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라스트 우먼 스탠딩
2017-08-23
글 : 김혜리

※<레이디 맥베스>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레이디 맥베스>

<레이디 맥베스>의 윌리엄 올드로이드 감독은 미장센으로 우선 주인공을 감금한다. 캐서린(플로렌스 퓨)은 코르셋과 크리놀린에 한번 갇히고 채도 낮은 가구와 계단, 창틀이 그리는 네모 안에 다시 담긴다. 집 안에는 책 한권, 오락거리 하나 없다. 영화 후반 캐서린의 뒷모습은 실내에 홀로 있는 여성과 인테리어를 즐겨 그린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함메르쇼이(1864~1916)의 그림을 그대로 가져온 것만 같다. 그러나 얼굴 없이 뒤돌아선 여성의 침묵을 묘사한 함메르쇼이의 작품과 반대로 캐서린은 수시로 장의자 중앙에 앉아 정면을 쏘아보며 다음 행보를 궁리한다. 함메르쇼이의 그림 속 여성을 돌려세우고 목소리를 듣고 싶었던 사람이라면 <레이디 맥베스>에 만족할 것이다.

08/10

이것은 유혈극 버전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일까? <레이디 맥베스>의 야심은 그보다 복잡해 보인다. 영화를 여는 결혼식 장면에서 부잣집에 팔려오다시피한 어린 신부는 낯선 얼굴들에 둘러싸여 있다. 그러나 베일 뒤의 젊은 눈동자는 호기심, 심지어 엷은 희망을 내비친다. 때는 1865년이고 소녀 캐서린은 당시 사회에서 여성이 삶의 궤도를 바꿀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문턱에 선 참이니 충분히 그럴 만하다. 모색의 시간은 길지 않다. 캐서린의 새 가족은 매우 신속하게 그녀가 애 낳는 살림살이(property)에 불과하다는 점을 확실히 한다. 그들은 캐서린이 말대꾸를 하거나 현관 밖으로 나가는 일을 불허하고 저녁 식탁의 대화에 끼어주지 않는다. 기상 시각도 청소하러 들어오는 하녀가 정한다. 가장 직접적으로 캐서린을 모욕하는 남편(폴 힐튼) 또한 슈퍼 가부장인 아버지 보리스(크리스토퍼 페어뱅크)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영화 중반 캐서린은 벽에 세운 보리스의 관 옆에 웨딩 사진을 찍듯 서기도 한다. 그녀를 ‘사들인’ 주체는 남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향한 정중한 조소의 제스처 같다).

그러나 애초 매매혼에 가까운 결혼에서도 실리를 찾아내려고 했던 소녀는 벽에 부딪혀도 순순히 좌절하지 않는다. 캐서린은 한마디로 “한마디도 지지 않는 여자”다. 물리적 대결이 영화에 등장하기 전부터 캐서린은 대화에서 밀리지 않는다. 울며불며 반박하는 대신 말 이외의 신호들로 맞선다. 아버지에게 찍소리 못하면서 내실에서만 큰소리치는 남편에게는 피식거리고, 협박을 들으며 나른하게 뭔가를 집어먹는다. 방문한 목사가 현숙한 부인의 도리를 늘어놓자 말허리를 끊고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즉시 배웅해버린다. 기억해야 할 것은 캐서린이 기본권으로서 여성의 주체적 삶을 주장하고 다른 소수자 집단과 연대하는 현대 페미니스트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다. 그녀는 손에 걸리는 도구란 도구는 다 사용한다. 남편과 시아버지가 집을 비우자 하인들을 휘어잡기 위해 계급과 가부장의 권위를 대리행사하고(“내 남편의 시간과 돈으로?”) 남편에게 들었던 “웃지마”라는 명령을 흑인 하녀 안나(나오미 아키)에게 반복한다. 머지않아 캐서린은 자신이 강자의 자리에 설 수 있는 상대인 하인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으로부터 성적, 감정적 만족을 얻는다. 처음 세바스찬이 침실에 침입함으로써 시작되는 이 관계는 “노가 곧 예스”라는 왜곡된 강간 판타지를 충족시킨다는 비판을 부를 만하다. 하지만 과정을 들여다보면 캐서린은 폭행을 당한 다음 남자에게 끌리는 게 아니라 키스부터 적극 주도한다. 몸의 자신감은 운명을 통제하려는 의지를 다시 강화시키고 캐서린은 욕망의 방해물을 잔인하게 제거하는 단계에 이른다.

08/11

<레이디 맥베스>는 영국 시대극 관습을 벗어나 비백인 배우에게 주요 배역의 절반 이상을 맡겼다. 하녀 안나와 연인 세바스찬, 남편의 혼외 아들과 그 보호자가 아프리카계 내지 혼혈 캐릭터다. 올드로이드 감독의 요람인 연극계에서는 이미 낯설지 않은 방식이기도 하다. 감독의 주장에 따르면 의도한 바가 아니라 캐릭터에 가장 적합한 배우를 물색한 ‘블라인드 캐스팅’의 결과라고 하는데, (믿기 힘들지만) 사실이라면 페미니즘 외에도 계급과 인종의 권력관계가 덕분에 끌려들어온 셈이다.

