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캐서린의 존재감이 바꿔놓은 억압의 풍경 <레이디 맥베스>
2017-08-08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상황을 압도하는 얼굴

<레이디 맥베스>는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고증에 바탕을 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묘하게 현대적인 색채를 띤다고 여겨진다. 이 영화가 몰입의 서사 대신 교묘한 분열의 서사를 차용하고 있다는 것이 영화에서 묻어나는 현대적인 색채와 어느 정도 연관되는 것 같다. 캐서린(플로렌스 퓨)의 결혼식 장면이 담긴 첫 번째 시퀀스에서 캐서린의 뒤쪽 측면에 위치한 카메라는 관객이 안전한 위치에서 베일 속의 캐서린을 관찰하도록 유도한다. 그런데 얌전히 찬송가를 부르던 캐서린이 노래를 멈추고는 시퀀스 내내 카메라에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옆에 선 남편을 이상한 눈빛으로 곁눈질하기 시작한다. 그녀의 시선과 행동에 이런저런 해석을 붙이거나 원인을 추측할 수는 있겠으나 이러한 분석이 꼭 필요하다고 여겨지진 않는다. 중요한 건 원인을 알 수 없는 그녀의 행동이 안전한 관찰자로서의 관객의 위치를 흩트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관객은 그녀가 보여준 시선의 의미를 끝끝내 알 수 없다. 관객이 도저히 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요소 하나를 심어놓음으로써 그녀의 모든 상황을 알거나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영화는 전제한다.

프레임 바깥과 소통하는 힘

<레이디 맥베스>를 읽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어떤 단어나 상황들로 캐서린을 끼워 맞추거나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서 벗어나보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영화 속 캐서린의 의상을 논할 때도 주의가 필요하다. 치마를 부풀리는 크리놀린을 입은 캐서린이 애나의 도움으로 코르셋을 입는 장면은 흔히 말하듯 여성에 대한 억압을 상징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 같다. 그런데 캐서린이 속박하는 의상을 입는 그다음 숏에서 화면 정중앙에 위치한 캐서린이 졸음을 참지 못한 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숏이 맞붙는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캐서린의 행동은 이런저런 규정들에 절대 속박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한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집을 비운 사이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앉아 있던 의자에서 낮잠을 자는 행동 역시 억압을 재현한다기보다는 억압을 비웃는 일종의 게릴라적인 행위처럼 보인다. 이 때문에 그녀가 전과 같이 의자 위에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앉아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더는 억압을 상징하지 않고 캐서린의 천연덕스러움을 더욱 두드러지게 한다.

졸음을 참지 못하는 캐서린의 캐릭터는 그녀가 본능적인 인간임을 자각하게 하는 동시에 그녀가 처한 억압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 느슨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영화는 캐서린이 남편의 명령을 곧바로 따르지 않고 그를 쳐다보며 잠깐의 휴지부를 둔다든가, 까닭 모를 웃음을 터뜨리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억압의 상황을 재현하는 동시에 그에 관한 비판을 시도한다. 고정된 화면과 회화를 연상시키는 조명 역시 그녀를 억압하는 현재 상태를 극적으로 재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억압당하는 캐서린’을 곧장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캐서린이 프레임 안에 얌전히 앉아 있을 때조차 캐서린의 존재감으로 인해 프레임의 고정성은 마구 깨어진다. 그것은 고전적인 얼굴이기보다는 오늘날의 얼굴에 가까운 배우 플로렌스 퓨의 존재감에서 어느 정도 기인한다. 캐서린으로서 플로렌스 퓨의 얼굴은 <올란도>(1992)에서 틸다 스윈튼이 연기한 올란도라든가,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2010)에서의 안젤리카를 연상시킨다. 올란도와 안젤리카는 몰입을 깨고 관객과 소통하는 대표적인 캐릭터다. 캐서린은 <올란도>의 올란도처럼 카메라를 정면으로 쳐다보며 카메라 바깥의 관객을 직접 소환하지 않으며, <안젤리카의 이상한 사건>처럼 사진을 통해 죽음을 뛰어넘는 기적이나 마법을 행하지 않아도 프레임 바깥과 소통하는 힘을 지닌다.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은 플로렌스 퓨의 현대적인 얼굴만으로 이를 능히 행한다.

