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사랑을 담아
2017-11-08
글 : 김혜리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러빙 빈센트>

<러빙 빈센트>의 도로타 코비엘라 감독은 화가 출신으로 “영화를 그리고 싶었다”고 한다. 공동감독 휴 웰치먼은 대담하게도 장편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반 고흐 화풍으로 초당 12프레임, 6만5천여장의 유화를 그리는 애니메이션 작업에 4천명이 지원했다. 평생 기다려온 작품이라고 달려온 60대, 편도 항공권만 사서 무작정 날아온 젊은이들, 안식년까지 내고 응모한 미대 교수도 있었다. 125명의 애니메이터 가운데 애니메이션 경력자는 5명뿐이었다. 더글러스 부스, 시얼샤 로넌 같은 유명 배우들이 캐스팅에 응한 이유 하나는 반 고흐 화풍으로 그려진 본인의 초상화를 얻는다는 특전이었다. 생전에 유대감에 목말랐던 불행한 화가는 록 스타 같은 존재가 돼 있었다. <러빙 빈센트>의 제목은 ‘사랑하는 빈센트로부터’라는 뜻이지만 “빈센트를 사랑하여”로 해석해도 틀리지 않는 셈이다.

10/04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 파이널컷을 복습했다. 영화 사상 최고의 죽음 장면의 하나로 꼽히는 로이 배티의 빗속 독백이 기억보다 단출해 놀랐다. 그러고보면 내게 강렬히 새겨진 <블레이드 러너>의 이미지는 모두 데커드(해리슨 포드)에게 추격당하는 리플리컨트의 모습이다. 면사포를 쓰고 마네킹으로 위장한 프리스, 조라의 투명한 비옷 안쪽에 흘러내리던 피, 빗속에 고개를 떨구는 로이 배티. 배우 룻거 하우어의 즉흥 대사라고 전해지는 로이 배티의 마지막 말은 지금도 정확히 해석되지 않는다. “나는 인간들이 믿지 못할 것을 봤어. 오리온 성좌의 어깨에서 불을 뿜는 전함을, 탄호이저 기지에서 빛으로 물든 바다도 보았어. 그 순간들은 모두 시간 속으로 사라지겠지. 빗속의 눈물처럼.” 로이 배티는 다 이긴 싸움의 끝에서 데커드를 살려주는데 이 독백을 들어줄 청중이 간절히 필요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정설은 본인이 리플리컨트인 줄도 모르는 동족 데커드를 가엾이 여겨 기회를 베푼 처사라는 것이지만.

<블레이드 러너 2049>가 제작된다는 소식에 팬들의 큰 염려는 로이 배티가 시를 읊듯 나열한 “인간이 믿지 못할 광경”을 오프월드(우주 식민지)로 나아가 CG로 샅샅이 보여주는 스페이스 액션 스릴러의 제작이었다. 그러나 이 걱정은 드니 빌뇌브가 감독을 맡았다는 사실로 진정됐다. 실제로 160분이 넘는 SF로서는 희귀하게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클라이맥스는 액션 세트 피스가 아니다. 두세 차례 포함된 긴 전투 시퀀스도 우아하게 안무된 액션의 쾌감을 제공하지 않는다. 주인공들은 수세에 몰려 있고 이기는 경우에도 과정은 지리멸렬하다. 드니 빌뇌브와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이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도 만들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짐작된다. 승리감이 아니라 앞으로도 끝이 보이지 않는, 심지어 자신이 궁극적 주역도 아닌 싸움에 던져진 인물 K(라이언 고슬링)의 안간힘이 <블레이드 러너 2049>를 지배하는 정서다. 실질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격투가 신명나지 않는 이유는 영화 후반 합류한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노쇠한 탓이 크다. 모든 의미에서 놀랄 만큼 모범적인 속편인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데커드가 인간인가 리플리컨트인 가라는 오리지널의 유명한 논란까지 절묘하게 계승하고 있다. 데커드의 수명과 쇠잔한 몸은 인간의 속성을 보여주지만, 그가 레이첼처럼 넥서스 7이나 8에 해당하는 실험 버전으로서 수명이 길어지는 대신 기능이 저하되는 리플리컨트라는 추측도 배제할 수 없다.

속편의 가장 큰 이슈인 리플리컨트의 출산도 데커드의 정체성을 확정해주진 못한다. 비전문가가 아닌 관객이 보기에 두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새로운 리플리컨트가 태어나는 것이, 인간과 리플리컨트 사이 2세 탄생보다 더 허황될 것도 없다. 어차피 <블레이드 러너 2049>는 태생이 아니라 주체의 의지와 경험을 휴머니티의 근거로 바라본다.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가 영감을 주는 질문의 영화였다면 상대적으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대답하는 영화다. 인공지능이 경험으로부터 학습해 프로그램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태생이나 고유한 기억의 유무는 생존권을 가질 자격으로서 의미가 옅어진다. 1편에서 제시된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공감과 기억인데 속편은 여기에 외부 현상에 대해 경이를 느끼는 능력을 보탠다. 눈과 비에 대해 홀로그램 조이(아나 데 아르마스)와 K가 황홀한 감흥을 느끼는 광경을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주의깊게 보여준다. 인간 가운데 타인의 마음에 무심한 이들이 존재하고, 리플리컨트가 상대의 입장과 표현을 합리적으로 헤아려 반응을 산출하는 능력이 있다면 공감능력 역시 인간의 전유물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블레이드 러너 2049>는, 오르가(인간)와 메카(로봇)가 공존하는 미래를 종족주의 홀로코스트의 재연으로 예언한 <A.I.>의 정신적 후예이기도 하다.

