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할 수 있다.” 영어 ‘I can speak’의 한국어 번역은 그러할 것이다. 영화 <아이 캔 스피크>에서는 주인공 나옥분(나문희)이, 자신이 과거 강제동원된 위안부로 겪었던 피해 사실을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도 쓰인다. ‘말할 수 있다’는 자신이 겪은 고통을 사회화하겠다는 의지라고, 나는 오랫동안 믿어왔다. 그 말의 첫 번째 청자가 자신이라는 것도 중요하다. 김승섭 보건학자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그 ‘말하기’의 중요성을 다룬다. 이 책의 첫 챕터인 ‘말하지 못한 상처, 기억하는 몸’은 특히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데, ‘말하기’의 의미와 중요성을 잘 전하고 있어서다.
김승섭 교수가 한국의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 경험을 연구하기 위해 설문조사를 진행하던 때의 일이다. ‘귀하는 새로운 일자리에 취업할 때 차별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답변은 세 항목 중 하나에 체크하는 식이었는데 ‘예, 아니오, 해당사항 없음’이었다. 그런데 직장을 다니는 사람 중 152명이 ‘해당사항 없음’을 선택했다고 한다. ‘예’ 또는 ‘아니오’를 선택한 노동자는 3442명, 대체 152명의 대답은 어떤 뜻이었을까. 같은 ‘해당사항 없음’으로 답한 사람이라 해도, 남성 노동자는 ‘아니오’(구직 과정에서 차별받은 적이 없다), 여성 노동자는 ‘예’(구직 과정에서 차별받은 적이 있다)라는 뜻에 가까웠다. 이런 현상은 여성 노동자가 차별 경험을 인지하고 타인에게 말하는 데 심리적인 어려움을 더 겪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중요한 사실은 ‘자가평가’와 건강을 조사했을 때, 여성의 경우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사람들보다 ‘해당사항 없음’으로 답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아팠다는 데 있다.
남성이 같은 경향으로 대답하는 경우도 있다. 2012년에 있었던 ‘전국 다문화가족 실태조사’가 이루어지던 때의 일이었다. 다문화가족 청소년 362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학교 폭력을 경험한 학생들에게 ‘친구나 부모님이나 선생님 등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한 경우,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경우, 그리고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간 경우’ 셋으로 나누어 응답을 받았다. 학교폭력과 우울증 유병률의 상관관계가 가장 높은 집단은 말할 것도 없이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경우. 그런데 남녀를 나눠 분석하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고 응답한 학생들 중 남학생의 경우,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넘어갔다’는 쪽이 학교폭력을 경험하지 않은 학생들보다 훨씬 높았다. 이 결과에 대해, 김승섭은 이렇게 해설한다. 남자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배워온 결과가 아니겠느냐고.
차별을 경험하는 것과 그것이 차별이라고 인지하는 것, 그 인지한 차별을 보고하는 것이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성별이나 인종 등의 이유로 사회적으로 고착된 차별 구조 안에서 살아가는 약자들의 경우 차별을 경험했을 때 “내가 잘못해서”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눈여겨볼 만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차별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기보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차별받았다고 생각하는 쪽이 심리적으로 불편함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별당한다고 말하는 사람보다 더 신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 몸은 스스로 말하지 못하는, 때로는 인지하지 못하는 그 상처까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이렇게 ‘알아야 인지하는’ 그리고 ‘인지해야 고치는’ 병에 대해 말한다.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사회가 노력해야 수많은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경우에 대해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은 ‘세월호 참사 생존 학생 실태 조사’ ,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삼성반도체 직업병 소송과 IBM 직업병 소송’, ‘소방공무원 인권상황 실태조사’, ‘동성결혼 불인정과 성소수자 건강의 관계’ 등 최근 몇년간 한국 사회에서 큰 논란이 된 사회적 이슈들을 다룬다. 항목별로 내용이 좀더 길었으면 싶은 경우도 많지만, 유사한 해외 사례는 무엇이 있는지, 실제 조사결과 항목별 응답률은 어떻게 되는지 등 꼼꼼하게 읽어볼 만하다. 한국 사회가 풀어가야 할, 만만찮은 문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