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배우의 얼굴에 비친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2017-10-19
글 : 김소희 (영화평론가)
보여지기를 그만두고 스스로 보다

얼마 전 영화 <대장 부리바>(1962)를 보다가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의 전형성을 재인식했다.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하나의 대상으로 토니 커티스의 시선에 먼저 포착되고, 크리스틴 카우프만은 뒤늦게 그의 시선을 알아챈다. 남성이 발견하고 여성이 발견되는 관계의 익숙함은 그 순서를 뒤바꾸어 보기만 해도 분명히 드러난다. 존 버거가 <이미지>에서 남성은 보고, 여성은 보이는 자신을 본다고 통찰력 있게 지적한 대로 재현물에서 여성은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이는 존재로 등장하고는 했다. 자신이 시선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인식하고도 이를 모르는 척 연기해야 했던 배우 크리스틴 카우프만의 심리는 어떤 것이었을까. 늘 카메라의 시선을 인식해야 하는 배우의 상황과 다를 바 없기에 도리어 쉬웠을까. 로라 멀비의 논의를 참고해 서술하면 연기를 하는 순간 카우프만은 카메라의 시선과 서사상 다른 배우의 시선, 그리고 관객의 시선이라는 상상적 시선까지 어림잡아도 삼중의 시선 아래 놓인다. 물론 카메라와 관객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것은 성별을 떠나 모든 배우가 처한 상황일 터다. 그러나 남성배우에게는 서사상으로는 시선의 주인이 될 기회가 자주 주어진다면 여성배우는 서사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시선에 포획될 수밖에 없다는 점은 분명한 차이다. 어느 쪽이 더 어려운가 하는 질문은 가당치 않고, 이 글의 주제도 아니다. 다만 영화와 삶이 상호모방 관계인 것을 고려한다면 남녀가 어떤 방식으로 재현되는가는 실제 남녀의 성별 관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시선으로부터 벗어나기

방식이 좀더 세련됐을지언정 이러한 시선의 법칙은 요즘 영화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그런데 문소리 감독의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2017)는 이런 시선의 구도가 여배우의 실제 삶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배우는 오늘도>가 보여주는 건 오직 연기하지 않을 때의 배우의 삶이다. 관객은 주목받는 배우의 삶의 이면 대신 소소한 일상사를 견디는 직업인으로서의 배우의 모습을 마주하게 된다. 친구들과 산행하는 모습이 담긴 1막 에피소드부터 영화는 ‘여배우’라는 제목에서 기대되는 것들을 박살낸다. 이재용 감독의 <여배우들>(2009) 역시 연기하지 않을 때의 배우를 보여줬으나 그것은 셀러브리티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채였다. 영화의 타이틀에서부터 ‘여배우’를 콕 집어 강조하지 않았다면 관객은 영화가 여배우의 삶을 보여주는 데만 집중되지 않았음을 더 쉽게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목이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이었대도 영화가 보여주는 상황과 유리되지 않는다.

배우로서의 주인공을 드러내는 거의 유일한 표식은 그녀가 커다란 승합차 뒷좌석에 앉아 있다는 것 정도다. 3막으로 이어진 영화의 출발 지점은 늘 이 승합차다. 그러나 승합차는 본래의 목적인 스케줄을 위한 운송수단이기보다는 그녀의 몸을 숨길 만큼 거대한 선글라스처럼 보인다. 그 속에서 소리(문소리)는 곤란한 전화를 받거나 분풀이를 한다. 그녀가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보다는 시선을 차단하는 선글라스를 애용한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시선과 관련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총 3막으로 분절된 이야기 속에서 주인공 소리가 공유하는 특징은 그녀가 누군가의 눈에 띄는 것을 극도로 꺼린다는 점이다. 선글라스는 단지 연예인을 상징하는 클리셰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 시선의 대상인 여배우(여자이자 배우)라는 틀로부터 도피하고 싶어 함을 드러낸다. 3막 내내 소리는 회피하고 싶은 순간을 마주한다. 1막 ‘여배우’에서 소리는 자신을 ‘여배우’라는 대명사로 치환하려는 시선을 마주해야 했고, 2막 ‘여배우는 오늘도’에서는 피치 못할 사정으로 공공화장실에서 화장을 지우다가 타인의 시선을 느끼고는 급한대로 선글라스로 자신을 가린다. 3막 ‘최고의 감독’에서 소리는 한 독립영화 감독의 장례식 조문을 앞두고 혹시 있을 취재진에 대비해 선글라스를 쓴다. 선글라스를 쓰는 행위는 수동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당신의 시선을 원치 않는다는 적극적인 발언이기도 하다. 또한, 타인의 시선을 가리기 위해 자신의 시선을 감춘다는 점에서 시선의 상호성을 인식하게 하는 도구이다. 그렇게 볼 때 전체 중 1막이 두드러지는 이유는 선글라스로 가리지 않은 그녀의 리얼한 반응으로서의 표정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삶은 충분히 괜찮은가