10/20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본 영화들을 메모해둔다. 신동석 감독의 <살아남은 아이>는 고등학생 아들을 잃은 부부가 아들의 목숨과 바꿔 구한 소년을 만나고 돌보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사려깊고 통렬한 드라마다. 이창동 감독의 <시>를 역전시킨 상황이기도 하고, 다르덴 형제의 <아들>이 던진 질문을 더 친절하고 길게 파고든 영화라고 묘사해도 무방할 것 같다. 부부의 입장과 영화 내내 애도에 한동안 동참하다가 “그만 작작 슬퍼하라”고 압박하는 공동체의 분위기는 김애란 소설가의 근작 <바깥은 여름>에 수록된 두 단편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와 <입동>과도 닿아 있다. 아버지 역의 최무성 배우는 투박하고 우직한 조연으로 낯이 익은데 <4등>에 이어 인간적 자긍심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하는 보통 중년남자의 초상을 훌륭히 그려낸다. 내게 이 영화는 한 아이가 죽어간 깊고 탁한 ‘물’속에서, 남겨진 세 사람이 2시간 내내 고통스럽게 자맥질하는 이야기로 남을 거다.

청년의 빈곤은 여전히 독립영화의 중요한 주제다. 김중현 감독의 <이월>은 제목이 예고하듯 명목상 겨울은 끝나가는데 물러설 줄 모르는 추위에 얼어붙어 버린 민경(조민경)의 이야기다. 이월(移越)된 가난과 위축된 심리는 그녀의 봄을 자꾸 밀쳐낸다. <이월>에서 물질적 궁핍은 민경을 길거리로 내몰 뿐 아니라 어떤 유의미한 인간관계도 차단하는 ‘가시’다. 가까운 친구가 자살을 기도해도 “네가 진짜 절망을 알아?”라는 냉소가 먼저 튀어나오고 모처럼 애착하는 관계를 맺어도 그것을 책임질 사회적 능력이 없어 도망친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더 염오하게 된다. 만듦새는 거칠고, 캐릭터를 출구 없는 곳까지 데려다놓고 환상으로 마무리짓는 결말은 무기력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만연된 위악이 어디에서 오는지 돌아보게 만든다. <당신의 부탁>의 이동은 감독이 바라보는 세상의 날씨는 한결 온화하다. 사고로 남편을 여읜 학원 교사 효진(임수정)이, 남편이 전처 사이에 낳은 10대 아들 종욱(윤찬영)의 보호자가 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는 기대만큼 흐뭇하지도 염려만큼 각박하지도 않다. 이동은의 세계에서 인물들은 크고 작은 부탁- 팥빵부터 한 소년의 인생까지- 으로 연결되고, 주저하면서도 끝내 서로를 돕는다. “근근이 먹고사는 게 꿈”이라는 조숙한 종욱의 대사처럼 효진과 그녀 주변의 평범한 인물들은 빠듯한 제 몫을 조금씩 덜어 타인에게 얹어주며 작은 안정에 도달한다. 이동은 감독의 전작 <환절기>와 <당신의 부탁>은 모두 2018년에 개봉할 예정이다.

<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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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방

정가영 감독의 <밤치기>는 시나리오 취재를 명목으로 밤 깊도록 차수를 변경하며 지속되는 가영(정가영)의 구애 작전을 따라간다. 만남은 가영의 기획이었지만 진혁(박종환)의 진실한 대답은 이들의 대화를 ‘비포’ 시리즈 버금가는 문답의 향연으로 만든다. 다만 이들의 대화는 거리를 소요하면서가 아니라 한국답게 실내공간에 눌러앉아 뭔가를 끝없이 먹고 마시며 이어진다. 가영과 진혁이 2차로 찾은 공간은 언뜻 누군가의 집처럼 보이는 방이지만 구석의 큼직한 소화기가 눈에 걸린다. 알록달록한 벽 장식도 둘의 취향 같지 않다. 두 사람은 이 방에서 봄베이 사파이어를 마시며 파란 정액을 가진 사내의 이야기 등을 나눈다. 진혁이 화장실에 가려고 나가는 장면에서야 우리는 이곳이 ‘룸 카페’임을 알아차린다. 알코올과 대화에 취한 진혁은 똑같은 핑크빛 커튼으로 가려진 방들의 행렬 사이에서 잠시 방향감각을 잃는다. 가영의 손에 이끌려 미로에 빠진 진혁의 하룻밤을 함축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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