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침묵> 정지우 감독, "침묵은 참회와 반성의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
2017-11-02
글 : 장영엽 (편집장)
사진 : 최성열

정지우 감독은 최근 고민에 빠졌다. “‘절름발이가 범인이다!’라고 외칠 순 없는 거잖나. 어떻게 하면 영화를 기꺼이 봐줄 의사가 있는 사람에게도 피해를 안 입히면서, 이 영화가 사실은 이런 작품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까? (웃음)” 크고 작은 반전이 러닝타임 내내 포진해 있는 <침묵>은 스포일러를 하지 않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려운 작품이다. 정지우 감독은 러닝타임 한 시간가량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운명에 대해 안타까워 하면서도 이 영화를 통해 새롭게 맞이하는 이러한 경험을 흥미로워했다. 영화 <침묵>은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법정 장르의 공식을 취하고 있지만, 살해된 약혼녀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딸 사이에서 부서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는 한 남자의 멜로드라마이기도 하다. 장르적 새로움과 여전한 감수성으로 무장한 정지우 감독의 신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유럽에서 난민 신청을 하는 탈북자를 소재로 한 <로기완>을 차기작으로 준비하다가 <침묵>을 선택한 이유는.

=<로기완>을 제대로 만들려면 어마어마한 시간을 써야 할 것 같았다. 베를린에서 3년쯤은 살아야겠더라. 그러지 않으면 거짓말할 것 같은데, 이걸 어떻게 하나 고민하다가 제작자인 용필름의 임승용 대표에게 <로기완>이 아닌 다른 프로젝트를 해보자는 제안을 했다. 임승용 대표가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고 <침묵>도 그중 하나였다. 이 작품의 원작 영화인 <침묵의 목격자>(2013)를 본 것도 그즈음이다.

-원작으로부터 어떤 매력을 느꼈나.

=우리는 누군가의 증언은 얼마든지 거짓말일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녹음과 영상, 사진에 대한 믿음은 굉장히 크다. 이러한 사람들의 태도가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롭게 느껴졌다.

-<침묵의 목격자>는 약혼녀 살인사건의 진범을 가리는 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사, 약혼녀를 잃은 부유한 남자의 심리를 좇는다. <침묵>은 이보다도 태산(최민식)과 용의자로 몰린 그의 딸 미라(이수경), 살해당한 약혼녀 유나(이하늬)의 관계를 다루는 데 더 관심이 많아 보인다.

=결국 이 영화는 한 남자와 그가 사랑하는 여자, 딸 사이의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남자는 어떻게든 가족을 복원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 사람은 죽었고, 한 사람은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됐다. 회복될 수가 없는 가족인데, 그 불가능한 회복을 남자가 시도하는 과정에 대한 영화라고 생각했다.

-영화의 초반부, 이들의 첫만남이 인상적이다. 태산과 유나와 미라가 처음으로 만나는 자리에서, 태산이 뒤늦게 합석하자 유나는 미라의 손을 잡고 있다가 놓는다.

=그 대목을 눈여겨봐주길 바랐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유나에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인 게 분명해지는 순간인 거다. 그에 대해 아이가 더 예민한 반응을 하는 기분을 남겨놓고 싶었다.

-개인적인 질문이지만, 딸이 있나.

=아니. 아들만 있다.

-<침묵>은 딸과의 관계를 복원하려 하는 아버지의 이야기이기도 한데, 딸이라는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됐던 주변의 얘기가 있다면.

=구체적인 사건이라기보다는 둘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긴장에 대한 이야기를 참고한 것 같다. 미라를 연기한 이수경 배우가 이 느낌에 대해 굉장히 정확한 기분을 가지고 있더라.

-이수경 배우는 <용순>(2016)을 보고 캐스팅했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이전부터 이 배우를 알고 있었다. 손태겸 감독이 연출한 한국영화아카데미 졸업영화 <여름방학>(2012)에서 처음 봤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재능의 배우라고 생각했다. 현장에서 이수경 배우를 두고 최민식 선배와 그런 얘기를 했다. 이 친구는 어떻게 배우기도 전에 미리 알고 있을까. 이 세상과 관계와 인간에 대한 기분을. 그런데 정작 본인과 얘기해보면 어떤 의도에 의해 한 행동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야말로 직관과 본능의 배우다.

-이 영화에는 가족에 대한 기타노 다케시의 그 유명한 말이 나온다. “누가 보지만 않으면 갖다버리고 싶다”는.

