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한 제작자에서 훌륭한 투자자로 변신한 사람.” 이정세 메가박스 영화사업담당이 누구인지 설명하는 데 그를 오랫동안 지켜봐온 이상윤 CJ E&M 영화사업부문 글로벌기획제작본부장의 말만큼 적절한 표현이 없을 것 같다. 이정세 영화사업담당은 1998년 미로비젼에 입사한 뒤 2002년 씨네월드의 자회사 타이거픽쳐스에 기획실장으로 합류해 이준익 감독, 조철현·정승혜 대표의 씨네월드, 타이거픽쳐스, 영화사 아침 세 회사의 살림을 도맡았으며, 정승혜 대표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제작자로서 영화사 아침을 운영했다. 이후, 2013년 메가박스의 자회사였던 씨너스엔터테인먼트로 옮겨 첫 영화 <결혼전야>의 투자·배급을 진행했고, 2014년 씨너스를 인수·합병한 메가박스의 영화사업담당으로 지금까지 시장에 신선한 긴장감을 불어넣고 있다. 특히 올해 메가박스는 상반기의 <박열>(235만여명,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 집계)과 하반기의 <범죄도시>(11월 8일 기준 644만명), <부라더>(86만여명) 등 라인업의 대부분이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성과를 냈다.
-<부라더>의 선전은 예상 밖인데.
=올해는 <부라더>가 개봉하기 전까지 코미디 장르가 없었다. 관객은 <부산행>(감독 연상호, 2016)이나 <베테랑>(감독 류승완, 2015)에서 마동석의 코믹한 면모를 봐왔지만 마동석이 주연으로 출연한 코미디영화는 없었다. 경쟁작이 만만치 않았지만 관객을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배급 시기에서 어떤 가능성을 보았나. 11월은 추석 연휴와 겨울방학이라는 성수기 사이에 해당되는 시기로 전통적으로는 비수기로 분류되지 않나.
=해마다 11월에 100만~200만 관객을 동원한 한국영화가 나왔다. 비수기는 맞지만 관객이 전혀 없는 시기는 아니다. <부라더>는 500만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면 좋겠다는 바람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달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영화가 가진 여러 조건을 객관적으로 고려했을 때 최대 200만명 정도 불러모으면 좋은 성과라고 생각했다. 투자·배급 담당자로서 이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게 최우선 목표다.
-상반기에 <박열>이, 하반기에 <범죄도시>와 <부라더>가 선전하면서 4대 배급사 못지않은 성과를 거뒀는데.
=뿌듯하고 기분 좋다. 예상보다 배 이상 성과를 낸 작품도 있고, 라인업의 대부분이 손익분기점을 넘겼으며, 개봉을 앞두고 있는 <기억의 밤>(감독 장항준) 또한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다. 메가박스 영화사업부 직원들 모두 라인업을 자신의 영화처럼 생각하고 성실히 일해준 덕분에 거둘 수 있었던 성과다. 그런데 4대 배급사니 5대 배급사 같은 프레임에 갇히는 게 좋은 것 같진 않다. 올림픽처럼 메달을 따기 위해 경쟁하는 게임도 아니고.
-언론이 4대 배급사의 라인업을 중심으로 다루어온 데에 서운한 점이 있나.
=우리 회사가 4대 배급사에 들어가지 못한 데에 대한 서운함보다는 내 영화를 좀더 알리지 못한 현실에 대한 서운함에 더 가깝다. 언론이 4대 배급사의 라인업을 중심으로 기대작을 소개하다보니 우리 영화제목이 기사에 안 들어갈 때가 많았다.
-메가박스에 합류한 지 올해로 4년째다.
=2013년 1월, 메가박스의 자회사였던 씨너스엔터테인먼트가 한국영화 투자 사업을 시작하면서 합류했다. 씨너스에서 처음 투자한 영화가 <결혼전야>(감독 홍지영, 2013), 두 번째 작품이 <제보자>(감독 임순례, 2014)였다. 2014년 초 씨너스엔터테인먼트가 메가박스에 인수합병됐다.