안나는 생면부지 타인들 사이에 떨어진 캐서린과 가장 친밀한 거리에 있는 동성이다. 캐서린 역시 동조와 우정을 원하는 기색을 보인다. 첫 번째 범죄 현장에 굳이 안나를 동석시켜 친구처럼 가족과 고향 이야기를 묻는 캐서린은, 오만한 지배계급을 응징한다는 의미를 사태에 불어넣으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캐서린과 달리 19세기에 온전히 속한 인물이며 고용주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안나는 같은 여성인 캐서린의 일탈에 두려움을 넘어 거부감을 느낀다. 같은 여성이지만 흑인이고 하인계급인 안나는 캐서린보다 더 선택지가 적다. 두 번째 범죄에서는 공범인 연인이 주춤하기 시작한다. 밀회 중 남편이 갑작스레 돌아오자 정부-정부(情婦-情夫)가 으레 그러듯 순간적으로 세바스찬을 숨긴 캐서린은 창녀 운운하는 비난을 듣자 제 손으로 남자를 끌어내 정사 자세를 취하며 도발한다. “이 경우에는 결혼이 매춘”이라는 반론이라도 하듯. 같은 여성이 연대를 거부하고 남자 친구가 주저하는 가운데 <레이디 맥베스>는 가차 없는 속도로 모성애의 시험을 마지막으로 제기한다(캐서린은 애인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이 점은 영화가 끝나고 잊힐 정도로 극중에서 거론되는 일이 없다. 동시에 그녀는 임신을 감출 생각이 없는 양 배에 손을 자주 얹는다). 남편의 핏줄이라고 찾아온 어린 소년은 착하고 캐서린을 첫눈에 따르며 게다가 정치적으로 올바른 관객의 동일시를 즉각적으로 부르는 소수 인종 혼혈이다. 그렇다면 캐서린은 당연히 아이의 엄마 역을 맡아야 하는가? 일견 그것이 소수자들의 대안가족을 이루는 안심되는 결말처럼 보이긴 한다. 그러나 달리 바라보면 캐서린에게 아이는 결혼 당시 남편이 숨겼던 ‘거짓말’이며 현재의 사랑을 위협하고 애도하는 ‘미망인’의 자리에 그녀를 눌러앉히는 족쇄이기도 하다. 한편 “감옥까지, 하늘까지” 캐서린과 함께하겠다던 애인은 돌연 남편과 같은 남성임을 확인시키듯 “너랑만 섹스가 안 됐나보다”라는 비아냥마저 흘린다. 소년을 줄곧 적대시하던 세바스찬이 마음이 약해져 아이를 없앨 기회를 놓쳤다고 탄식하며 떠나겠다고 통보하자, 캐서린은 서슴지 않고 남자의 ‘핑계’를 손수 날려버린다. 대다수 관객이 주인공에게 등을 돌리는 모멘트다. 제약 속에서 살아오다 생을 통제하는 힘을 겨우 손에 쥐게 된 10대라서 가능해 보이는 천진난만한 잔혹성이다. 요컨대 제목이 유래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부인이 살인을 부추긴 여자였다면 <레이디 맥베스>의 캐서린은 살인자다. 그녀는 원하는 것을 위해 남자의 손이 아닌 자기 손에 피를 묻힌다. 또한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캐서린은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도 딴판이다. 이 모든 피투성이 과정에서 캐서린의 심리적 상태는 흔히 여성 살인자에게 배당되는 광기나 히스테리와는 동떨어져 있다. 그녀는 본인의 사고와 행동을 완전히 장악하고 어떤 궁지에서도 다음 카드를 생각 중이다.

젠더, 계급, 인종의 권력관계가 겹치는 이 영화의 인물들은 이야기가 나아감에 따라 본인이 귀속된 여러 가치체계의 우선순위를 달리하며 말하고 행동한다. <레이디 맥베스>는 페미니즘 영화 하면 쉽게 떠올리는 시대에 저항한 고결한 여성의 투쟁기가 아니며 자매애의 승리담도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든 두 경우보다 더욱 드문 영화는, 긍정적 성격과 혐오스러운 습성의 요철을 가진 둘 이상의 여성 인물이 각자의 이기적 욕망을 좇으며 의지와 운을 겨루는 드라마다. 시대극에서 이런 영화의 희소성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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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악덕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짐 브로드벤트)는 영화에 좀처럼 등장하지 않는 유형의 인간이다. 평균치의 미덕과 결함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이 표출되는 방식도 극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구식 카메라 수리점을 운영하며 이혼 후에도 깔끔한 일상을 유지하고 예리한 농담에 능한 이 60대 남성은 어느 날 날아온 편지에 의해 본인이 지닌 가학성을 돌아보게 된다. 토니는 한때 누군가에게 가혹한 말을 하고 편의적으로 그 일을 잊었다. 그러나 관객은 당사자보다 먼저 짐 브로드벤트의 자연스럽게 절묘한 연기에 의해 토니의 숨겨진 얼굴을 감지한다. 그는 매일 아침 만나는 상냥한 집배원의 말을 끊고, 신변잡기를 늘어놓으며 구매하지 않는 고객에게 짜증을 낸다. 표현은 항상 미묘하지만, 토니는 “나는 교양 있고 분별 있다”고 믿는 사람이 살면서 형성하는 희미한 오만을 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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