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남한산성>이 원작에서 취한 것, 혹은 배제한 것
2017-10-2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근래의 역사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미학적 성취

<남한산성>은 그 시작과 함께 병자호란의 역사적 맥락에 관한 묘사를 최소화한 채 ‘오로지 살고자 하는’ 왕과 신하의 얼굴을 관객에게 들이민다. 한마디로, 거두절미의 서사.

속수무책의 무의미함

우리는 무방비 상태로 남한산성이라는 낯선 세상에 툭 하니 던져진 왕과 신하를 마주해야 한다. 최명길(이병헌)과 김상헌(김윤석), 그리고 이시백(박희순)을 제외한 왕과 신하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심지어 자신들이 어떤 세상에 던져졌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발 딛고 서 있는 세상과 그 세상에 대한 인식간의 괴리. 그러니 그들의 말이 허공을 맴돌 수밖에 없다. 겉도는 말이 넘쳐날 때 세상은 무의미해진다. 한마디로 남한산성은 ‘세상이 무의미해진 공간’이다.

<남한산성>은 이 무의미한 세상의 결과를 민초들의 고통과 이유 없는 죽음으로 표현한다. 병자호란에서 가장 큰 전투였던 ‘북문전투’는 이 무의미함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황동혁 감독이 북문전투를 통해 그리려는 것은 전쟁의 스펙터클이 아니라 ‘아무 이유 없이’ 시체가 되어야 했던 민초들의 처참한 광경이다. 그들은 신념이나 대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그곳에 차출되었기 때문에 죽는다. 시체로 널브러진 민초들의 모습을 훑는 카메라의 시선은 황동혁이 이들의 죽음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북문전투는 전쟁이 아니라 ‘학살’이고 ‘살육’이다. 그들의 몸을 베는 것은 청군의 칼이지만,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것이 없는’ 이 세상의 이치다. 이 잔혹한 먹이사슬에 걸려든 이들은 ‘속수무책의 삶’ 속으로 던져진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것만이 미덕이 되어버린 무의미한 세계. 그것은 남한산성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실세계를 지배하는 제1원칙이다. 그러한 삶 앞에서는 치욕과 굴욕의 신음마저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마에 흙먼지를 묻혔던 인조의 삶이 그러했듯이.

무력한 시선, 무력한 관객

황동혁은 북문전투의 패배 이후에 김류(송영창)가 홀로 술을 삼켰다는 원작의 내용을 삭제한다. 김류는 원작에 비해 더 비열한 인물로 희극화되었는데, 그럼으로써 관객은 마음껏 욕할 수 있는 인물을 얻었고, 그 대신 영화는 끝까지 냉정함을 견지했던 원작의 미덕에서 한발 물러난다. 전투 이후 김류는 자신의 책임을 전가한 이시백의 부하를 참수한다. 부하의 목이 억울하게 잘려나갈 때조차 이시백이 할 수 있는 것은 ‘무력하게 바라보는 것’이 전부다. <남한산성>의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은 바로 이러한 ‘무력함’으로 가득하다. 물론 그것이 극에 달하는 장면은 인조가 칸에게 머리를 읊조리는 순간일 것이다. 이때 황동혁은 최명길의 시선을 빌려 이 무력한 역사를 곧이곧대로 응시할 것을 관객에게 요구한다. 최명길이 그러했듯, 굴욕과 비굴의 역사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 전부이다.

우리는 <남한산성>에서 최명길과 김상헌이 벌이는 말의 전쟁이 표면적으로는 왕을 향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관객을 향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이러한 연출은 칸의 등장 이후에 더 노골화된다. <라쇼몽>(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1950)의 카메라의 위치가 그러했던 것처럼, 왕의 자리에 위치한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대리하고 있음을 염두에 둔다면 말의 전쟁 속에 끊임없이 판단을 종용받는 왕의 입장은 관객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영화 <남한산성>은 원작에 비해 두 가지 갈림길 앞에서 고뇌하는 인조의 모습을 상당 부분 걷어낸 듯한 인상을 준다. 실제로 칸의 등장 이후에 격화되는 논쟁 속에서 인조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한다. 진퇴양난의 막다른 길 앞에서 무력하게 침묵하는 왕의 자리에서 그 해답을 고민해야 하는 것은 바로 관객의 몫이다. 어쩌면 황동혁에게 필요한 인조는 위기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이라는 서사적 역할보다는 관객을 대리하는 기능적 역할에 가깝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말 그대로 관객이 왕이어야 한다. 당신은 어떤 왕이 되어 어떠한 해답을 내놓을 것인가, 라는 질문. 당신은 “아껴서 먹이되 너무 아끼지는 마라”처럼 세상을 겉도는 무의미한 말과 다른 해답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는 질문.

