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보고 싶은 것만 보기
2017-11-15
글 : 김혜리

※<침묵>의 중요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배드 지니어스>

커닝 하이스트 영화래도 과언이 아닌 <배드 지니어스>는, 소재의 규모가 장르적 재미를 좌우하지 않는다는 사실의 증거다. 그러나 이 영화는 스릴 게임을 넘어 무한경쟁 세계의 문턱에서 청년들이 내리는 선택에 관한 사려깊은 이야기로 나아간다. 서민이지만 빼어난 학력으로 값비싼 엘리트 학교에 다니는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과 뱅크(차논 산티네톤쿤)는 정반대의 경로를 거쳐 부유한 동급생들의 부정행위 프로젝트에 가담한다. 부잣집 아이들의 돈으로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고 STIC 시험이 치러지는 호주 시드니에 도착한 소녀와 소년. 불의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이미 얼룩진 마음을 안고 둘은 (이 일이 지나가면) 우리는 넓은 세상을 누비게 될 거라고 애써 위안한다. 그리고 찰나지만 먼 나라에 여행 온 젊은이답게 셀카를 찍는다.

10/24

정지우 감독의 <침묵>은, 중국영화 <침묵의 목격자>의 리메이크다. <침묵>의 주인공 임태산(최민식)은 맨땅에서 자수성가한 1세 사업가다(현재 한국보다는 중국에 어울리는 설정이다). 그리 깨끗한 성공은 아니었던 모양으로 사법부 고위층 인사에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위세가 당당하다. 임태산은 뒤늦게 만난 가수 유나(이하늬)와 재혼해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계획에 부풀지만 응석받이 딸 미라(이수경)는 유나를 백설공주 계모 보듯 하며 미워한다. 어느 날 갑자기 유나가 살해되자 그날 만취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미라에게 혐의가 가고 임태산은 가진 것을 전부 동원해 하나 남은 가족인 미라를 빼내려고 한다.

<침묵>의 플롯은, 1차 트릭을 일부러 들킴으로써 성취감에 도취된 상대가 첫 발견을 철석같이 믿게 만드는 점에서 애거사 크리스티의 <검찰측 증인>류다(단, <침묵>의 덫은 2단계가 아니라 3단계로 설계돼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의 반전은 집을 통째로 바꿔치우는 엘러리 퀸의 어느 단편과 배포를 같이한다. 정지우 감독의 리메이크에서 중심은 자타가 공인하듯 배우 최민식이다. 그는 한국영화에서 숱하게 보아온 구식 가치관을 지닌 무데뽀 자본가다. 그러나 이 남자에게 <침묵>이 접근하는 방식은 여타 정경유착을 소재로 한 사나이 영화들과 사뭇 다르고 그것이 <침묵>의 매력적인 부분이다. 마지막 장 전까지 임태산은 극중에서 파워풀하지만 놀림감이기도 하다. 번번이 법망을 빠져나갔던 그에게 칼을 가는 동성식 검사(박해준), 증거를 쥐고 있는 유나의 팬클럽 회장인 김동명(류준열)은 (한국영화 관객에겐 낯설게도) 돈과 힘을 주겠다는 임태산의 제안을 튕겨낸다. 그래 돈이면 다인가 때로는 정말 역겨우면 저럴 수도 있지라고 고개가 끄덕여진다. 관객에게도 임태산은 한심스런 구시대의 적폐다. “얼마면 되겠어”, “왜 돈 앞에서 객기를 부리지?” 같은 그의 말버릇에 관객은 실소한다. 최민식은, 임태산은, 거의 영화에서 혼자 <모래시계>류 드라마에서 튀어나온, 과하게 비장하고 물색없는 남자처럼 보이는데 그러면서도 동시에 사실적이다. 우리는 돈과 권력의 전능함을 믿고 유아독존의 우주에서 살아가는 ‘아저씨’들을 많이 안다. 게다가 흥미롭게도 임태산은 직접 손에 오물을 묻히는 보스다. 그는 하수인을 세우지 않고 관련자들을 찾아다니며 직접 협상하고 종종 우스꽝스러운 꼴을 당한다. 임태산뿐 아니라 모든 인물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은 냉정하다. 미라와 유나는 구원의 여인상이 아니며, 심지어 정의에 편에 속하는 의협심에 찬 검사와 변호사도 어느 대목에서는 시시한 면을 드러낸다. 이런 <침묵>의 건조한 태도는 부패한 특권층과 의로운 법조인이라는 익숙하기 짝이 없는 구도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풍경을 색다른 톤과 앵글로 재현한다. 관객의 동일시를 차단한 채 중반까지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끌고가는 연출은 정지우 감독의 자부심과 그에 어울리는 능력을 읽게 한다.

