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허진호 / 출연 유지태, 이영애 / 제작연도 2001년
항상 같았다. ‘좋아하는’으로 시작되는 질문의 말머리만 들어도 싫었다. 그 질문 몇개로 상대를 평가하려는 시선이 늘 불편했고, 경쟁적으로 숨은 명작과 고전을 나열하는 모습 또한 딱히 내키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인생의 영화’라니. 물론 ‘좋아하는’도, ‘감명 깊게’도 아니었다. 새삼 그 단어의 차이가 컸다. ‘내 인생의’가 주는 사적 편안함이 마음에 들었다.
강렬한 기억은 반드시 어딘가에 남기 마련인데, 이상하게도 <봄날은 간다>를 만난 ‘처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저 새해가 되면 으레 <봄날은 간다>의 DVD를 틀었고 습관처럼 나는 이 영화와 함께했다. 종종 밤잠 자는 내 머리맡에 놓인 노트북에서 영화는 반복 재생되었고, 그렇게 꿈에서 상우(유지태)와 은수(이영애)의 목소리를 들었다. 영화를 반절쯤 보다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깼을 땐 엔딩부터 다시 시작되기도 했다.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꽤 오랜 시간, 이 영화와 함께 잠드는 것이 내게는 일종의 의식 같았다.
특히 이 작품의 공간을 좋아했다. 단순히 ‘아름답다’로 표현하기엔 부족했고, 영화엔 다른 질감의 묘사가 담겨 있었다. ‘공간’을 ‘존재’로 대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8~9년쯤 전이 되어서야 직접 촬영지를 찾아갔다. 이미 관광 명소로서의 인기도 사라졌을 곳인데 가기 전부터 온갖 상상에 빠졌다. 은수를 보고 싶다며 새벽에 택시를 타고 그녀의 집 앞에 갔던 상우처럼, 공간을 찾아가면 그곳이 날 반갑게 맞아줄 것만 같았다.
분명 계획적인 탐방이었다. 맹방해수욕장에서 러닝 차림으로 수영을 즐기던 할아버지는 충분히 멋졌고, 은수의 집 앞 도로엔 유치원 건물이 들어선 게 전부였다. 대나무 숲은 예상보다 작은 규모로 여전히 자리를 지켰고, 폐교 앞 잡초 속에서 외롭게 촬영지임을 알리던 녹슨 입간판도 반가웠다. 그 안내로 찾은 신흥사에서 스님에게 받았던 수박 한 조각도 시원했다. 그런데도 발길이 닿는 곳마다 실망은 계속됐다. 단순히 세월 탓은 아니었다. 도무지 영화 속 공간이 표현했던 그 감정을 찾기 어려웠다. 기대는 무너졌고, 환영받지 못한 기분마저 들었다.
국도를 따라 걸으며 산 몇개를 넘었다. 영화에서 봤던 공간은 현실에 없었고, 너무도 평범한 모습이 미웠다. 그곳을 얼마나 들여다봐야 영화처럼 그릴 수 있을까. 심란한 마음에 군 제대 이후 가장 먼 거리를 꼬박 걸었다. 세상에나, 타의도 아닌 자의로 그리 오래 걷는다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웃기지만 진지했다. 흉내조차 낼 수 없겠다는 씁쓸함을 안고, 어둠 속에서도 한참을 더 걸어 막차를 탔다. 버스 안에 풍겼던 땀 냄새의 민폐까지도 생생히 기억난다. 처음으로 혼자 간 여행은 그렇게 당일치기로 끝났고, <봄날은 간다>는 내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되었다. 공간에 정성을 다하면 존재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을까. 그 뻔한 물음을 땀 흘린 뒤에도 되뇌었다.
신준 영화감독. 장편 데뷔작 <용순>(2016)으로 2016년 부산국제영화제 대명컬처웨이브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