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남한산성> 황동혁 감독, "김상헌의 말을 통해 변화를 바라는 바람과 상상을 담고 싶었다"
2017-10-12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뜨겁고 격정적인 것을 냉엄하게 바라보는 시각을 느꼈다.” 영화 <남한산성>을 본 소설 <남한산성>의 작가 김훈의 감상평이다. 그의 말대로다. 조선 역사상 가장 뼈아픈 패배 중 하나로 기억되는 병자호란을 소재로 하고 있음에도, <남한산성>은 통곡과 오열의 순간과 거리두기를 하는 영화다. 눈물 대신 합리적인 성찰의 힘을 믿으며, 패배라는 결과보다 그에 이르기까지 펼쳐졌던 치열한 말의 교전에 주목하는 이 작품은 페이소스로 승부하는 한국 상업영화들과는 사뭇 다른 색채로 다가온다. 한편 <남한산성>은 <마이 파더>(2007)와 <도가니>(2011), <수상한 그녀>(2014)에 이은 황동혁 감독의 네 번째 연출작이다. 이번 영화의 경우 “내가 가진 모든 자산을 쏟아부어서 영화적으로 가장 만들고 싶었던, 아름다운 작품 한편을 만드는 것”이 흥행보다 더 중요한 목표였다고 말하는 그는 <남한산성>을 만든 뒤 처음으로 영화의 말미에 ‘각본·감독 황동혁’이란 크레딧을 달 정도로 작품에 자부심이 크다고 말한다.

-“소설에 충실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소설 <남한산성>의 어떤 점에 매료되었나.

=소설을 읽으며 남한산성 안팎의 살풍경한 모습과 추위, 이게 머릿속에 그림처럼 그려졌다. 또 인조를 둘러싸고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이 나누는 아주 논리정연하면서도 비수같이 뜨겁고 날카로운 말들이 오래 인상에 남았다. 내가 인조(박해일)의 입장이었다 해도 두 사람 중 누구의 말에 더 귀기울였을지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균형 잡힌 논쟁에 매료되었다. 병자호란이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패배한 전쟁이긴 하지만 그냥 패배한 전쟁은 아니었다는 생각을 소설을 읽으며 했다.

-김훈 작가는 소설의 서문에 “봄이면 자전거를 타고 남한산성에서 논다”라고 썼다. 혹시 남한산성에 얽힌 개인적인 사연이 있나.

=어렸을 적에 부모님을 따라서 남한산성에 있는 닭집에 간 적이 있다. (웃음) 그 이후로는 단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최근에 다시 가게 된 건 이 영화 때문이었다. 유홍준 교수님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쓰셨는데 그 말이 맞더라. 소설과 역사에 관련된 자료를 촘촘히 읽은 다음 찾은 남한산성은 달리 보였다.

-남한산성이라는 공간을 영화적으로 재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남한산성에 가본 경험은 어떤 영향을 줬나.

=성벽을 따라서 두어번 돌았는데 생각보다 아담했다. 처음에는 ‘이걸 못 기어오르나?’ 싶었는데 다시 내려다보니 산세가 너무 가팔라서 ‘어떻게 이런 곳에 성을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내가 받았던 느낌이 소설에 정확히 묘사되어 있었고 영화에도 대사로 반영했다. “산은 가파르고 성은 단단해 보인다”는 문장이다. 직접 남한산성에 갔을 때 가장 놀랐던 건 행궁이 너무 초라하고 작았다는 거였다. 복원된 행궁이 당시의 공간을 그대로 재현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고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왕과 세자가 머문 공간조차 너무 작고 앙상한 느낌이었다. 이런 곳에서 47일간 겨울을 나며 전쟁을 치러야 했던 이들이 느꼈을 압박감과 답답함, 비참함과 비루함을 영화 속 공간에도 반영하려 했다.

-소설 <남한산성>은 주요 등장인물이 있긴 하지만 단락마다 중심이 되는 인물과 그들에 얽힌 사연이 달라 파편화 되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캐릭터간의 직접적인 교류도 많지 않은 편이다. 소설의 서사를 영화의 서사로 각색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 듯하다.

=시나리오를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난관으로 느껴졌던 부분은 소설 <남한산성>에서 묘사되는 사건들이 시간순으로 배치된 게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록을 찾아보니 병자호란의 중요한 사건들은 다 초반에 일어났더라. 가장 큰 전투라 할 수 있는 북문전투도 47일 중 보름 안쪽으로 벌어졌던 일이고, 그 이후의 한달은 어떻게 항복할지를 두고 문서를 조율하는 과정이었다.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이 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이유였던 최명길과 김상헌의 논쟁을 재구성하는 것에서부터 시나리오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대여섯번의 논쟁을 연대기순으로 배열하고, 소설과 역사책에서 본 중요한 에피소드를 논쟁의 흐름과 맞는 지점에 배치했다. 논쟁의 결과로 일어나는 전투도 사이사이에 넣었다.

