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침묵>에서 사실의 조작이 진심을 증명하는 이유
2017-11-14
글 : 안시환 (영화평론가)
멜로드라마 그리고 영화에 대한 영화

*이 글은 첫 문단에서부터 <침묵>의 스포일러로 가득합니다.

<침묵>(2017)에서 가장 민감한 장면에서부터 이 글을 시작하는 편이 좋을 듯하다. 어쩌면 <침묵>은 진실에 관한 영화라기보다는 인물의 진심을 관객에게 설득하는 영화다. 그것이 죽은 유나(이하늬)가 ‘괜찮아’라고 말하는 임태산(최민식)의 판타지가 정지우 감독에게 필요했던 이유다. 장영엽 기자가 인터뷰에서 지적했듯이(<씨네21> 1128호 정지우 감독 인터뷰), 이 장면은 가해자가 피해자를 다시 한번 유린한다고 느껴질 수 있는 ‘윤리적 불편함’이 내재해 있는 게 사실이다. 만약 이 장면에 불편함을 느꼈다면, 정지우의, 또는 임태산의 진심을 전달하는 데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이 아슬아슬한 장면에 설득당한 관객임을 고백해야겠다. 이 글은 내가 설득당한 임태산과 정지우의 진심에 대한 것이다.

침묵을 설득하는 최민식의 마술

결론부터 말하자면, <침묵>은 법정 드라마의 형식을 빌린 ‘아버지 되기’에 대한 멜로드라마다. 영화의 첫 장면에서 임태산과 미라(이수경)는 식당에서 만나지만 밥 한끼 제대로 함께하지 못한 채 헤어졌을 것이다. 이 장면은 영화 엔딩에서 임태산이 자신의 충실한 부하인 정승길(조한철)과 국수를 먹는 장면과 대조를 이룬다. 이 엔딩에서 두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처럼 정감이 넘친다. 가장 아버지다운 임태산의 모습. 하지만 그는 정작 자신의 딸과는 이처럼 정감 어린 저녁식사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한발 늦게’ 아버지가 된다. 정지우는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가 아니라 아버지와 딸 사이에서 멜로드라마의 공식인 ‘너무 늦음’ (too late)의 안타까움을 펼쳐낸다. 한발 늦게 깨달음의 순간이 찾아오는 멜로드라마의 슬픈 공식.

<침묵>을 보며 궁금했던 것 하나는 오직 ‘돈만이 진심’이던 임태산이 자신을 희생하는 ‘아버지 되기’를 언제, 어떻게 결심한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임태산이 자신의 삶을 처참한 심정으로 바라보게 된 계기가 언제였을까, 하는 질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침묵>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깨달음의 순간이 아니라, 세상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조차 딸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임태산의 진심이다. 하지만 <침묵>이 한 인물의 내면이 변화하는 과정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원작 <침묵의 목격자>를 다시 쓰려 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계기를 생각해보는 것도 꽤 흥미로운 일이지 않겠는가? 나는 그 변화의 시점이 자신의 딸에 대해 “누가 보지 않으면 갖다 버리고 싶다”고 했던 임태산의 말이 유나의 입과 미라의 귀와 동명(류준열)의 입을 거쳐 다시 그에게 되돌아왔을 때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그제야 임태산은 미라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삶을 바라본 것은 아닐까? 그것이 그를 기나긴 ‘참회의 침묵’으로 이끈 것은 아닐까? 그렇게 임태산은 ‘아버지로서의 침묵’을 선택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자신처럼 침묵해주기를 요구한다. 딸을 향한 자신의 진심을 이해한다면, 당신이 목격한 모든 것에 눈감아주기를, 입닫아주기를, 그렇게 기나긴 침묵을 함께해주기를.