-이준익 감독은 “(이정세가) 입에 풀칠해야 되니 빨리 가라”고 조언해줬다던데. (웃음)
=내가 이준익 감독의 새끼 혹은 애제자인데 (경제적인 어려움을) 본인이 다 해결해줄 순 없고, 메가박스가 월급도 주니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너라도 빨리 가’라고 그러신 것 같다. (웃음)
-한국영화 투자·배급 사업에 뛰어든 신생 사업자로서 라인업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책(시나리오)을 안 준다. (웃음) 씨너스가 외화 수입과 배급을 주로 해온 회사인 까닭에 제작사들이 책을 잘 주지 않고, 한국영화를 투자한다는 사실도 잘 믿지 않았다. 당시 메가박스의 지분구조가 중앙일보와 매쿼리가 각각 50 대 50이었다(2015년 5월 21일 중앙일보 계열사인 제이콘텐트리가 매쿼리펀드 지분을 인수해 메가박스 지분을 100% 보유하게 됐다.-편집자). 매쿼리의 한국영화 투자·배급 사업의 의지에 대해 의심하는 영화인들도 많았다. 처음에는 알고 지내는 제작자와 기획자들을 많이 찾아갔다. 투자금이 넉넉지 않아서 회사 비전을 세우기보다 1년에 두편이라도 해야 할 텐데 같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첫 작품인 <결혼전야>는 진행 과정을 누구에게도 투명하게 보여줘도 될 만큼 ‘클리어’하게 진행하려고 했다. 펀딩부터 개봉까지 1년 내내 이 영화 하나만 신경을 썼고, 관객 120만명을 동원해 손익분기점을 간신히 넘겨 수익률 10~15% 정도를 거두었지만 투명하게 진행한 과정들이 회사에 (우리가 투자·배급사업을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시그널이자 증거가 되었다. 덕분에 메가박스나 중앙일보로부터 ‘나쁘지 않네, 해도 되겠네’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라인업을 확보하기 위해 제작사에 내놓은 당근책도 있었을 것 같다.
=당근책이라기보다는 제작사의 속사정을 잘 알다보니 영화가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않더라도 관객수 기준으로 일정 구간부터는 메가박스가 받아야 할 배급수수료의 10분의 1을 제작사에 조건 없이 지급했다.
-제작사의 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목적인가. 대기업 투자·배급사들은 배급 수수료, 마케팅 수수료 등 각종 수수료를 제작사로부터 떼가는 게 현실인데.
=왜 제작사는 흥행이 되어야만 지속 가능한 운영을 할 수 있는 걸까. 언제나 내 관심사는 1천만명이나 500만명의 관객 동원이 아니라 제작사의 지속 가능한 운영이다. 100만 관객을 기준으로 3천만원 정도의 금액을 제작사에 준다. 직원 한 사람의 인건비나 사무실 1년 임대료, 한편의 초기 개발비 정도 되는 금액으로, 흥행이 되지 않아도 제작사가 다음 작품을 위한 작업을 지속할 수 있게 작은 지원이 되고 싶다.
-그외 다른 혜택은 없나.
=순제작비 40억원, 홍보마케팅(P&A)비용 20억원을 합쳐 60억원을 기준으로, 메가박스가 투자·배급하는 모든 프로젝트에 주는 기획·경상비가 있다. 제작사 사무실은 없어도 프로덕션을 운영할 공간이 필요하니 사무실 경상비 명목으로 주는 거다. 그외에 특별한 당근책은 없지만 제작 능력이 있는 회사들은 흥행이 되지 않더라도 한번 더 (제작을) 시도할 수 있는 장치가 또 뭐가 있을지 항상 고민한다.
