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스위트 베이비
2017-10-18
글 : 김혜리
<몬스터 콜>

<몬스터 콜>의 ‘착한’ 소년 코너는 누군가가 자신을 벌주길 남몰래 소망한다. 엄마의 투병이 ‘어떤 식으로든’ 끝나기 바라는 본인의 잠재의식이 죄스러워서다. 피학적 욕구를 냄새맡은 권력 있는 급우는 코너를 괴롭히다가 진정한 사디스트답게 “오늘부터 널 못 본 척하겠다”고 잘난 척한다. 이에 학교식당에서 코너가 폭발하는 장면은 <문라이트>의 샤이론이 소년원에 가는 계기가 된 사건과 놀랄 만큼 비슷하다. <몬스터 콜>이 주인공 소년의 파괴와 폭행을 묘사하는 데에 있어 특기할 만한 것은 수위다. 코너는 손톱이 부러질 때까지 할머니의 거실 전체를 완전히 부수는가 하면 상대의 뼈를 부러뜨려 응급실에 실려가게 한다. 귀여운 일탈로 치부될 규모를 넘는 폭력이다.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감독은 극단적 스트레스에 처한 아이는 어른이 선선히 수용할 범위를 넘어서는 행위를 한다는 현실을 강조한다.

09/30

<몬스터 콜>은 난치병으로 천천히 죽음에 다가가는 엄마를 지켜보는 의젓한 13살 소년의 공포를 다룬다. 극중 코너(루이스 맥두걸)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성장의례는 아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 내가 상상할 수 있던 최악의 상황도 엄마에게 만약 나쁜 일이 생기거나 엄마가 사라지는 사태였다. 대체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나는 등굣길에 강박적인 셀프 내기를 벌이곤 했다. 가령 “열 셀 때까지 건널목 신호등이 바뀌지 않으면 엄마가 병에 걸릴 거야”, “교문까지 보도블록의 금을 네번 이상 밟으면…” 하는 식으로. 생애 처음 쓴 긴 글의 소재도 교외로 외출했다가 예정보다 늦게 돌아온 엄마를 기다리다 맛본 심장이 졸아드는 두려움이었다. 어째서였을까? 당시에는 그저 공포인 줄 알았지만 이른바 분리불안 안에는, 어린이에게 금기시되는 파괴적 분노와 통제불가한 상상, 내가 얼마나 단단한지 바위에 몸을 부딪고 싶은 간질간질한 충동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서 쓰고 싶다는 충동과 자연히 연결됐던 것 같다. 그리고 <몬스터 콜>의 코너는 그림을 그린다.

나는 ‘시네마테라피’라는 단어를 별로 믿지 않지만, 만약 심리 치유 영화가 있다면 <몬스터 콜>은 아마 개념에 들어맞는 경우가 될 법하다. 나무괴물(리암 니슨)과 코너의 조우는 거의, 5차에 걸친 성공적 상담 코스로 보아도 무방하다. “어려서 부모를 잃게 되면 당연히 몹시 불행하지”라고 전제하는 대신, 말하자면 이 영화는 소년이 “엄마가 죽을까봐 두려워”라고 고백하기까지 꼬박 80분을 소모한다. 거기까지 가는 길에 ‘죽음’이라는 단어는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 인물에게 극단의 터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까지 이 영화의 러닝타임은 소년의 두려움에 포함된 책임감, 죄의식, 피학성, 분노의 요소를 가려 테이블에 세심히 늘어놓는 과정이다. 코너의 문제는 그냥 엄마가 위독하다는 객관적 사실보다 복잡하다. 예민한 아이는 엄마가 궁극적으로 회복하지 못하리라 직감하는 동시에 엄마가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 줄곧 말하는 쾌유 가능성을 열렬히 믿고 싶어 한다. 모순된 두 미래를 믿는 분열은 소년의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한편 학교에는 또 다른 분열이 코너를 기다린다. 코너가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이유는 엄마가 아프기 전과 같은 일상을 유지하려 함인데, 교사와 친구들은 ‘딱한 아이’를 어떤 일에서나 열외로 취급함으로써 소년의 노력을 무의미하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관건은, 소년이 제거할 수 없는 모순을 끌어안을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나무괴물이 찾아와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들은 모두 그를 위한 연습 문제다. 불친절한 사람과 비윤리적인 사람은 다르다, 특정 사안에서 유무죄는 해당 인간이 얼마나 선한 영혼을 가졌는가와 별개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그 사랑으로 인한 고통이 가볍진 않다. 독신모와 아들의 긴밀한 유대, 상상력으로 현실의 수난을 완화하는 <몬스터 콜>의 구도는 레니 에이브러햄슨 감독의 <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항상 밝고 착한 아이여야 한다는 억압으로부터의 해방, 슬픔을 해소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 행복보다 삶에서 더 긴요할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몬스터 콜>은 판이한 톤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남매이기도 하다.

10/05

한 재능 있는 청년이 신나는 음악을 듣다가 거기 꼭 맞는 영화 장면을 떠올린다. 그리고 뮤지컬을 만들되 극중 인물이 춤추고 노래하는 대신 영화 전체가 음악에 맞춰 가무를 펼치는 뮤지컬을 연출하고 싶다는 공상을 한다. 카 체이스 액션이 영화의 운동이 될 것이고 주인공의 주된 행위는 음악듣기와 운전이다. <톰과 제리> 같은 애니메이션이 보여주는 미키마우징의 심화 버전이라고 해도 좋다. 이 신통한 영화가 성립하려면 액션과 사운드트랙의 리듬을 일치시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물의 동선과 배경의 블로킹도 일일이 통제돼야 하고 당연히 음악과 영상을 결합하는 작업 순서가 통상 영화의 역순이 될 터다. <베이비 드라이버>는 그 어려운 일을 해낸 영화다. 비싼 과학상자를 손에 넣은 영재처럼 신나서 어쩔 줄 모르는 에드거 라이트 감독의 흥이 스크린을 넘어 전해진다.