-영화를 보니 시나리오에는 없던 10개의 챕터가 생겼다.

=챕터는 편집 과정에서 넣었다. 편집본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줬을 때 젊은 세대들이 이 이야기를 소화하는 데 어려움을 느낄 수 있겠다는 의견을 들었다. 대사가 상당히 예스럽고, 등장인물들이 나누는 말들이 철학적이라 쉽게 소화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걱정이 있었던 거다. 그래서 장면마다 무엇을 중심으로 봐야할지 짚어주는 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퀀스별로 제목을 나눠서 달아봤다. 달아놓고 보니 다시 소단락, 주제별 단락으로 나뉜 소설의 구성에 가까워진 것 같아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해외 상영 버전에는 챕터가 들어가지 않는다. 한글 챕터를 번역한 자막을 또 넣어야 하는데 그게 너무 복잡해 보이고, 자칫하면 의도와는 다른 느낌을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뺐다.

-영화 <남한산성>은 최명길과 김상헌이 벌이는 ‘말의 전쟁’에 더욱 주목하는 영화다. 두 사람이 구사하는 화법에 대해 어떤 고민을 했나.

=최명길은 아주 절제되고 정확하고 사리판단이 명확하며 현실감각이 좋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화법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목소리라고 봤다. 명길은 크게 캐릭터가 변화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종일관 같은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해나가는 사람이다. 잘못하면 평면적일 수도 있고 자칫하면 밋밋해 보일 수 있는 캐릭터라 굉장히 깊이 있고 신뢰감이 가고 진실된 목소리가 필요했다. 이병헌 선배의 목소리는 정말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딱 최명길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김상헌은 청나라 군사들에게 길을 인도하려는 뱃사공을 가차 없이 벨 정도로 불같은 성격의 소유자다. 역사에도 최명길이 써놓은 답서를 그가 다 찢어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로 활화산 같은 사람이라 감정의 고조가 좀더 드러나는 화법을 원했다. (김)윤석 선배는 그런 쪽에 워낙 강하신 분이라 잘 표현해주셨다.

-인조의 화법도 흥미로웠다. “아껴서 오래 먹이되 너무 아끼진 말아라” 같은. (웃음)

=인조는 실제로 굉장히 예민하고 섬세했다고 한다. 실록을 보아도, 소설을 보아도 정말 많이 운 사람이기도 하고. 그의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면모를 떠올리며 다소 느리고 힘없는 말투를 구사한다는 설정으로 인조의 창백함을 표현하고 싶었다.

-청나라의 역관으로 활약하는 정명수(조우진)를 보여주는 방식이 인상적이었다. 청나라 장수의 말이 자막이 아니라 조선에서 노비 태생이었던 정명수의 입을 통해 조선의 사신에게 전달된다는 건 의도적인 설정이었나.

=정명수는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는 청나라의 역관이다. 청의 말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그 말을 전하는 목소리 안에서 정명수의 캐릭터가 드러날 거라 생각해서 최대한 건조한 자막 대신 그의 목소리를 넣고자 했다.

-영화 <남한산성>에 악역이 있다면, 영의정 김류(송영창)가 아닐까 싶다.

=청나라 군사보다 더 나빠 보이나? (웃음) 악인이라기보다는 위기상황에서 어느 조직에나 한명쯤 있을 법한 현실적이고 약삭빠른, 기회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인물을 그려보고 싶었다. 역사적으로 김류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운 공신이었지만 세도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집안이라 좋은 평가를 내릴 수는 없는 것 같다. 일례로 병자호란 이후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청나라에 끌려갔는데, 그가 자신의 가족을 데려오기 위해 청나라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바람에 조선인 노예의 몸값이 올랐고 이로 인해 조선인들의 귀환이 훨씬 더 어려워졌다고 하더라.

-최명길과 김상헌이 서로를 바라보지 않고, 왕을 향해 나란히 앉아 논쟁을 벌인다는 설정이 인상적이었다.

=서로에게 직접 건네는 말인데도, 왕을 한번 거쳐서 하는 ‘삼각형의 대화법’이 나에겐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논쟁 장면을 촬영하면서는 최대한 두 사람의 목소리와 얼굴에 집중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김지용 촬영감독에게도 현란하게 움직이는 카메라워크보다 단순하고 심플한 촬영을 주문했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가장 뜨겁게 맞부딪히는 마지막 논쟁 장면에서는 두 인물이 현장에서 부딪히는 걸 그대로 담아내고 싶어 두대의 카메라로 두 인물을 동시에 찍었다. 상헌 앞에 카메라 한대, 명길 앞에 카메라 한대를 놓고 한테이크로 논쟁의 흐름을 쭉 따라갔다.