=자녀가 있는 분들은 아마 모두 느끼시겠지만, 정말 어떤 사람도 꼼짝 못하게 되는 게 자식과의 관계인 것 같다. 살다보면 누구나 기타노 다케시가 말했던 것과 비슷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분만으로 사는 건 문제이겠지만. 자식과의 관계맺음에 어쩔 수 없어 하는, 쩔쩔매고 있는 나의 상황도 이 영화에 반영되어 있다고 느낀다.

-태산의 경우 원작 영화보다 연배가 있는 캐릭터로 묘사됐다. 최민식 배우가 필요했기 때문인가, 혹은 영화적인 필요 때문이었나.

=진심으로 나는 이 영화의 장르가 최민식이라고 말하고 싶다. 최민식 선배가 연기하는 캐릭터의 스펙트럼을 보면 한몸에 다 모으기 어려운 요소를 가지고 있다. 어떨 때는 무시무시한 범죄자 같고(<악마를 보았다>), 어떨 때는 서울시장(<특별시민>) 같다. <침묵>에서 태산이라는 캐릭터가 첫인상과 마지막 모습에 큰 간극이 있길 바랐기 때문에 최민식 선배 같은 배우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연출자에게 최민식이라는 배우는 무엇이든 다 뚫을 수 있는 창 같은 존재다. 말도 안되는 게 최민식 선배를 거치면 정말 가능해 보인다.

-이번 영화에서 특히 최민식 배우로 인해 가능했다고 생각되는 장면이 있다면.

=연출자로서 정말로 감탄한 장면은 태산이 법정에서 증언 선서를 하는 대목이다. 누구에게도 일어나라 말아라 소리를 듣지 못했던 사람이 억지로 일어나야 할 때의 짜증부터 시작해서 ‘읽으면 돼?’의 투로 선서를 하고, 다 읽고는 ‘됐냐’ 싶은 표정을 짓고. 그런 순간이야말로 이 인물이 어떻게 살아왔고 어떤 감정인지 짐작할 수 있는 재미있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태산이 하는 대부분의 말은 돈과 관련되어 있다. “돈 안드니 사과 두번 하겠다”는 식의 대사가 재밌더라.

=평소에 후배들에게 해주는 말이 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얘기를 시작한 사람들은 다음에 반드시 돈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나는 차라리 ‘이런 상황 때문에 자금 사정이 이러저러해요’라고 얘기하는 사람이 더 좋더라. 태산은 돈으로 풀 수 있는 관계가 많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산의 주변에는 돈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돈에 영향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결국 자기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휘말려 상대에게 속는다. 그런 인생의 아이러니가 나에게는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쩌면 임태산이야말로 훨씬 단순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성공의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유지해오는 것으로 일찍이 성공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의 규칙을 비난하면서도 은연중에 그 규칙에 휘둘리고 있다.

-태산이 요트를 타는 장면이 꽤 많이 등장한다. 한국영화에서 요트를 타고 한강을 가로지르는 장면은 보기 드물다. 원작 영화에도 없던 설정인데.

=우연히 보트를 산 친구와 함께 한강을 돌아본 적이 있다. 정말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한강의 한복판에서 배를 타고 서울을 보면, 오래 산 사람도 본 적 없는 이 도시의 새로운 뷰가 보인다. 그게 임태산이 배에서 보는 서울의 풍경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밤에 보트를 타는 장면을 꼭 찍고 싶었다. 강변북로, 올림픽대로에 퇴근하는 차량들로 꽉 막혀 있는 매직아워의 도심에서 보트는 굉장히 평화롭고 자유롭게 움직인다. 이것이야말로 서울에서의 경제적인 부가 뭔지를 보여주는 마스터숏이 될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밤시간에 촬영을 하려면 너무 많은 투자를 해야 해서 결국은 낮시간에 촬영했다. 스탭들도 처음에는 주저하다가 보트를 타고 한강을 한 바퀴 돌아보더니 설득되더라.

-변호사 희정(박신혜)과 검사 성식(박해준)은 원작과 가장 다르게 묘사되는 인물들이다. 원작이 유능하고 승소율 높은 두 엘리트의 대결을 다뤘다면, <침묵>에서는 각자의 자리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문제 해결이 쉽지만은 않은 인물들로 그려졌다.

