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교의 동아리 후배들이 조남주 작가의 소설 <82년생 김지영>으로 정기공연을 올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사실 ‘후배’라고 친근하게 부르긴 좀 머쓱한 게, 난 그저 동문명단 몇장 넘기면 나오는 일면식도 없는 까마득한 졸업생 선배일 뿐이라. 그럼에도 그 연락이 진심으로 기쁘고 반가웠다. 20대 여성 기획자와 연출자가 대한민국 30대 여성의 삶을 정면으로 다룬 베스트셀러로 여배우들이 가득한 공연을 올리겠다는 말이었으니깐. 그녀들이 느낄 온갖 흥분과 부담과 두려움이 마치 내 것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실로 오랜만에 바쁜 동기들을 설득해 다 같이 공연을 보러가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연극을 제일 보고 싶어 했던 한 친구만 올 수 없게 되었다. 최근 어쩔 수 없이 좋은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에 뛰어든 81년생 그녀는, 자기 몫까지 즐겁게 공연을 보고 오라며 우리에게 연신 아쉬운 인사를 전해왔다.
예상과 기대를 훌쩍 뛰어넘는 재미있고 진실된 작품이었다. 공연 내내 객석을 꽉 채운 관객과 많이 웃고, 많이 울었고, 문득 동기들과 함께 했던 대학 시절의 추억도 하나둘 떠올랐다. 81, 82년생인 우리는 유난히 여자가 많은 학번으로, 목소리도 크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씩씩한 신입생이었다. 동아리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첫 사회였고, 그래서 가장 신나고 행복한 일도, 또 가장 아프고 절망적인 일도 그곳에서 처음 겪었다. 첫 공연 때 내가 맡은 역할은 ‘시녀’였는데, 다음 공연에선 ‘남자 군인’이었다. 여학생이 이렇게 많은데 왜 늘 남자 역할이 더 많은 희곡을 고르는지 의아했지만 굳이 따져묻진 못했다. 이후 또 다른 공연에선 우울증에 걸린 가정주부를 연기하게 되었는데, 이번엔 내 역할만 이름이 없이 그냥 ‘어머니’였다. 나도 이름을 달라고, 엄마도 이름이 필요하다고 강력히 주장했지만 ‘우리 모두의 어머니’로 상징되는 배역이라 따로 만들 수 없다는 말에 깊은 상처만 안고 무대에 올라야 했다.
연극 <82년생 김지영>은 지영이 아이를 출산한 순간 끝이 났다. 경력단절 후 독박육아의 길로 들어선 지영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할지 모두가 함께 고민해보자며 막이 내렸다. 답답했고 막막했다. 문득 문소리 감독의 <여배우는 오늘도>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 일과 가정을 숨가쁘게 오가다 지칠 대로 지친 문 배우는 만취한 채로 밤늦게 귀가해 옷방에 몰래 숨어든다. 그런데 그 고된 순간조차 그녀는 가족들이 깰까봐 기어코 정신을 차린다. 한껏 소리를 지르고 몸부림을 쳐도 시원찮을 판에 잔뜩 긴장한 몸짓으로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토록 본능적이고 슬픈 움직임이라니. 82년생 김지영도 수년이 지나 그런 밤을 맞이하게 될까. 물론 그러한 피로와 만취의 밤에 별 도움은 안 되지만 귀여운 남편의 위로를 받는 결말은, 아마 수많은 김지영들이 현실적으로 꿈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미래일 것이다. 더 답답하고 막막해진다. 그녀들은, 아니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집으로 가는 길에 다시 81년생 친구가 떠올랐다. 함께 연극을 보았다면, 과연 그녀는 어떤 마음을 안고 집으로 돌아갔을까. 문득 그녀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르고 싶어졌다. 딸도, 아내도, 엄마도 아닌, 누구보다 용감하고 지혜로운 그녀 자신만의 이야기가 궁금한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