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터/액트리스]
<유리정원> 문근영, “감독과 나의 언어의 장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2017-10-31
글 : 김현수

신수원 감독과 배우 문근영의 만남이 예사롭지 않다. <명왕성>(2012), <마돈나>(2014) 등을 연출하며 소외된 계층과 그들을 내친 자본주의사회의 어두운 면모를 담아냈던 신수원 감독은 <유리정원>을 통해서 조금은 색다른 변화를 꾀했다. 역시 사회로부터 소외받는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미스터리와 판타지를 오가는 이른바 신수원식 ‘리얼 판타지’를 선택한 것. 한때는 앳된 외모로 국민 여동생이라 불리던 문근영이 배우로서의 성숙한 모습, 혹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선택한 <유리정원>은 감독과 배우 모두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문근영이 연기하는 주인공 재연은 오직 연구밖에 모르는, 선천적인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과학도. 전혀 튀지 않는 평범한 차림새와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에 가까운 무뚝뚝함이 항시 묻어나는 재연이라는 옷을 선택한 문근영의 속뜻이 궁금해졌다. 오랜만의 주연작이지만 그래서 더욱 도전적으로 보이는 영화 <유리정원>을 통해서 문근영은 과연 어떤 새로운 모습을 보여줄까. 잔인하게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리는 인물이 보여주는 기괴한 파괴의 에너지는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고 믿었던 배우 문근영의 이미지를 배반할지 모른다. 판단은 언제나 관객의 몫이겠지만 어쨌거나 이전과는 다른 배우 문근영의 귀환은 참으로 반갑다.

-신작 <유리정원>은 <사랑따윈 필요없어> 이후 거의 11년만의 주연작이다.

=<유리정원>을 준비하던 때를 돌아보면, 오랜만에 복귀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고 작업했다. 그 이전까지도 계속 끌리는 영화를 찾고 있던 중이었으니까. 마침 <유리정원>의 시나리오를 읽고는 너무 아름답고 슬픈 소설책 한권을 읽은 느낌이 들었다. 극중 재연이란 캐릭터에 감정 이입되어 나중에는 내 마음도 아파오더라. 그녀를 잘 이해해보고 싶고 또 표현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감독님을 만났는데 이 역할을 맡지 말아야 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신수원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나눴기에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나.

=감독님과 첫 만남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고민하다가 먼저 <마돈나>를 보고 느낀 점을 말씀 드렸더니 “어? 그런 걸 알아봤어? 그런 면을 보는 사람 별로 없는데?”라며 반가워하셨다. 그날의 미팅 자체가 너무 재미있어서 마법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신수원 감독은 <유리정원>이 다루는 소재나 장르에 있어서 “이 영화는 도전이었다”고 표현할 만큼 상업적으로 위험부담을 느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는데 선택하는 데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

=감독님의 영화가 지닌 약간 차가운 시선이랄까, 잔인한 듯한 화면 묘사와 흔히 관심을 갖지 않을 법한 어두운 면모를 건드리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 그런데 나는 그 기저에 따뜻한 정서를 지니고 있다고 느꼈다. 사회에서 도태된 루저 같은 사람들을 다소 잔인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보여주긴 하지만 그들을 따뜻하게 포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처음엔 내가 감독님의 영화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건가 의아했는데 감독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우리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신수원 감독은 교사 시절, 무명작가로 소설을 썼던 경험을 영화에 반영해보고자 재연의 상대역인 소설가 지훈(김태훈)의 캐릭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대학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한 것도 <유리정원> 출연을 결정하는 데 영향이 있었나.

=직접 글을 쓴 적은 없지만 감독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감독님이 나에게 “우리는 언어의 장이 비슷하다”라고 하시더라. 사람마다 쓰는 말의 범주가 어느 정도는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우리는 자주 쓰는 말을 주로 꺼내 쓴다. 그것은 가치관, 감수성, 세계관일수도 있는데 감독님과 처음 만난 자리에서 언어의 장이 닮아 있다고 느꼈다. 소설 자체보다는 그런 면에서 더 끌렸던 것 같다.

-<유리정원>은 소재와 배경에서 나무와 숲이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광주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는 동안 산과 들에서 도시의 아이들이 접하지 못하는 많은 경험을 한 것으로 아는데 자신의 경험이 자연스럽게 이 영화에 이끌리게 된 배경이 됐나.

