’을 왜곡할 수 있다고 경계하는 역사학도의 한 사람으로서 영화에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한국의 연구성과보다 일본의 가네코 후미코 연구자(야마다 쇼지)에게 더 의지하지 않았나 하는 시기심이 발동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영화 서두에서 이 영화는 ‘철저한 고증에 거친 실화’이며 등장인물 역시 실존 인물이라고 감독이 보여준 자신감에 마냥 수긍할 수만은 없어, 관객의 영화 이해를 돕고자 몇 가지 아쉬운 점을 토로하고자 한다.

영화 <박열>에는 가네코 후미코(최희서)가 박열(이제훈)의 강렬한 시 <개새끼>에 반해 관심을 갖고, ‘사회주의 오뎅집’(원명 ‘이와사키 오뎅집’)에서 그를 처음 만나 당돌하게 동거를 제안하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가네코 후미코가 1922년 2월 월간잡지 <청년조선> 교정쇄에 실린 박열의 시를 보고 그를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한 것은 사실이지만,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로부터 약 1개월 후인 3월 5일(또는 6일)경이었다. 다음날, 간다 진보초(神保町)의 한 중국 요릿집에서 만나 가네코 후미코가 먼저 호감을 전하였고, 이어 4월경부터 동거 생활에 들어갔다. 이런 사실은 물론 그녀의 수기를 번역한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이학사 펴냄, 2012)에서도 확인했을 터이지만, 감독은 후미코의 주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화에 속도감을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영웅을 모시는 여타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홍진유(민진웅), 김중한(정준원),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 동지들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섬세히 묘사했다. 불같은 성격으로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김제 출신의 최규종(배제기)과 함경도 말투의 정태성(최정헌), 불덩이 같은 회원들을 느긋한 논산 사투리로 다독이는 맏형 홍진유와 마음 여린 막내 최영환(백수장)까지. 특히 홍진유에 대한 감독의 기대는 남달라 그가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회주의 오뎅집’을 운영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다만 홍진유는 일찍이 인쇄공장 직공과 미장일을 한 자유노동자로서 잡지 <민중운동>을 발간했던 열혈남아였음이 부각되지 않은 아쉬움으로 남는다(참고로 홍진유는 이후 서울로 돌아와 흑기연맹을 만들어 활동하다 투옥되었으며 고문휴유증으로 31살에 죽은 진짜 아나키스트이다). 말기 폐병환자 니야마 하쓰요와 믿음직한 친한파 동지 구리하라 가즈오도 비록 작은 역할에 그쳤지만, 사실성을 높이려 한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3·1운동 압살에 이어 6천여 조선인대학살을 조장하고 이를 무마하려 대역사건을 기획하는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김인우)와 일본 내각회의에 대한 묘사는 탁월한 상상력이 빚어낸 역사적 진실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영화에서 불령사 단원(박살단의 이름으로)들이 러시아의 레닌이 지원한 독립자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기자를 구타하는데, 실은 그가 <동아일보> 주간 장덕수임에도 굳이 가명을 쓴 이유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다.

막내 최영환이 술자리에서 사실 자신이 직접 상하이에 가서 다물단으로부터 폭탄을 받아 가져왔다고 얘기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는 실제 해방 후 그가 부산의 <국제신문>에 연재한 회고록에 남긴 내용이어서 신빙성이 높다고 하겠다(최범술의 회고록 <청춘은 아름다워라>, 1975). 최영환은 불령사 가입 전부터 독실한 불교신도였고 후일 한용운과 함께 만당사건으로 투옥되고 해인사 주지를 역임한 인물이기에 허튼소리가 아님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역사적 고증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감독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장면은 조선인대학살이 공공연히 자행되자, 박열이 “나는 잡힌다”며 스스로 경찰에 몸을 맡기고 나아가 천황 암살 계획을 적극 자백하는 순간이다. 하지만 실제 9월 3일 밤 일본 제1사단 병참 제1대대 하사관 병사에게 체포될 당시 박열은 격렬히 저항했다고 하며, 폭탄 유입 경위도 김중한과 니야미 하쓰요의 진술이 있은 후인 10월 중순경 가네코 후미코와 불령사 동지들을 보호하기 위해 마지못해 진술한 것이다.

역시 감사할 일은 통쾌한 액션이나 어려운 아나키즘 강독 없이도 박열의 법정투쟁과 진술내용, ‘괴사진 사건’과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 등 역사적 고증만으로도 충분한 감동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삼엄한 제국의 심장부인 감옥과 법정에서 일어난 일이라곤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천황제 국가권력의 모순과 식민지 침탈의 실상, 3·1운동 압살과 6천여 조선인학살에 대한 책임을 두 사람이 당당하게 요구하고 항변하는 장면은 통쾌함을 넘어 전율감마저 갖게 한다. 이 영화가 단지 민족을 넘어선 세기적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불의한 지배권력의 만행과 이를 대역사건이란 명분으로 은폐하려는 음모를 만천하에 폭로한 한·일 민중의 정의감을 보여주려 했음을 깨닫게 하는 순간이다. 다만 두 연인의 옥중 포옹사진이 담당 다테마쓰 판사 파면은 물론, 일본 내각 자체도 붕괴시켰다는 사실도 부기해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언하고 싶다. 이들을 끝까지 변호한 후세 다쓰시 변호사가 2004년 한국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반면 가네코 후미코는 아직도 고향땅에서 이름조차 꺼내기 힘들 정도의 위험한 인물로 치부받고 있으며, 그녀를 비롯해 홍진유와 정태성, 최규종 등 불령사 동지들도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또 영화 개봉 직전인 2017년 6월경 가네코 후미코의 유일한 흔적이 남아 있는 야마나시현 고향집이 싼값에 타인에게 팔렸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어머니를 그리는 단가를 새긴 시비가 있던 이곳은 지난 2001년부터 두 사람을 기리는 한국과 일본 연구자들이 추모회와 정기 세미나를 열던 뜻깊은 유적이었다. 이런 내용도 영화 후일담으로 담았더라면 그들의 투쟁이 관동대학살과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숱한 과제와 함께 아직도 끝나지 않았음을 관객 또한 알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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