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벗은 채 사람들 앞에 나선 기분이다. (웃음)” 조영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채비>는 엄마 애순(고두심)과 지적장애를 가진 아들 인규(김성균)가 이별할 채비를 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줄거리만 봐도 울컥하는 설정인데도 극적 장치에 기대지 않고 눈물을 강요하지 않으며, 고두심과 김성균 두 배우의 절제된 연기만으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조영준 감독은 자극적인 메인 사건 없이 애순과 인규 모자와 주변 인물들의 일상만으로 이야기를 돌파하는 배짱을 갖췄다. 그는 <인투 포커스>(2011), <마녀 김광자>(2012), <피아노>(2013), <사냥>(2015) 등 여러 단편영화를 연출해 국내외 영화제에서 인정받았다. “언젠가 <세븐>(감독 데이비드 핀처, 1995) 같은 영화를 찍고 싶다”는 그가 눈물을 쏙 빼놓는 드라마 <채비>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80대 노모와 지적장애를 가진 50대 아들의 삶을 그린 TV다큐멘터리를 보고 구상한 이야기라고 들었다.
=4년 전 우연히 그 다큐멘터리를 보고 30분 동안 울었다. 80대 노모는 아파트 청소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었고, 1급 지적장애를 가진 50대 아들은 어머니 없이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어머니가 아파트 꼭대기층의 복도에 돗자리를 깔아놓고 청소를 하러 가면 그사이 아들은 돗자리에 앉아 퍼즐을 맞추며 시간을 보낸다. 집에서도 어머니는 항상 아들의 밥을 챙기고, 깨끗하게 씻겼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너희 누나가 시집가고 심심할 줄 알았는데 네 덕에 심심했던 적이 한번도 없고, 매일 재미있고 행복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걸 보고 울컥했다. 한번 얘기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자료 조사를 위해 지적장애인들을 많이 만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게 시나리오에 얼마나 반영됐나.
=보통은 이야기의 큰 틀을 짜놓은 뒤 살을 붙이기 위해 자료를 조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이 영화는 그렇게 하면 이야기를 망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향을 정해놓지 않고 취재부터 했고, 그렇게 취재한 내용은 영화에 많이 반영됐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장애인을 유아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나. 지적장애인을 만나기 위해 그들이 모인 시설에 갔다. 건물 뒤편에서 지적장애인들이 모여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보니 모두 평범한 아저씨들이었다. 선입견을 가지고 이 영화에 접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인터넷에서 ‘우리는 왜 나이 든 지적장애인들을 볼 수 없는가’라는 주제의 칼럼을 보게 됐다. 보호자가 사망하면 홀로 남게 된 지적장애인들은 보호시설로 보내진다. 하지만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각종 자립 프로그램을 보면서 그들을 무조건 격리시설로 보내기보다는 자립할 수 있도록 주변 사람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실제로 그런 사례들이 꽤 많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나리오를 쓰면서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을 것 같다.
=실제 내 어머니 이름이 애순이고, 누나 이름이 영화 속 인규의 누나 문경(유선)이다. 어머니는 마흔을 앞둔 내게 아직도 “점심 뭐 먹었냐”라고 묻는가 하면 등 때리고 욕하다가도 갑자기 좋아하신다. 어머니의 평소 모습을 애순 캐릭터에 상당 부분 반영했다. 그게 세상의 모든 어머니의 모습인 것 같기도 하고.
-배우 고두심은 꽤 오랫동안 다양한 모습의 어머니를 연기해온 배우 아닌가. 고두심의 어떤 면모가 애순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나.
=애순은 나물을 사러 시장에 갔다가 그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떠는 아줌마 같은 모습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고두심 선생님이 적역이었다. 인규의 지능이 7살에서 멈춘 것처럼 애순 또한 7살 인규를 키우던 정서와 감수성에서 멈췄다. 영화에서 애순이 인규의 사탕을 빼앗아먹은 뒤 약올리는 모습도 고두심 선생님이 낸 아이디어였다.