대립처럼 보이는 연대

그런데 우리는 캐서린의 얼굴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붙은 또 하나의 얼굴을 보게 된다. 하녀 애나는 캐서린과 대조적으로 서사를 넘나들며 관객과 소통하기보다는 서사 내부로 관객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관객이 <레이디 맥베스>를 보면서 끊임없이 몰입과 브레히트식 거리두기의 이중 작용을 거쳐야 하는 이유도 바로 캐서린과 애나의 얼굴이 벌이는 대결 탓이다. 캐서린과 애나가 서로 대립하는 인물이라고 인식할 때 가장 손쉬운 분류는 캐서린에게는 자유와 진보라는 이름을, 애나에게는 체제 순응자라거나 명령에 의해 억압을 실행하는 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애나는 계급상 체제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명백한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그녀의 순응적인 태도는 애나라는 캐릭터의 특성이기보다 계급적인 특성일 수밖에 없다. 대신 애나라는 캐릭터의 특징에 가까운 것은 그녀가 욕망이 없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캐서린과의 대조 속에 더욱 두드러지는 점이다. 캐서린이 영화가 전개되는 내내 식욕, 성욕, 쾌락욕 등 다양한 욕망을 보여주는 동안 애나는 그저 하루가 편안히 지나가는 것 외에 다른 욕망은 내비치지 않는다. 둘의 차이를 욕망으로 설정할 때, 영화의 결말부에서 애나에게 가해진 가혹한 단죄의 성격이 마치 그녀가 아무것도 욕망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해진 단죄처럼 여겨진다. 이는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나 영화의 원작인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에서 욕망에 대한 단죄처럼 보였던 결말을 뒤집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복에서 서사 외적인 의미를 찾는다 해도 캐서린에게로 향했어야 마땅한 형벌이 모두 애나에게로 향하는 결말은 캐서린이 누명을 써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관객에게 가히 충격적이다. 그녀의 잘못은 고작해야 캐서린 몰래 그녀를 감시하거나 밀고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굳이 잘못을 캐내본다 한들 캐서린이 시아버지를 독살했을 때 제동을 걸지 않고 그것을 그저 지켜보았던 잘못이 불어난 결과라는 추측 정도다. 어떤 이유를 붙이더라도 애나라는 인물에 대한 감정은 잉여처럼 남는다. 그러나 애나에 대한 감정이 꼭 캐서린에 대한 미움으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애나와 캐서린이 서로의 자리에 서보는 교환의 서사가 어쩐지 두 인물을 따로 떼어놓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아버지와 남편이 집을 비운 사이, 시아버지가 아끼는 샴페인을 모두 마셔버린 캐서린을 대신해 애나가 벌을 받는다. 이때 애나는 네발로 기는 가축처럼 취급받는데, 이는 곧 캐서린이 애나를 대신해 세바스찬에 의해 가축처럼 무게가 측정되던 순간을 즉각 연상시킨다. 이 순간들은 연대라는 단어가 들어설 틈이 없이 지극히 건조하게 그려지지만, 두 사람의 공통된 운명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캐서린과 애나간의 힘겨루기의 승리자는 캐서린이고, 몰입과 거리두기의 승자 역시 거리두기다. 서사 내부에 있으면서도 서사 바깥에 위치한 것처럼 보이는 캐서린의 존재는 마치 특정 상황극을 펼치는 것처럼 이야기 속을 지나가는 동시에 실제로는 희생양에 불과했던 ‘애나들’, 그리고 결국 ‘맥베스 부인’들과 대화를 시도하는 것 같다. 마지막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한 캐서린의 얼굴은 결국 답이 아니라 또 다른 질문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레이디 맥베스>는 명백한 고전적 여성상에 가까운 애나와 현대적인 캐릭터에 가까운 캐서린의 만남을 통해 서로 다른 시간대를 동시에 작동하도록 만든다. 이것이 고전에 대한 그렇고 그런 평범한 재해석물이나 여성간의 알력관계를 다룬 전형적인 서사의 구렁텅이에 빠질 위험에서 영화를 구출해낸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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