=많은 매체와 인터뷰하면서 나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촬영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극중 재연이 나무와 대화를 하는 모습을 이해하고 연기하는 데 유년 시절의 기억이 분명히 영향이 있었던 것 같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으니까. 엄마가 나를 데리고 숲에도 많이 다녔고, 산에 올라가 나무 앞에서 노래도 부르고 자연과 대화하듯 살았다. 그래서인지 소속사 이름도 나무엑터스이고 미술을 담당한 업체명이 나무워크샵이라는 우연도 신기할 따름이다. (웃음)

-재연은 장애를 안고 살아가는 여성이다. 연구 성과도 동료에게 뺏기고 유일하게 믿고 의지하던 정 교수(서태화)로부터도 배신당하면서 마음 둘 곳을 잃고 슬퍼한다. 결국 유리정원으로 들어가 홀로 연구를 시작하는데 사교성도 없고 내성적인 데다 외형적으로 예쁘게 꾸미지 않아 사회로부터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

=나는 재연의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굉장히 직선적인 사랑의 방식, 삶의 태도가 나와 같은 듯 다른 지점을 지니고 있어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관객에게 재연의 섬세한 감정 변화를 자연스럽게 이해시킬 수 있도록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꾸미지 않고 노메이크업으로 등장하면서 예쁘지 않게 화면에 잡히는 내 모습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감독님이 내게 이전과는 다른 이미지를 찾아보자고 해서 헤어스타일을 달리 설정한 것 외에는 오직 감정에 충실하려고 했다. 그리고 감독님이 메마른 나무 같은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기에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고는 바로 다이어트에 돌입했다. (웃음)

-그렇게 도태된 재연이 유리정원에 들어가면서부터 영화는 현실과 판타지 사이를 오가게 된다. 상업적으로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소재나 장르의 영화가 아닌 데다가 신수원 감독이 항상 주목하는 관심사 역시 사회의 어두운 면모였기에 재연을 연기하는 데 부담감은 없었나.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의 출연을 포기하면 안 되는거다. 그런 이유 때문에 영화를 안 만들면 안 되는 것처럼.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 하고 보여줘야 하는 이유가 있듯, 유리정원의 재연을 포기해버린다면 후회할 것 같았다.

-재연은 자신이 한때 사랑했던 정 교수가 “다른 사람과 똑같이 나를 쳐다보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고 이야기한다. 재연의 아픔을 보여주는 대사였다. 배우로서 문근영에게는 세상의 어떤 시선이 가장 견디기 어려운가.

=어느 누구를 만나도 상대는 날 알고 있다는 두려움. 그리고 그 상대가 진짜 내가 아니라 매스컴에 비친 내 모습으로 나를 추측하거나 편견을 갖고 바라볼 때 가장 두려웠다. 그래서 나는 재연이 정 교수에게 마음을 줬던 이유를 더 잘 알 수 있었다. 극중 대사에 따르면 다리를 저는 장애를 가진 재연에게 있어서 정 교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발걸음을 맞춰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할 이유가 충분했다. 그녀가 평생 너무나 많은 상처와 포기 속에서 살았지만 상대에게 거의 유일하게 바랐던 게 발걸음 맞춰주기였을 것이다. 내가 이번에도 상처받을 걸 알지만 그 많은 걸 포기하고 감수하더라도 내 온 마음을 다 주기로 했을 때의 그 마음, 알 것 같다. “당신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눈으로 쳐다봤을 때 너무 슬펐다”라는 대사는, 바꿔 말하면 재연에게 그만큼은 다른 사람들과 똑같지 않게 봐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배신감도 크게 다가왔음을 의미한다.

-드라마 <바람의 화원>에서 신윤복을 연기할 때 작가가 “깊은 눈을 가졌다”는 표현을 썼던 것으로 안다. 신수원 감독도 첫 만남에서 “눈동자에 끌렸다”고 이야기했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눈에 대해 칭찬을 하니까 나도 내 눈이 좋은 것 같고 좋아지는 것 같다. (웃음) 어릴 때부터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고 나 역시 사람을 만날 때 눈을 중요하게 바라본다. 말이나 행동은 감춰도 눈빛은 못 감춘다는 말을 믿는다. 그래서 나도 좋은 눈빛과 마음을 가지려고 애쓰는 것 같다.