정지우은 여러 인터뷰에서 <침묵>은 “최민식이 장르”라는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다. 정지우의 이러한 언급이 최민식이라는 배우에 대한 예우 차원일 수도 있지만, 나는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입장이다. 임태산의 진심이 관객을 설득하지 못하면 성립될 수 없는 영화가 <침묵>이고 보면, 정지우의 이러한 언급은 관객을 ‘정서적으로 설득’할 수 있는 배우는 오로지 최민식뿐이다, 라는 말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침묵>의 엔딩은 최민식이 관객을 정서적으로 설득하는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우리는 최민식이라는 배우에게서 불처럼 뜨겁게 몰아붙이는 연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고, 실제로 그의 이런 연기가 서사에 강렬한 추동력을 불어넣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관객을 정서적으로 무장해제하는 순간은 오히려 온몸에 힘을 빼고 가볍게 툭하고 던지듯 평범하게 연기하는 장면들이지 않은가?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장면들이 정서적으로 비범해지는 마술. 가령, <범죄와의 전쟁: 나쁜 놈들 전성시대>에서 비열한 아버지의 초상이었던 그는 어느 늦은 밤 잠든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머리를 쓰다듬는데, 이 평범한 장면 이후에 우리는 그를 도무지 미워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정지우와 함께했던 <해피엔딩>의 후반부에 등장한 기차 장면에서, 투정 부리는 아이에게 고무줄로 이런저런 모양을 만들어 보여주며 미소짓던 모습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순간이 최민식의 몸을 통과하면 이상하리만치 정서적으로 특별한 힘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면에서 <침묵>의 엔딩은 관객을 향한 최민식의 마술이다.

사실과 거짓, 그리고 진심

정지우는 임태산이 세트 촬영으로 CCTV 화면을 조작하는 일련의 장면을 연출하며, <침묵>이 어떤 면에서는 ‘영화에 대한 영화’라고 느끼지 않았을까? 임태산에게 이 세트 촬영의 목표는 ‘사실의 조작’이지만, 우리가 이 일련의 과정에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유나와 미라를 향한 임태산의 진심이다. 그러니까 그는 거짓을 만들어 진심을 표현한다. 실제로 <침묵>의 CCTV 조작 시퀀스는 우리를 사실과 진실, 참과 거짓이라는 복잡한 화두 앞으로 이동시키고, 그것이 원작인 <침묵의 목격자>보다 <침묵>이 주제적으로 훨씬 복잡한 영화로 완성된 이유다.

사실의 여부, 라는 관점에서 보면 CCTV와 관련된 모든 상황은 거짓이다. 왜냐하면 술에 취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라가 유나를 죽였다, 라는 것만이 참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진실은 사실의 진위와 다르다. 미국의 저명한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먼의 말처럼 “진실의 기능은 감춰진 사실들을 밝혀내 사실들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정립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맥락 없는 사실은 맹목적”이라고 했고, 코난 도일은 셜록 홈스의 입을 빌려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침묵>의 전개 과정에서 가장 궁금했던 것은 영화 곳곳에서 내비친 인물의 감정이 과연 진실인가, 관객을 속이기 위한 트릭인가, 하는 것이었다. 정지우는 꽤 흥미로운 반전의 플롯에 의존하면서도 임태산의 감정에는 트릭을 개입시키지 않는다. 가령, 요트 장면에서 유나는 미라를 만나러 가겠다는 자신을 붙잡지 않는 임태산에게 “나 오늘 왜 이렇게 서운하지?”라고 말한다. 이는 자신과의 추억 쌓기보다 딸과의 관계 개선을 바라는 임태산의 모습에 서운하다는 의미일 텐데, 우리는 그녀의 말이 진심인지 임태산에게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반면에 요트 장면 직전에 등장했던 노래하는 유나를 바라보던 임태산의 시선은 오로지 사랑에 빠진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선은 임태산이 제 3의 누군가를 의식하며 꾸민 표정이 아니라는 점에서 결코 거짓일 수 없다. 만약 반전을 만든답시고 그 시선이 거짓이었다고 말한다면, <침묵>의 연출은 한마디로 엉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정지우는 그 시선의 진심을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다.

CCTV를 조작하는 일련의 장면은 사실의 조작, 또는 연출을 보여주지만, 궁극적으로 그 효과는 임태산의 진심을 증명한다. 어쩌면 그것은 영화가 진실을 전달하는 방식과 유사한 것이 아닐까? 영화는 사실이 아닌 연출된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거짓(연출)이 만드는 효과는 진실(진심)일 수 있다. 감독의 일이란 거짓을 통해 진실(진심)을 만드는 직업이고 보면, 결국 이 시퀀스에서 임태산과 정지우는 하나의 목표를 공유하는 관계이다. 어쩌면 이 CCTV 조작 시퀀스는 영화감독으로서 정지우의 고백이지 않을까? 거짓으로 진실을 만들겠다는 정지우의 고백, 또는 진심.

관련 영화

관련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