자연히 <베이비 드라이버>는 인물의 결보다 영화의 결이 개성을 담보하는 영화다. 모든 캐릭터는 장르의 주형이 정한 대로 행동한다. 사랑스런 웨이트리스(릴리 제임스)는 두번 만남 후에 영원을 약속하고 닥터(케빈 스페이시)는 합리적 이유 없이 베이비를 ‘마지막 한건’에 굳이 끌어넣는다. 그럼 베이비는 누구인가? 차선은 그에게 아스팔트에 묻은 페인트일 뿐이고, 주차 따위를 하기 위해 브레이크를 밟는 일 따위 그의 사전에 없다. 동료와의 대화를 불편해하고 운전 실력과 음악으로 언어를 대신하며, 훤칠하고 뽀얀 상한 곳 없는 외양은 범죄자 무리 가운데 동떨어져 있다. 집에서 상을 차릴 때, 차를 버리고 도보로 도주할 때 보면 베이비의 피지컬은 거의 이상화돼 있다. 앤설 엘고트의 얼굴에 덧그려진 가느다란 흉터는 이 인물의 깨끗함을 강조할 뿐이다. 한편 동료들에게 음악은 일 끝나고 듣는 것인 반면 베이비의 음악은 일과 완전히 포개지는 놀이다. <엑스맨>의 퀵실버를 상대적으로 사실적인 레벨로 데려다 놓은 히어로랄까. 얼핏 쿨한 요소를 임의로 종합한 영웅 같지만, 이 ‘신동’ 캐릭터에게서 에드거 라이트 감독 본인의 이미지를 발견하긴 어렵지 않다. 한 인터뷰에 따르면 21, 22살 무렵에 <BBC>의 연출자로 발탁된 라이트는 스탭과 캐스트의 막연한 적의에 직면했다고 한다(그가 중도하차한다는 잘못된 정보가 퍼진 날, 제작진 일부가 기쁨의 회식을 했다고 한다). 새파랗게 젊고 재능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반감을 산 모양이다. “차라리 연줄 낙하산이었으면 적의가 덜하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봤다”라는 것이 감독의 회상이다. 젊은 라이트는 같이 일하게 된 유명인들에게 내심 열광했지만 그의 세대차 나는 농담은 종종 썰렁한 반응을 얻었다고도 한다. <베이비 드라이버>에서도 배츠(제이미 폭스)가 베이비를 못마땅해하는 이유는 이 유능한 애송이가 범죄 세계와 자기는 무관하다는 순진한 얼굴로 “좋아서 하는 일, 빚만 갚으면 될 일”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배츠와 반대로 기획자 역할의 닥터가 위험을 무릅쓰고 베이비에게 집착하는 이유도 정확히 똑같을지 모른다. 순수의 시대는 그러나 오래가지 못한다. <베이비 드라이버>의 서사는 티없는 완벽함에서 진창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처음 목격하는 첫 번째 은행강도는 완전무결하게 성공하고 두 번째 신용금고 털이는 몇번의 오작동이 있고 세 번째 우체국 강도는 질척이는 나락으로 비화된다. 그러나 제2장에서 3장으로 넘어가는 코너에서 각본의 기어변속은 매끄럽지 않다. 별안간 화기를 업그레이드한다고 무기상에게 팀을 보내는 닥터의 지시를 시작으로 약 30분간 극중 인물들이 내리는 결정은 대다수가 납득하기 어렵다. 부질없는 고집, 맥락 없는 변심이 이어진다. 무엇보다 유혈을 반사적으로 거부해온 베이비의 핵심적 개성이 휴짓조각이 돼버린다. 서사의 개연성을 논할 종류의 영화가 아니라는 반박이 가능할 것이다. 맞다. 나의 몰입이 깨진 까닭은 비논리성이라기보다 그것으로 인한 이 ‘뮤지컬’이 지켜온 리듬의 난조였다.

<아이 캔 스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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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치

영어 공부 열기를 접할 때마다, 그런데 다들 영어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걸까 궁금해지곤 한다. 상대가 누구건 일단 대화가 시작되면 중요한 것은 발음이나 유창함이 아니라 내용이기 때문이다. 확고하고 간절하게 말하고자 하는 바를 품은 <아이 캔 스피크>의 옥분(나문희)은 미국 의회 단상에 서기 오래전부터 훌륭한 스피커다. 코미디와 뿌리 깊은 슬픔을 동시에 다루는 <아이 캔 스피크>가 궤도를 탈선하지 않는 힘은 옥분에게 주어진 심지 굳은 대사들에서 나온다. 평생의 침묵을 깨고 공개증언을 결심한 옥분이 죽은 모친의 묘를 찾아가 건네는 말들은 정당하고 당당하다. 옥분은 피해자인 딸과 누이를, 아들자식의 앞길을 막는 수치로 여겼던 부모에게 항변하고, 죽은 혈육보다 삶을 부축해준 친구가, 친구보다 나의 자존이 중요하다고 못박는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이 독백에 미안하다는 말을 섞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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