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 소녀들이 있다. 루저들이다. 자기들끼리 모여 작은 공동체를 만든다. 몰려다니다가 우연히 거대한 악과 마주한다. 그런 과거를 까맣게 잊고 성장해 저마다 나름의 사정을 가진 어른이 된다. 어느 날 이들은 저 옛날의 패거리 가운데 한명으로부터 메시지를 받는다. 그것이 돌아왔다고.
앞서 요약한 이야기를 들으면 여러 가지 제목이 떠오를 것이다. 누군가는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이라고 생각할 거다. 누군가는 <스탠 바이 미>(1986)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1984)의 조금 뒤틀린 기억이 아니냐고 되물을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특정하지는 못하더라도 아무튼 꽤 익숙한 설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건 스티븐 킹의 소설 <그것>(1986)의 설정이다. 이와 같은 설정은 스티븐 킹의 <사계>에 수록된 <바디>(1982, 이후 <스탠 바이 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와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에서 유사하게 발견된다. 하지만 이후 세대에 레퍼런스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영향을 끼친 건 역시 1986에 발표된 <그것>이라고 보는 게 옳다. 독자의 향수를 자극해 이야기에 빠져들게 만들고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면서 전개되는 <그것>의 전략은 이후 <20세기 소년>을 비롯해 수많은 대중문화 콘텐츠에서 응용되었다.
‘그것’이 돌아왔어, 27년 만에
내가 <그것>을 처음 만난 건 비디오를 통해서였다. <피의 피에로>라는 제목으로 출시된 <스티븐 킹의 그것>(1990)은 동명의 TV시리즈를 비디오용 영화로 재편집한 것이었다. 그래서 전개도 이상하고 연기의 톤도 일정하지 않다. 무엇보다 후반부의 특수효과가 너무 엉성해서 몰입을 방해했다.
하지만 그런 건 조금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페니와이즈 덕분이었다. 이 영화 속의 페니와이즈는 두려움에 관련된 한글의 모든 수사를 가져와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어마어마한 악마였다. 존재감 자체가 그랬다. 특수효과가 아니라 분장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팀 커리가 연기한 페니와이즈 광대가 화면 어딘가 걸쳐 있는 것만으로 이 영화는 초현실적인 예술작품처럼 보였다. 팀 커리(<록키 호러 픽쳐쇼>의 그가 맞다)의 탁월한 캐릭터 해석 덕분에 1990년 TV판 <그것>은 단지 별점 몇개로 평가할 수 없는 괴물 같은 영화가 될 수 있었다(이 지면에서 아예 대놓고 다룬 적이 있듯이 나는 팀 커리의 광팬이다).
그리고 지금 정확히 27년 만에 <그것>이 돌아왔다. 원작에서 페니와이즈 광대가 27년을 주기로 돌아온다는 설정을 떠올려보면 재미있는 일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이 영화 재미있다. 매우 훌륭하다. 원작이나 TV판과는 다른 전개 방식을 채택했는데 이게 이야기 안에서 잘 굴러간다. 좋은 연기와 이야기가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맞아 돌아가는 영화를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원작과 달라진 게 많다. 90년판은 원작 소설과 동일하게 과거와 현재를 오고 가면서 전개되었다. 메시지를 받은 루저클럽 소년, 소녀들이 다시 재회하고, 그런 와중에 페니와이즈 광대와 관련된 과거의 일들이 교차되었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시간순으로 진행된다. 유년 시절로부터 시작해서 유년 시절로 끝난다. 27년 후를 기약하며 마무리되는 것이다. 즉, 27년 후의 이야기를 다루는 속편이 예정되어 있다. 이번에 개봉한 <그것>은 <그것-파트1>이다.
또한 시간대가 조정되었다. 원작과 TV판은 80년대 후반을 현재 어른의 시점으로 다루었다. 소년들의 시점은 50년대였다. 이번 영화는 루저클럽이 활동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80년대다.
80년대 소년모험활극의 매력을 복원하다
이런 설정의 변화는 흥미로운 시사점을 갖는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코드 가운데 하나는 ‘루저패거리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무언가와 조우하면서 겪는 모험’이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스티븐 킹의 이야기들이 그랬고 스티븐 스필버그의 <E.T.>가 그랬으며 <구니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이와 같은 설정은 여러 가지 유행에 밀려 한동안 폐기되었다. 그랬다가 최근 들어 어떤 계기를 통해 그게 얼마나 매력적인 설정이었는지,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얼마나 오랫동안 그리워해왔는지 알게 되었다.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 말이다. 넷플릭스의 <기묘한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 80, 90년대 소년모험물의 가장 빼어난 매력을 완전하게 복원해냈다.
돌아온 <그것>은 <기묘한 이야기>가 폭발적인 흥행으로 증명해낸 것들의 자장 위에 서 있다. <그것>은 어른이 된 주인공들이 재회하고 악에 맞서는 이야기를 과감히 파트2로 미뤄버린다. 그리고 소년들의 이야기로만 파트1을 채운다. 원작의 매력적인 특징을 폐기해가면서 <그것>이 얻고자 하는 건 <기묘한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복원해낸 80, 90년대 소년모험물의 활극적 요소다. 유년 시절과 성인 시점을 교차하는 원작의 설정을 빼고 이 모든 걸 80년대 소년모험활극으로 만들더라도 충분히 매력적일 수 있다는 자신감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박은 실제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페니와이즈의 성격도 다소 수정되었다. 원작과 TV판의 페니와이즈는 크툴루적 존재였다. 페니와이즈 광대는 우주를 떠돌며 세계를 먹어 치우는 절대악이다. 그런 절대악이 세계를 먹어 치우는 일을 게을리하고 미국 시골 동네에서 왜 아이들과 다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상력을 발휘해보자면 페니와이즈에게 힘을 주는 원천이 아이들의 영혼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겠다.
돌아온 <그것>의 페니와이즈는 절대악이라기보다 프레디 크루거에 가까운 존재다. 아이들의 두려움으로부터 힘을 얻는다. 영혼을 빼앗긴 희생자들이 페니와이즈의 몸 안에서 반쯤 몸이 묻힌 채 괴로워하는 모습은 대놓고 <나이트메어> 시리즈의 이미지를 가져왔다. 실제 영화 속에서 <나이트메어> 시리즈가 상영되고 있는 극장이 등장하는 걸 보면 감독의 의도적인 오마주로 보인다. 페니와이즈가 세계를 파괴하고 먹어 치우는 우주적 존재라는 설정이 <그것-파트2>에 이르러 등장할지도 모르겠다.
빌 스카스가드가 연기하는 페니와이즈는 팀 커리의 페니와이즈에는 근접하지 못하더라도 꽤 매력적이다. 원작 소설에서 묘사하는 것처럼 턱이 벌어지고 입이 찢어지면서 추악한 이빨이 드러나는 모습도 CG의 힘을 빌려 잘 재현되었다. 그러나 팀 커리는 CG 없이도 더 무섭게 입을 벌렸다.
원작의 후반부는 사실상 어른 시점과 유년 시절이 교차되어 전개되기 때문에 힘을 얻을 수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하면 내년에 공개될 <그것-파트2>가 걱정되기도 한다. 가장 큰 아쉬움은 이 멋진 아역배우들을 다음 영화에서는 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특히 베벌리 역할의 소피아 릴리스는 너무 매력적이라 탄성이 나올 지경이다. 페니와이즈가 27년마다 돌아오듯이 속편도 이 배우들을 데리고 27년 후에 만들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