김훈의 문체를 온몸으로 받아내기

<남한산성>의 성패는 최명길과 김상헌 사이에서 어떻게 무게중심을 유지하는가, 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청의 대군 앞에 홀로 나서 대화를 요구하는 최명길과 길잡이 노인에게 칼을 휘두르는 김상헌의 모습이 비교되는 영화의 도입 장면에서부터 두 인물의 무게중심이 최명길에게 기울어질 위험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김상헌은 끝까지 자신의 묵직한 무게를 유지하는 데 성공한다. 다소 이상적이고 무모한 인물처럼 묘사됨에도 불구하고 김상헌이 자신의 무게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최명길과 달리) 민초들의 소리에 적극적으로 귀기울이고 그들의 신음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이려는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일 것이다.

황동혁이 최명길과 김상헌의 대립을 묘사해가는 연출은 무척이나 섬세하다. 눈 오는 밤 처소에서 두 사람이 마주치는 장면 등에서 롱숏에 서정적 분위기를 담아내는 연출도 인상적이지만 <남한산성>의 백미는 두 인물의 얼굴과 얼굴이, 말과 말이 서로 부딪히는 클로즈업 장면들일 것이다. 황동혁은 말의 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동일한 구도의 클로즈업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연출함으로써 두 신하간의 무게중심이 어느 한쪽에 쏠리지 않도록 한다. 이미 황동혁은 클로즈업을 전면에 내세운 <도가니>(2011)로 성공을 거둔 적이 있지만 <도가니>의 클로즈업이 1.85:1의 넓은 화각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느낌을 주었던 반면에, <남한산성>은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밀도 높은 클로즈업을 선사한다.

무엇보다 이 클로즈업이 감탄스러운 까닭은 원작 <남한산성>이 영화로 옮겨질 때 ‘당연히’ 사장될 것으로 여겼던 김훈 특유의 문체가 그 이상의 힘으로 살아 숨쉬고 있기 때문이다. 최명길과 김상헌이 설전을 벌일 때마다, 이병헌과 김윤석이 대결하는 대상은 상대 연기자가 아니라 이 시대 최고의 문장가라 불려도 아깝지 않을 김훈의 문체가 아니었을까? 두 연기자는 돌산처럼 무겁게 몸을 낮춰 김훈의 건조하면서도 거침없는 문체를 온몸으로 받아낸 뒤 각자의 말투와 표정으로 그것을 번역한다. 두 배우의 얼굴이 리듬감 있게 교차할 때마다 칼과 칼이 맞부딪히는 이상의 긴장감이 느껴졌다면 이는 두 배우의 번역이 성공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남한산성>에는 김훈의 문체가 이병헌과 김윤석이라는 배우를 만날 때, 또는 소설의 세계와 영화의 세계가 부딪힐 때 빚어질 수 있는 기품으로 가득하고, 그것이 근래의 역사영화에서 만나기 힘든 미학적 성취로 이어진다.

역사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기

황동혁은 김훈 소설 특유의 문체의 맛을 배우의 힘을 빌려 영화적으로 되살리려 하지만, 그의 소설을 휘감고 도는 ‘역사적 허무주의’마저 뒤따를 생각은 없는 듯하다. 원작과 소설이 가장 극적으로 갈리는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김훈의 <남한산성>은 삶의 가치보다는 ‘먹고사는 것’이 삶의 전부인 세계다. 그래서 어쨌든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남한산성>에서 말(馬)과 가마니를 사이에 둔 사대부와 민초들의 대립 대부분이 먹고, 입고, 자고 등의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된 것들이다. 소설의 ‘하는 말’에서 김훈이 이야기한 것처럼, 그가 고통받는 자의 편임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가 이야기하는 고통은 ‘먹고사는 것’과 관련된 것 이상이 아니며, 이때 인간은 ‘동물적 생존’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귀결되고 만다.