1막에서 소리는 친구들과 산행을 하다가 친분이 있는 제작사 대표와 그 일행을 만나고 이후 술자리에서 원치 않는 동석을 하게 된다. ‘여배우와 함께 술을 다 먹어보고’를 남발하는 주사를 견딜 수 있었던 건 대사 한마디 없이 이들에게 대응하는 소리의 리얼한 얼굴숏 때문이었다. 카메라는 줄곧 일행의 모습과 소리의 얼굴을 오즈식으로 분리해서 담는다. 후에 오버숄더숏이나 전체숏이 등장하지만 반응숏에서 소리는 마치 일행과 떨어져 다른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다른 배우들에 비해 문소리의 얼굴만 유독 부드럽게 빛나 보였다는 것 역시 소리가 이들과 다른 공간에 존재한다는 느낌을 강화한다. 이러한 숏을 다소 과장되게 해석하면 연출가이자 배우로서의 문소리를 표현하는 장치라 하겠다. 이때 문소리는 영화 내부의 연기자로 존재하는 동시에 그 자리를 벗어난 연출자 혹은 관객의 자리에서 표정으로 논평한다.

연출자이자 배우로서 동시에 존재하는 문소리를 보면서 여성과 영화 제작의 관계를 논한 캐롤라인 베인브리지의 글을 떠올렸다. 남아의 성장이 어머니와의 절연을 의미한다면 여아의 성장은 어머니와의 절연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뤼스 이리가라이의 논의를 영화라는 매체와 제작 차원에서 논한 글에서, 그녀는 여성의 신체와 영화 매체의 장치적 친연성을 내다본다. 논의를 앞서 논한 시선의 차원으로 조금 변경해보자면 <여배우는 오늘도>의 문소리가 그랬듯, 여성은 영화 안팎을 분리시키지 않고도 오갈 수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이미 배우인 동시에 연출자라고 고쳐보고 싶다. 그러나 문소리는 3막에서 자신을 감독의 자리에 위치시키는 대신에 관객의 자리에 앉는다. 장례식장 쪽방에서 영사되는 작품은 문소리의 것이 아닌 세상을 떠난 감독의 것이다. 가족의 일상을 담았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느낌을 주지 못한 영상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그 영상을 만든 사람이 지금 막 세상을 떠났으며, 조문객이 거의 없는 잊힌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사실이다. 무엇보다 남겨진 아들과 생전 그와 인연을 맺었던 배우가 이 영상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 영상의 의미를 만든다.

결국 이 장면은 영화가 의미를 가지려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는 명확한 사실을 인식시킨다. 어쩌면 그것이 영화에서 빠져나온 현실의 문소리가 지칠 정도로 관객과의 대화 행보를 이어가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많은 이들이 지적하듯 관객과의 대화 시간은 영화에서 생략된 4막이다. 소년과 나란히 앉은 문소리의 얼굴에 비친 영상은 죽은 아버지의 기억을 오랫동안 짊어지고 살아야 하는 소년처럼 이제는 떠나보내고 싶은 과거의 영화를 오랫동안 얼굴 위에 짊어져야 하는 배우 문소리의 현재를 보여주는 것 같다. 1막에서 문소리는 매니저에게 “내가 예뻐, 안 예뻐?”라고 다그쳐 묻는데, 그 대답은 3막에서 아버지의 말을 대신 전하는 소년의 발언을 통해 긍정된다. 소리의 얼굴에 영사된 빛이 일상의 모습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소리의 눈물은 2막 내내 불화를 겪던 일상과 배우가 비로소 화해하는 듯한 느낌을 줬다. 그와 동시에 배우의 얼굴에 비친 영상은 ‘문소리는 예쁜가’라는 질문을 넘어 일상을 긍정할 수 있는가를 반문하는 것으로 읽힌다. 나의 일상은 충분히 예쁜 것일까. 그 순간 영화는 비로소 배우의 삶을 재현하기를 그치고 관객에게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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