=원작의 중심 인물이었던, 승소율이 대단히 높고 유능한 로펌의 변호사 같은 느낌은 너무 클리셰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두 인물 모두 금수저가 아니길 바랐다. 원작에서는 변호사와 검사가 사건의 중심에 놓인 인물로 문제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측면도 있었는데, 우리 영화의 방점은 멜로드라마적인 감정선에 있기 때문에 영화 전체의 운용을 위해 원작보다 훨씬 평범한 느낌의 인물이길 바랐다.

-희정은 사건의 진실을 좇는 사람이기도 하지만, 미라에게 가족 같은 느낌을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박신혜 배우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박신혜 배우가 가진 정서적 느낌이 이 인물과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연기를 시작했고, 세상에 대해서 또래보다 훨씬 더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는 배우다. 그런 뉘앙스가 영화에는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지만, 희정은 아주 평범하게 학창 시절을 보낸 사람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인물이길 바랐다. 그런 면에서 박신혜 배우가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사건의 결정적인 단서를 쥐고 있는 목격자 동명(류준열)이 스토커라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침묵>의 시나리오 작업을 하며 원작의 몇 가지 아이디어를 빼고 완전히 새롭게 이야기 구조를 설계했는데, 류준열 배우가 연기하는 동명을 제외하면 이 구조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그런 캐릭터이기에 굉장히 중요했던 인물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명은 이 영화에서 가장 순수한 인물이다. 거짓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편견 때문에 세상을 뒤틀어서 보지도 않는다. 하지만 자기 마음의 상태를 그대로 표출한다는 게 문제인 그런 사람인데, 류준열 배우가 아주 흔쾌하고 재밌게 연기해줬다.

-결국 이번 영화에서도 가장 중요한 관계는 두 여자와 한 남자의 삼각구도다. <해피엔드>(1999), <사랑니>(2005), <은교>(2012) 등의 전작을 보아도 당신의 영화에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인물들은 대개 삼각구도에 놓여 있다. 이 구도에 흥미를 느끼나.

=맞다. 삼각형 성애자인가 싶다. 삼각형이 주는 긴장이 관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데 굉장히 효율적인 구조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번 영화의 삼각형은 꼭짓점 사이를 직선으로 연결한 게 아니라, 꼭짓점 사이에 더 작은 점들이 있고, 그 점들을 통해 연결이 된 작품인 것 같다. 그 점이 굉장히 흥미로웠고, 앞으로 더 해보고 싶은 작업이다.

-사건의 전말과 관련된 중요한 장소로 타이를 선택했다.

=국내였다면 누군가 그 장소를 촬영해 SNS에 올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웃음) 지금의 한국이라면 그럴 것 같다. 외국의 어떤 곳이 되어야 할 것인지가 문제였고 굉장히 낯선 느낌을 주는 장소이길 바랐다. 아마 우리에게 제작비가 많았다면 알래스카에서 촬영했을지도 모른다.

-<침묵>이라는 제목에 가장 부합하는 순간은 마지막 장면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영화의 엔딩 신은 누군가가 진실을 말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로서의 침묵을 보여주기보다, 아무 말도 필요 없는 상태의 인물을 보여준다.

=생각한 대로다. 지금의 엔딩 신은 원래 마지막 신이 아니었다. 등장인물이 오열하는 순간으로 영화를 끝맺을 계획이었는데, 최민식 선배가 과연 그런 기분으로 영화를 끝내는 게 맞을까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에는 국숫집에서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보는 태산의 모습으로 영화를 마무리하게 됐다. 우리 영화가 얘기하는 <침묵>은 어떤 비겁한 사람이 진실을 감추기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참회와 반성의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 그 상태의 기분이 이 영화의 제목과 맞닿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론시사 뒤 유나가 태산에게 나타나 ‘괜찮아’라고 말하는 환상 속 장면에서 윤리적 불편함을 호소하는 관객도 있었다. 마치 가해라는 행위에 면죄부를 주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유나의 ‘괜찮아’라는 말은 책임을 지겠다고 나선 사람, 모든 것을 버리고 벌을 받아들인 사람에 대한 용서의 뜻이지, 그녀가 어떤 일을 당해도 괜찮다고 얘기해주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유나가 스스로에게 하는 위로의 말이기도 하고.

-다음 프로젝트는 <로기완>이 될 것인가.

=그렇진 않을 것 같다. 지금 다른 세팅으로 제작자가 열심히 궁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아마 차기작은 새 프로젝트가 될 거다. 관심을 확정하기까지 고민을 좀 넓혀야 해서, 여러 가지로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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