-당시 현장의 열기가 어마어마했겠다. 한쪽에는 김윤석, 다른 한쪽에서는 이병헌이 주고받는 말의 싸움이라니.

=그때는 잠시 아주 멋진 연극을 보는 관객의 입장으로 돌아갔던 것 같다. 마지막 논쟁의 경우 처음부터 끝까지 완주하자는 생각이 있어서, 중간에 약간씩 대사가 틀리거나 하면 끊어서 가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다시 찍었다. 테이크를 갈 때마다 조금씩 대사의 리듬감과 톤이 변하는데, 굉장히 재미있었다. 윤석 선배가 테이크마다 즉흥적인 변화를 주면, 자기 페이스대로 정확하게 연기를 하는 병헌 선배가 그 바뀌는 톤을 맞받아치더라. 영화감독을 하면서 두 배우가 주고받는 설전과 연기 대결을 이토록 재미있게, 감독의 입장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으로 푹 빠져서 본 건 처음이다.

-‘삼각형의 화법’에 대해 얘기했는데, 최명길과 김상헌은 수없이 말을 주고받는데도 마주보고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거의 없다. 소설을 각색하는 과정에서 두 사람이 함께하는 장면을 만들어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나.

=그 욕망이 발현된 게 마지막 신이다. 전쟁이 끝나고 명길이 다 쓰러져가는 상헌의 숙소에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소설에 없는 장면이다. 영화 내내 두사람이 얘기를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 때문에 그들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꼭 한번 넣고 싶어서 마지막 대화 장면을 만들었다.

-그 장면에서 상헌은 ‘백성을 위한 새로운 삶의 길’에 대해 말한다. 이 대사 역시 소설에는 없는, 영화적 창작의 결과물이자 영화 <남한산성>의 핵심을 관통한다.

=역사에도 없고 소설에도 없는 말이다. 두 사람의 대화 장면을 쓰며 혼자서 고민을 정말 많이 했다. 김상헌이라는 인물은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 이르러서도 항복만은 안 된다고 주장하다가 자결까지 시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극단에 다다랐을 때, 그의 마음속에는 무엇이 남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 아마 모든 낡은 것을 없애고 완전히 무로 돌아가서 새롭게 시작하는 편이 민초를 위한 삶의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혁명적인 결론에 이르렀다. 사실 이 시나리오를 쓸 때만 하더라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로운 시대가 열릴 거라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김상헌의 입을 통해 한국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내 개인적인 바람과 소망과 상상을 얘기해보고 싶었다. 이건 소설 <남한산성>,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철학이 함축되어 있는 대사이기도 하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 앞에서 항복의 의미로 3배 9고두(상복을 입고 3번 큰절, 9번 땅에 머리를 박는 청의 인사 방식)를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다. 가장 직접적인 패배의 순간을 어떻게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나.

=소설의 대목을 읽으며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구절이 있다. 이마를 땅에 대고 흙냄새를 맡는 인조에 대한 묘사다. 임금이 땅에 코를 댈 리가 없으니, 아마도 그건 왕이 처음으로 맡아보는 제 나라의 흙냄새였을 것이다. 인조가 땅바닥에 머리를 부딪혀 피를 흘렸다는 야사가 더 유명하지만 나에게는 피보다 흙이 더 처연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그래서 소설의 묘사를 따랐고, 실제로 촬영할 때에도 인조의 이마에 묻어 있는 흙가루를 보여주고자 했다.

-주요 등장인물 중 여성 캐릭터가 사공의 딸 나루뿐이라는 점은 아쉽다.

=처음부터 고민을 많이 한 지점이다. 시나리오를 읽은 사람들도 많이 지적했던 부분이고. 궁중을 배경으로 임금과 신하들 사이의 말의 논쟁을 다루다보니 어쩔 수 없이 여성 캐릭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궁중에 있을 법한 여자는 왕비, 세자빈, 궁녀 정도인데 실제로 왕비는 병자호란 전에 죽었고 세자빈은 강화도로 피신한 상황이었다. 그처럼 남한산성에 왕족인 여자가 없었기에 여성 캐릭터가 비중 있게 들어가기 어려웠다. 영화에서 날쇠(고수)와 늘 같이 있는 칠복이라는 인물 대신 여성 캐릭터를 만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부차적인 캐릭터에 그칠 위험이 컸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포기하게 됐다.

-<마이 파더>부터 <수상한 그녀>에 이르기까지, 큰 부침이 없었던 연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남한산성> 개봉을 앞두고 어떤 생각을 하나.

=얼마간 과장이 있는 것 같다. (웃음) <마이 파더>는 손익분기점을 못 넘겼고, <수상한 그녀>는 CJ의 전형적인 명절용 영화 같다는 비판도 받았다. 하지만 <남한산성>이 지금까지 작업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후회가 남지 않는 작품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관객의 평가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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