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J. 에이브럼스의 <슈퍼 에이트>(2011)에서 아이들은 8mm 단편영화제에 출품하기 위해 <사건>(The Case)이란 영화를 촬영한다. 사람들이 좀비로 변해 출몰하는 사건이 터지고, 모종의 음모가 있음을 직감한 형사는 화학공장이 문제의 진원지라 판단하고 사건을 수사한다. 엔딩크레딧에 가서야 공개되는 이 재기발랄한 단편은 극 중 화학공장이 로메로 화학(Romero Chemical)인 데서부터 드러나듯 ‘좀비영화의 아버지’ 조지 A. 로메로(George Andrew Romero, 1940~2017)에 바치는 에이브럼스의 작은 헌사이다. 좀비가 되는 노동자와 악덕 기업주의 대비로 자본주의 시스템을 은유하는 정치적 메타포 또한 B급 장르영화에 당대 미국의 시대상을 풍자하던 로메로의 작가적 특징을 고스란히 반영한 오마주였다.
<화이트 좀비>(1932)나 <좀비들의 반란>(1936), 자크 투르뇌르의 <나는 좀비와 함께 걸었다>(1947)처럼 좀비가 등장하는 영화는 일찍이 있어왔다. 그러나 현대적인 좀비영화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오늘날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좀비의 이미지를 완성한 건 바로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1968)이었다. 로메로는 인형마냥 부두교 주술사의 조종을 받는 시체 수준에 지나지 않았던 좀비의 이미지를 인간을 공격해 살점을 뜯어내고 당한 희생양을 같은 좀비로 전염시키는 그로테스크하고 공포스러운 존재로 뒤바꿔놓았으며, 11만4천달러의 초저예산으로 제작된 영화는 3천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거두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켜, 독자적인 장르로서의 ‘좀비영화’가 탄생하는 기점이 되었다.
장르의 막을 여는 데 그치지 않고 로메로는 연이어 <시체들의 새벽>(1978), <죽음의 날>(1985)로 이른바 ‘시체 3부작’을 완성하며 좀비영화의 컨벤션을 정립하기에 이른다. 후대의 무수한 좀비영화들은 어떤 식으로든 로메로가 세운 규칙에 구애받지 않을 수 없었을 만큼, 창시자로서 그의 영향력은 막대한 것이었다. 그러한 조지 로메로가 지난 7월 16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77살. 폐암으로 투병 생활 중이던 그는 평소 좋아하던 존 포드의 영화 <말 없는 사나이>(1952)의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아내와 딸이 지켜보는 앞에서 눈을 감았다. <시체들의 새벽>을 리메이크한 <새벽의 저주>(2004)로 차세대 좀비영화의 붐을 일으킨 바 있던 잭 스나이더는 이날 트위터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세상은 위대한 장인을 잃었습니다. (로메로가 준) 영감(inspiration)에 감사드립니다. 당신의 작품은 제 인생을 바꿔놓았어요. 당신이 정말 그리울 겁니다.”
좀비영화의 창시자, 현실을 반영하다
조지 로메로는 1940년 2월 4일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광고업계에서 자리 잡은 상업미술가였고, 유년기의 그를 매혹시켰던 건 지하철을 타고 맨해튼에 가서 대여해온 16mm 필름 릴 영화와 EC 코믹스에서 출간하는 호러 만화책이었다. 훗날 호러영화 역사의 한장을 장식하게 될 그의 예술적 취향은 일찌감치 형성되고 있었던 것이다(실제로 로메로는 EC 코믹스 원작의 영화 <크립쇼>(1982)를 연출하게 된다). 14살 생일 때 아버지로부터 8mm 필름카메라를 선물받은 로메로는 자신만의 영화 만들기에 몰두하게 되는데, ‘별똥별로부터 온 사나이’(The Man from Meteor)란 제목의 단편영화를 찍기 위해 마네킹 인형에 불을 붙여 아파트 옥상에서 던지다 경찰에 체포되었다는 에피소드는 바로 이 시기의 일이다.
