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반복과 독립으로 보는 <내 사랑>
2017-07-25
글 : 홍수정 (영화평론가)
따로 또 같이

<내 사랑>(2017)의 시작 장면은 영화 전체를 압도하는 힘이 있다. 어슴푸레한 조명 아래 한 여인이 붓을 짚는다. 조심스레 물감을 입히는 손길, 붓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선명한 색, 그림으로 녹아드는 색색의 선들. 그녀의 느린 몸짓은 아픈 몸 때문이건만 이 순간에는 어쩐지 경건한 정조가 흐른다. 천천히 선을 긋는 우아한 움직임. 이 장면을 본 순간, 우리는 <내 사랑>의 전부를 본 것이다.

반복되는 모드의 붓질과 걸음

전기영화인 <내 사랑>은 주인공 모드(샐리 호킨스)의 삶을 차분히 더듬는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은밀히 반복되는 어떤 움직임이 느껴진다. 영화의 초반, 모드는 이모의 집에 머물며 가족과 함께 살던 옛집을 그리워한다. 그리고 장면이 전환되어 모드는 재즈 클럽에 있다. 이곳에서 그녀는 즐거워 보인다. 다음 장면에서 모드는 다시 이모의 집에 있다. 여기까지. 이 짧은 진행에는 많은 집이 등장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집들을 잇는 ‘길’의 존재가 삭제되어 있다. 그녀는 하나의 폐쇄적인 공간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가 돌아온 셈이다. 다음날 모드는 가게에서 처음 에버렛(에단 호크)을 본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에서 우리는 영화가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천천히 시간을 들여 에버렛의 집을 향해 걸어가는 모드의 모습과 마주한다. 노을 아래 길게 이어진 길을 걷는 그녀의 모습은 작은 공간에 머물러 있던 영화에 일종의 해방감을 부여한다. 첫 만남 후 에버렛이 모드가 돌아가는 길을 배웅한다. 그녀가 처음으로 누군가와 나란히 걷는 순간이다. 이후 에버렛은 차에, 혹은 수레에 모드를 태워 마을의 작은 길을 함께 오간다.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영화는 길 위에 있는 모드의 모습을 응시한다. 또한 모드는 산드라(캐리 매쳇)의 구두를 칭찬하기도 하고, 에버렛의 발 위에 올라서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녀는 발에 자주 관심을 보인다. 길과 발의 만남. <내 사랑> 속의 많은 요소들이 길 위에서 자기만의 몸짓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드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손에 붓을 꼭 쥐고 선을 그리는 모드의 모습과 닮았다. 길을 걸어가는 모드의 직선적인 움직임과 그녀를 천천히 뒤따르는 카메라. 모드는 온 힘을 다해 선을 채색하듯 걷고 또 걷는다. 그것은 아주 느리고 우아한 동시에 필사적인 움직임이다. 영화에는 이와 유사한 운동이 자주 보인다. 넓은 붓으로 선반을 칠하고 빗자루로 바닥을 쓴다. 이 행위는 모드가 바빠질 즈음에 에버렛이 이어받아서 반복한다. 영화 <내 사랑>에는 하나의 면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움직임이 자주 느껴진다. 그것은 마치 채색하듯 공간 속에 흔적을 남기는 운동이다. 천천히 붓을 옮기는 동작은 아마도 모드가 일생에서 가장 많이 반복한 동작일 것이다. <내 사랑>은 이미 완성된 모드의 작품이나 화가로서의 성공적인 삶을 펼쳐놓는 대신, 그림을 그릴 때의 동작 하나에 집중한다. 그러고서 이 동작을 영화의 곳곳에서 반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드의 붓질과 걸음은 근본적으로 동일한 행위다. 그 반복적인 운동이 작은 창을 내다보는 모드의 얼굴과 만날 때, 나의 인생은 모두 액자에 담겼다 말하는 고백과 만날 때, 영화는 모드의 작은 마을을 채색하는 한폭의 그림이 된다. 그렇게 <내 사랑>은 그림을 그리듯 영화의 순간들을 채워간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그것은 모드가 치킨 스튜에 넣을 닭을 잡는 장면이다. 모드가 닭을 달래가며 조심스레 잡고, 곧이어 치킨 스튜가 완성된다. 이 장면에는 신경이 쓰이는 순간이 있다. 도끼로 닭의 목을 내려치기 전, 영화는 이 광경을 지켜보는 다른 닭의 시선을 보여준다. 이 순간이 불편한 이유는 이 시선 때문에 모드의 행위가 돌연 잔혹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모드는 에버렛에게 집안일을 못한다고 구박을 받았다. 처음으로 닭을 잡아 스튜를 끓이자 에버렛은 놀라워한다. ‘모드가 닭을 잡는 장면’은 그녀가 가까스로 일상에 적응하는 긍정적인 맥락에 놓여 있다. 우리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그런데 돌연 카메라는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는 닭의 시선을 포착하고, 이질적인 정서 하나가 이 순간을 두드린다. 모드의 이야기가 무엇이든 죽음은 그저 죽음이야. 그 시선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에서 모드는 여전히 다정하고 친절하며, 닭의 생전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다. 요컨대 모드의 이야기는 방해받지 않았다. 다만 저 닭의 시선은 마치 유유히 흐르는 강 가운데 선 작은 바위처럼, 고요히 흐르는 모드의 이야기 가운데 홀로 서 있다. 이 순간 영화는 닭의 죽음을 모드의 이야기에 편입시키길 거부한다. 모드는 모드대로, 닭은 닭대로. 예술은 예술대로, 죽음은 죽음대로. 어느 하나도 다른 것에 종속시키지 않고 모두 별개의 이야기로 존중하려는 태도가 이 찰나의 순간에 살아 있다.