그런데 <침묵>의 피날레는 나를 어리둥절하게 했다. 영화의 최종 반전이 가리키는 바는, 임태산이 자기 이미지와 타인에게 끼치는 영향을 객관화하고 몇수 앞지른 복잡한 연산으로 사건의 진행을 완벽히 예측했다는 것이다. 이는 매우 냉철한 반성을 요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우리가 본 영화에는 돈을 전부로 알고 수단 가리지 않고 살아온 남자가 언제 어떻게- 이를테면 유나에 대한 사랑이라든지- 자기 성찰은 물론 평생 쌓은 위치를 포기하는 일이 가능해졌는지가 완전히 생략돼 있다. 다른 가능성으로서 야비한 외면 아래 실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한 인물이었다거나 비즈니스로 갈고닦은 희대의 전략가였다는 힌트도 없다(물론 내가 중반까지 <침묵>이 묘사한 부패한 중년 재력가의 생생한 초상에 집착해, 보고싶은 것만 보았을 가능성도 있다). 관객에게 남는 것은 부도덕하지만 내 여자들에게만은 진심인, 그래서 결국 연인의 죽음에 관한 진실과 딸의 인생을 통제한 사나이의 얼굴이다. 또는 자식 사랑에도 자본이 긴요하다는 냉소적 교훈이다. 현재 나로서 가능한 짐작은 정지우 감독이 그 모든 생략된 이야기를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두께, 페르소나에 의탁해버렸다는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배우에게 과중한 짐이었다. 관객인 내 눈에 최민식의 임태산이 앞선 장면에서 축적된 캐릭터를 선명하게 완성한 대목은, 진한 부성애를 피력한 엔딩이 아니었다. 그보다 한참 앞서 “위기를 팔아 기회를 사는 브로커가 내 직업이다. 진범이긴 해도 내가 감옥 가면 무능한 딸은 날 도울 수 없고 2780명 태산기업 직원 가족은 곤경에 처한다”는 논리적 (거짓) 자백을 법정에서 내뱉는 순간이었다. 나는 <침묵>의 마지막 단락이 없었대도 크게 서운하지 않았을 것 같다.

10/31

빈센트 반 고흐의 화풍을 본뜬 유화를 초당 12장씩 그려 완성된 장편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는, 고흐가 살았던 마을 아를의 청년 아르망(더글러스 부스)이 화가가 숨진 북부 마을 오베르쉬르우와즈를 찾아가 그의 마지막 나날을 재구성하는 미스터리다. 중심 질문은 “그는 과연 자살했는가?”인데 영화는 궁극적으로 확답을 주진 않는다. ‘로즈버드’가 빠진 <시민 케인>과 비슷한 구조이니 수수께끼물로서는 좀 싱겁다. 이 영화를 반 고흐 죽음의 진상을 찾기 위해 보는 관객은 드물겠지만.

도로타 코비엘라 감독은 첫 번째 연출 동기가 “영화를 페인팅하고 싶다”는 욕구였다고 밝혔다. 제재는 두 번째였다. 그렇다면 왜 현실적으로 고흐여야 했는가- 그가 비범한 화가라는 사실은 차치하고- 라는 질문은 생각해볼 만하다. 첫째, 고흐는 28살에 붓을 잡아 죽기까지 단 10년 동안 계절과 일조량과 빚에 좇기며 2천점을 그렸다. 화풍의 변화가 없진 않았지만 작은 편이고 그 양식은 다른 어떤 화가의 그것보다 널리 인지된다. 둘째, 고흐는 타계하기 전 3년간 프랑스 두 마을과 생 레미 병원의 풍경을 집중적으로 그렸고 직업모델을 고용할 여력이 없어 주민들의 초상화를 다량 그렸다. 제한된 공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물들이 촘촘히 작품으로 남아 있으니 캐릭터와 배경 소스를 곧장 확보할 수 있다. 셋째, 장편애니메이션의 제작비를 추수할 만한 일정한 유명세가 필요하다. <러빙 빈센트>의 공동감독 휴 웰치먼은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의 수장으로서 많은 미술관을 다녀본 경험을 돌아보며 “사람들은 그가 남긴 편지 전시를 보려고 세 시간 반 줄을 선다. 고흐는 19세기의 커트 코베인이다”라고 스타성이 제작의 지렛대였음을 확인한다. 넷째, 두말하면 잔소리.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기 전에도 고흐의 그림은 많은 사람의 눈앞에서 움직였다. 수런거리고 일렁이고 이글거렸다.

<토르: 라그나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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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골드블럼

제프 골드블럼은 빌 머레이가 그렇듯 대체 불가능한 고유한 마성의 배우다. 이 두 스타는 아무 말이나 해도, 말없이 눈동자만 움직여도 우리의 웃음뼈를 간지럽힌다. 골드블럼이 연기한 사카르 행성의 지배자 그랜드 마스터는 마블 최고의 코미디 <토르: 라그나로크>에서도 코르그(타이카 와이티티)와 함께 가장 독창적 웃음을 만들어낸다. 쓰레기집하장 같은 별 복판에 디스코클럽 같은 궁정을 짓고 서바이벌 검투를 주최하는 폭군이지만 골드블럼이 가장 골드블럼답게 연기하는 그랜드 마스터를 미워하기는 불가능하다. 주변 모든 이에게 보이는 세세한 관심, 본인이 알아차리기도 전에 상대를 달변으로 감아 마음을 보쌈해버리는 묘기, 최면술사 같은 손동작, 쥐라기 공룡과도 시시덕거릴 법한 붙임성. 그것이 ‘골드블럼스러움’의 몇몇 요소다. 자기 스타일을 확립한 감독은 히치코키안, 타란티노스크처럼 이름이 형용사형으로 활용되는데, ‘골드블루밍’이라는 동명사가 만들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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