하지만 황동혁의 <남한산성>이 최명길과 김상헌의 설전을 중심으로 각색될 때 김훈의 역사적 허무주의는 어쩔 수 없이 옅어진다. 왜냐하면 영화의 두 인물이 더 치열하게 대립하고 논쟁할 때마다 이들의 신념과 대의가 더 간절하고 절실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두 인물이 주장하는 내용이 아니라 ‘절실하고 간절하게 싸운다’는 사실 자체에 있다. 그것이 삶의 가치와 의미가 사라진 허무주의에서 역사를 건져낸다. 그러니까 두 사람의 논쟁은 또 다른 한편으로 (김훈의 문체뿐만 아니라) ‘역사적 허무주의’와 싸운다. 어쩌면 우리는 두 사람의 태도 덕분에 ‘남한산성의 무의미한 세계’를 견딜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간단히 말해, 남한산성의 굴욕과 비참에도 불구하고 단지 먹고살 수 있게 되어 안도하는가 아니면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최명길과 김상헌 같은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에 위로 받는가?

물론 이러한 효과가 소설을 영화적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자연발생한 것인지, 황동혁이 직접적으로 의도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원작과 역사적 사실에서 벗어나 김상헌의 삶을 자살로 끝맺는 서사적 선택은 황동혁이 어떠한 방식으로든 역사적 허무주의에서 벗어나려 했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김상헌은 자살 이전에 최명길과 나누는 대화에서 ‘새로운 삶의 길은 모든 낡은 것들이 사라졌을 때 열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원작에 없는 이 대사가 최명길이 아닌 김상헌에게 돌아간 이유는 그 속에 내재한 ‘이상주의적 가치’가 김상헌에게 더 어울리기 때문일 것이다. 의심의 대상이 되어버린 낡은 것의 퇴장을 알리는 김상헌의 자살은 일종의 ‘윤리적 행위’다. 김상헌은 과거의 가치에 매달리는 보수주의자이자, 세상의 기존 질서를 ‘아니오’, 라고 부정하는 윤리적 이상주의자이며, 또한 자신의 신념을 행위로서 완성하는 실천가이기도 하다. <남한산성>이 최명길과 김상헌의 팽팽한 대립을 기초로 한다 해도, ‘남한산성의 시대’에도 (동물적 생존 그 이상의)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인물은 김상헌이다.

물론 우리는 낡은 것의 퇴장 이후 어떠한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김상헌도, 최명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황동혁은 남한산성을 짓누르던 잿빛 하늘을 걷어내고 어느 봄날의 서날쇠(고수)와 나루의 평화로운 모습을 덧입힌다. 김상헌의 자살 이후 구성된 신의 배열을 보면, 황동혁은 다소 목가적인 유토피아로 그려진 이 민초들의 삶을 지배층의 삶과 구별되는 새로운 세상처럼 느끼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서사적 귀결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이러한 결말에 대해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리고 그 질문은 낡은 것의 퇴장과 새로운 세상을 말하며 김상헌의 결단을 이끌어냈던 <남한산성>이 지배층과 민초의 삶을 이분화하는 낡은 상투적 결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새로운 세상을 이야기할 때 상상의 빈곤을 마주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 오해는 말라. 나는 황동혁의 상상력을 두고 빈곤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상이 가로막히는 (또는 억압되는) 이 지점에, 새로운 세상에 대한 상상이 봉쇄되는 바로 그곳에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세계의 리얼리티’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상상이 이내 앙상해지는 한계 지점. 그것이 우리가 처한 리얼리티의 실체가 아닐까?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처럼, “위기는 낡은 것이 사라졌는데도 새로운 것은 생겨나지 못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또 다른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이 왕의 자리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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