독립적인 이야기들이 하나로 귀결되는 영화

그리고 <내 사랑>이 모드의 인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그러하다. 실화와는 무관하게 영화 속 모드와 에버렛은 서로에게 도움을 줄지언정 서로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모드는 에버렛에게 뺨을 맞고서 그림을 그린다. 그녀는 고통의 순간마다 익숙하게 그림에 기대어온 것 같다. 에버렛과 결혼한 후에도 그녀는 늘 그랬듯이 계속해서 그림을 그린다. 말하자면 모드의 예술은 에버렛으로부터 독립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에버렛 역시 마찬가지다. 아내가 유명한 화가가 되었지만 예술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한결같다. 그에게 예술은 돈을 버는 수단인 동시에 나의 아내가 좋아하는 그 무엇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멜로영화에서 흔하디 흔하게 등장하는 ‘연인의 사랑으로 깊어지는 예술 세계’, ‘아내의 사랑으로 변화하는 남편’의 스토리를 <내 사랑>에서는 보지 못한다. 다른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모드의 오빠는 모드를 찾아오지만 잠시 머물다 떠나며 다시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리워하던 딸을 찾은 모드는 먼발치에서 잠시 지켜보고서 이내 집으로 돌아온다. 영화가 작은 집에 홀로 남은 에버렛의 모습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이 영화에는 인물들이 서로 맞부딪히며 만들어내는 감화의 순간이 없다. 모드 개인의 이야기를 뜯어봐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장애는 예술을 위한 영감이나 결핍이 아닌, 그저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창으로서 존재한다. 폭력은 폭력대로 벌어지고 예술은 예술대로 이어진다. 동행하되 종속되지 않는 이야기들. 그것들은 각자 자신의 길을 나아가다가 마지막에 비로소 한편의 영화를 완성하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색을 품은 채 자신의 자리를 천천히 물들이는 움직임. 어쩐지 익숙하지 않은가?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동일한 운동이다. 선을 이어 그림을 그리듯, 발을 디뎌 길을 걸어가듯 독립적으로 진행되는 모드의 이야기들이 <내 사랑>을 완성한다. 인물의 동작이나 서사의 진행,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손길에서 모드가 내뱉은 옅은 숨결이 느껴진다. 그렇게 <내 사랑>은 모드의 삶과 만나는 데 성공한다.

영화 <내 사랑>에 등장하는 반복적인 운동은 결국 하나의 몸짓으로 귀결된다. 그것은 구부러진 몸으로 선을 긋는 모드의 신중한 움직임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영화의 첫 장면으로 소환되고 마는 것이다. 먼저 살다 간 어떤 여인의 삶이 예술에 녹아들고, 그 예술이 어떤 영화에 녹아들고, 그 영화가 여인을 따라가기 위해 몸부림치는 순간을 지금 우리가 지켜보고 있다. 그 움직임은 느리되 담대하며 끝내 아름다워서 가슴이 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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