카네기 멜런 대학에 진학해 영화 제작에 관련한 지식과 예술 전반에 걸친 공부를 다진 로메로는 1960년 졸업 후 라텐트 이미지라는 회사를 차려 산업광고 분야의 영상을 작업하며 생계를 꾸리는 한편, 틈틈이 단편영화를 촬영하고 각본을 준비하는 데 시간을 보낸다. 외계인과 조우한 어린아이의 이야기를 구상하던 그는 로저 코먼이 제작한 호러필름 앤솔로지 <테일즈 오브 테러>(1962)와 리처드 매드슨의 소설 <나는 전설이다>의 영향을 받아 극사실주의적인 저예산 호러로 방향을 틀게 된다. 바로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좀비의 공격을 피해 농가에 모여든 생존자들의 내부 분열을 그리는 영화의 구도는 반공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외부의 적 소련의 침공을 상정하는 한편, 내부적으론 보수와 진보 세력의 첨예한 대립, 인종차별을 겪고 있던 당시 미국 사회의 이념적 지형도를 단번에 함축하는 것이었다. B급 공포물임에도 영화가 담고 있던 생생한 현실감은 당대 관객에게 큰 충격을 주었으며, 지식인들은 영화의 사회정치적 은유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내놓기도 했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은 싸구려 장르로 취급되던 호러영화가 그 안에 현실의 그림자를 투영하면 보다 근원적인 공포로 관객 내면의 불안에 조응할 수 있음을 보여준 선구적인 사례였다.
70년대에 접어들어 로메로는 <마녀의 시즌>(1972), <분노의 대결투>(1973)의 상업적 실패로 잠시 침체기를 맞고는 <시체들의 새벽>으로 다시금 좀비영화의 세계로 돌아온다. 주변을 배회하는 좀비 무리에 의해 포위된 생존자라는 기본적인 구도를 반복하지만, <시체들의 새벽>에서 로메로는 공간적 배경을 백화점으로 바꾸면서 전작과는 전혀 다른 함의를 이끌어낸다. 모든 출입구를 차단한 채 백화점 안에서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인간과 유리창 밖에서 쇼윈도를 바라보는 좀비의 대비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빈부격차에 따른 계급과 물신주의를 풍자하며 다시 한번 장르 안에 시대를 반영하는 작가로서의 역량을 입증한다(좀비를 공포의 대상이 아닌 현대 대중에 대한 은유로 삼아 연민의 시선을 보내는 태도의 변화는 3부작의 마지막 편인 <죽음의 날>에서 좀비에게 지능과 감성을 부여하는 설정으로까지 발전한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타포
<죽음의 날>이 반으로 삭감된 제작비로 인해 만신창이가 된 뒤, 한동안 좀비영화를 떠나 있던 로메로는 <죽음의 날>의 초기 아이디어를 다시 끄집어내 <랜드 오브 데드>(2005)를 내놓는다. 부유한 상류층이 모여 사는 퍼들러스 그린과 섬 외곽에 임시 거처를 마련해 힘겹게 살아가는 서민들, 그리고 좀비 학살에 분노해 군대를 조직해 봉기한 좀비 군단의 세개의 축이 맞물리는 이 영화에서 로메로는 명분상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관철하며 계급간의 균열을 더욱 크게 갈라놓은 부시 정권 시기 미국의 정치상에 대한 영화적 프레스코화를 그려낸다. ‘시체 3부작’의 마감으로부터 20년이 지났지만 좀비라는 메타포는 여전히 유효했으며, 장르의 트렌드가 바뀌었음에도 로메로에게는 <다이어리 오브 데드>(2007), <서바이벌 오브 더 데드>(2009)로 돌아와야 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조지 로메로는 떠났다. 하지만 그가 남긴 좀비영화의 유산만큼은 ‘살아 있는 시체’(living dead)라는 말 그대로 죽어도 죽지 않은 채 남아 있을 것이다. 부조리와 절망의 현실, 이를 마주하고 선 대중의 무력함, 좌절과 공포가 가시지 않는 한, 좀비라는 은유, 로메로의 냉소 어린 통찰은 시대를 초월하며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이다. 마치 죽이고 또 죽여도, 끝이 보이지 않는 좀비 무리의 쇄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