-배우 김성균에게 주문한 건 무엇인가.
=(김)성균씨가 많은 동영상 자료를 보면서 이야기에 맞게 인규를 구축했다. 가령 인규가 유일하게 눈을 맞추는 대상은 엄마 애순뿐이고, 그외의 사람들과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잔꾀를 부리고 잔머리를 굴리거나 음식을 쟁취하는 데 행동이 발달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성균씨의 생각에서 비롯됐다. 우리가 확실하게 정한 건 절대 장애를 가지고 웃기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사람들이 주인공을 애정을 가지고 지켜볼 수 있도록 해야지 구경거리로 전락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장애인을 소재로 한 영화에서 배우들이 애드리브를 종종 하는데, 성균씨는 단 한번도 애드리브를 하지 않았다.
-애순과 인규, 두 모자가 감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고두심과 김성균 두 배우의 호흡이 중요했을 것 같다.
=대개 영화감독은 시각적으로 무언가를 독특하게 보여주고 싶은 열망이나 욕망이 있지 않나. 하지만 <채비>를 쓰면서 든 생각은 감독의 존재를 감추고 영화 속 세계와 인물들만 보이도록 해야겠다는 거였다. 촬영감독과 함께 콘티를 구상할 때도 인규의 판타지 장면이 몇개 있었는데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에 개입하면 관객이 감정적으로 더 불편해할 것 같아 모두 삭제했다. 이 영화는 실화는 아니지만 지적장애인을 가족으로 둔 사람들에게는 언젠가 맞닥뜨려야 하는 미래라는 점에서 ‘실화’다. 영화를 만드는 내내 최대한 조심한 것도 그래서다. 선의로 만든 영화이지만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는 것이 아닐까 싶어 아직도 걱정이 많다.
-에피소드 위주로 서사를 끌고 간다는 점에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다.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가진 고민이다. 안타고니스트가 강할수록 메인 사건이 생기고, 그러면서 서사가 강력해지는데 이 영화를 그런 구조로 끌고 가려면 인규나 인규 가족을 괴롭히는 악당을 등장시켜야 한다. 그런 방향으로 시나리오를 쓸까 잠깐 고민했다. 가장 쉽고 안전한 방법이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 애순에게는 죽음이라는, 인규에게는 장애라는 누구도 이길 수 없는 안타고니스트가 있는데 그 이상의 적을 등장시키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더라.
-두 배우를 믿고 내린 결정인 셈인데.
=두 배우가 편집본을 본 뒤 “사람들이 (다른 볼거리 없이) 우리만 볼 텐데 괜찮겠어?”라고 묻더라. “다른 시도는 다른 영화에서 하겠다. 이 영화에서 애순과 인규를 더 괴롭히고 싶지 않다”고 말씀드렸다.
-첫 장편을 찍고 나니 어떤가.
=뿌듯하다. 데뷔하기까지 힘든 게 없었다면 거짓말이고. 첫 촬영 때 고두심 선생님께서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는데 그렇다고 너무 긴장하지 말고, 또 너무 만족하지 말고 마음을 적절하게 가지면서 해라”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선생님의 말씀대로 작업하는 동안 최대한 밸런스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다음 작품은 무엇인가.
=파파라치가 주인공인 액션 스릴러다. 원래 준비하다가 <채비>를 작업하느라 잠깐 미뤄둔 작품이다. 인물, 카메라, 음악 등 모든 것들이 동시에 움직이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우스갯소리지만 <채비>는 인물들이 계속 앉아서 밥 차리고 먹는 장면들로 가득한 영화다. 드라마가 쉽지 않은 장르라 밑천 다 드러내놓고 작업해 정말 숨을 데가 없다. ‘다른 영화는 중반부쯤 달려오면 누군가를 구출하거나 악당을 제거하기 시작하는데, 우리 영화는 중간에 오니 인규가 드디어 밥상을 차리고 사람들과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됐구나’라는 얘기를 편집실에서 나눈 적 있다. 생각해보니 인규에게 그것만큼 중요하고 큰일이 없지 않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