-<유리정원>의 재연을 연기하면서 목소리 톤도 변화를 준 것 같다. 굉장히 허스키한 목소리로 대사를 한다.

=이번에는 중저음의 톤으로 이야기하려고 했다. 감독님도 그런 톤에서 연기하길 원했다. 내가 평소 있는 그대로의 목소리를 내면 약간 하이톤인데 목소리 때문에 더 어려 보이기도 한다.

-동안 외모, 혹은 국민 여동생이라는 수식이 늘 따라붙는 것에 대한 압박감 같은 걸 느끼나. 그래서 더욱 외형적으로 변화를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자주 연기하는 것은 아닌가.

=압박감이라기보다는 이제는 극복해야 하는 문제가 된 것 같다. 그런데 어려 보인다는 말로 스트레스받을 만큼, 혹은 연기를 하는 데 지장을 줄 만큼 크게 느끼지는 않는다. 연기하면서 계속 염두에 두고 신경 쓰는 정도다.

-영화보다 드라마와 연극 활동에 집중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꾸준히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필모그래피를 만들어갈 수도 있었을 텐데.

=딱히 이유는 없었다. 내게 들어오는 시나리오가 많지 않았고 실제로 드라마를 하면 드라마만 하게 된다. 왜냐하면 드라마 스케줄을 맞추게 되다 보니까 이상하게 드라마 대본만 들어오더라. 그러고 싶지는 않았는데, 둘 다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이제 영화를 시작했으니 영화만 할 수 있겠지? (웃음)

-지난 인터뷰에서 스무살이 되던 시기에는 작품 활동 없이 조용하게 보냈다고 이야기한 적 있다. 서른살이 되던 해에는 어떤 고민을 하며 지냈는지 궁금하다.

=좀더 연기에 집중하고자 했다. 20대 때와 비교해보면 배우로서의 고민이 다른 고민보다 더 앞섰다. 앞으로 나는 어떤 배우가 될까. 어떤 연기를 할 수 있을까. 대학 생활을 하면서도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나는 그동안 늘 나를 보여주고 누군가에게 평가를 받고 비평을 듣는 입장이었는데 학교에서는 반대로 내가 다른 이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비평하고 심지어 여러 관점에서 작품을 살펴보게 됐다. 그 이전에 내가 알고 있었던 세상이 참 좁게 느껴졌다.

-10년 전 영화계와 지금의 영화계는 굉장히 많이 달려졌다. 배우의 인권 문제를 비롯해 최근에는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 신수원 감독도 사회적인 메시지를 꾸준히 담아내는 영화를 만들고 있다. <유리정원>에 참여하면서 이런 변화의 물결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도 궁금하다.

=과거와 달리 문제제기가 가능하고 또 그래야 하는 변화의 분위기를 나 역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매우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 생각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다.

<유리정원>

재연은 믿었던 모든 것으로부터 철저하게 배신당한 뒤 자신만의 비밀 연구 공간인 ‘그린하우스’에 들어간다. 세상과 단절된 채 아무도 인정하지 않는 ‘인간의 광합성’ 연구를 하겠다던 그녀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게 된다. 그 순간에 그녀가 “손이 참 따뜻하군요”라며 읊조리듯 내뱉는 대사와 목소리, 표정 3박자가 어우러지는 순간은 오직 배우 문근영의 눈빛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장면이다. 영화 내내 한없이 착하지만 어떨 때는 지독하리만치 파괴적인 면모를 보여왔던 그녀의 최후는 신수원 감독이 몰래 숨겨둔 세상을 향한 위로의 색다른 표현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배우 문근영의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눈동자다.

영화 2017 <유리정원> 2015 <사도> 2006 <사랑따윈 필요없어> 2005 <댄서의 순정> 2004 <어린 신부> 2003 <장화, 홍련> 2002 <연애소설> 1999 <길 위에서> 드라마 2015 <마을: 아치아라의 비밀> 2013 <불의 여신 정이> 2012 <청담동 앨리스> 2010 <매리는 외박중> 2010 <신데렐라 언니> 2008 <바람의 화원> 2000 <가을동화> 1999 <누룽지 선생과 감자 일곱 개>

사진 나무엑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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