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30살이 되는 수련(보아)은 마을 사람들이 모두 친척인 작은 마을의 우체국 직원이다. 그들은 사당을 모시고 가문을 중시한다. 그녀 또한 이곳 생활에 순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아버지 제사를 낮에 지내는 일탈을 한다. 13촌 조카 준(이학주)은 그녀와 함께 이 마을을 떠나려고 돈을 모은다. 영화의 초반 수련은 마술을 부린다. 손짓으로 가로등을 켰다 끄고 잠깐 시간을 멈춘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준을 따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수련이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고 난 후 다시 원래대로 시간을 돌려놓는다. 하지만 그 이후의 시간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거의 흘러가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이 멈춰버린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그 공간 속에 있는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결을 느낄 수가 없다. 수련이 왜 자신을 10년 동안 좋아하는 준을 멀리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화의 후반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녀의 아버지가 생전에 했던 것처럼 버려진 물건들(계란판에 과꽃을 그리고 철가방을 우체통으로 변신시킴)에 생명을 불어넣는 그녀는 현실의 인물인가? 상상 속의 인물인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아버지와의 과거 장면들, 현재진행형인지 회상 장면인지 알 수 없는 준과의 만남의 장면들, 영화는 의문만 남겨놓은 채 흘러간다. 이 영화는 가을을 배경으로 찍은 한편의 ‘그림엽서’ 같은 영화다. 그림엽서에 생명을 불어넣으려면 그 장소에 추억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감독이 그 추억을 관객에게 알려주려는 노력이 부족하다면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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