-제작사를 직접 운영해봤기에 할 수 있는 고민이라고 생각하나.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런 비용은 투자·배급사의 수익을 분담하는 거다. 투자·배급사 입장에서 보면 수익이 줄어드는 거다. 내가 생각한 아이디어지만 실행할 수 있는 건 회사 덕분이다. 회사가 이 제안을 듣고 3분 만에 오케이했다.
-옛날 얘기도 해보자. 이준익 감독, 조철현 타이거픽쳐스 대표와 인연을 맺게 된 씨네월드에는 어떻게 들어가게 됐나.
=미로비젼 시절 수입한 영화 <어둠 속의 댄서>(감독 라스 폰 트리에, 2000), <디 아더스>(감독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2001)를 씨네월드가 배급했다. 씨네월드는 직배사, 시네마서비스를 제외하고 서울극장의 배급 라인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회사였다. 2002년 씨네월드의 자회사인 타이거픽쳐스가 설립되고, 기획실장으로 그곳에 합류했다. 들어가서 보니 타이거픽쳐스뿐만 아니라 씨네월드 일도 함께했고, 나중에는 영화사 아침(대표 정승혜)까지 3사를 공동으로 운영했다. 이준익 감독, 조철현·정승혜 대표가 시나리오와 기획을 맡았고, 그외에 재무·행정·배급·마케팅 전부 내가 도맡아야 했다. 특히 이준익·조철현 두분은 숫자에 약한 분들이라 숫자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전화를 하신다. (웃음) 타이거픽쳐스에서 처음했던 작품이 <황산벌>로, 그 영화의 투자 유치를 담당했다. 좋게 표현하면 앵벌이. (웃음) 단성사, 서울극장을 찾아가 투자해달라고 조르고 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준익 감독이 “어려운 환경에서 회사가 굴러갈 수 있었던 건 이정세 덕분”이라던데.
=감독님이 ‘너는 영화산업에서 비즈니스를 하면 좋을텐데’라는 말씀을 가끔 하셨다. 기획자가 되고 싶었던 내게는 기분 나쁜 얘기였다. 정승혜 영화사 아침 대표가 돌아가신 뒤 기획자, 제작자 역할을 해보겠다고 몇년을 노력했는데 성과가 없었거나 좋지 않았던 게 사실이다. 뒤늦게 깨달은 건 기획은 나와 잘 안 맞는다는 거다. (웃음) 어른들이 보는 시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때 경험이 지금 업무를 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나.
=당시에는 ‘돈 없어요’, ‘다음달에 돈 들어와요’라는 아쉬운 소리만 해야 하니 하기 싫을 때도 있었고, 불만도 많았다. 정승혜 대표가 돌아가신 뒤 깨달은 게 있는데, 그분들이 계셨으니 내가 그 정도로 끝낼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분들의 우산이 없었더라면 혼자서 절대 감당하지 못했을 거다.
-그래도 군소리 없이 한 걸 보면 성격이 순했던 모양이다. (웃음)
=관계를 맺으면 상대방과 내가 모두 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씨네월드보다 훨씬 어려운 일들이 많았던 시절인 미로비젼을 다닐 때도 그랬다.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들로 회사가 빚을 다 갚을 수 있을 때 회사를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디 아더스>로 빚을 다 갚을 수 있었다.
-극장을 보유하고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배급하는 데 어떤가.
=계열사가 극장이라는 사실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 나 때문에 그들이 욕먹는 것도 싫고, 욕먹을 걸 알면서 우리를 챙겨주기를 바라지도 않는다. 정정당당하게 비즈니스를 하자는 게 솔직한 바람이다. 극장의 혜택을 받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지 못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요구하지도 않는다.
-배급과 상영을 분리하는 내용의 ‘영화 및 비디오물의 진흥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영비법 개정안)에 대한 입장이 궁금한데.
=영비법 개정안이 불거진 건 그동안 극장을 가진 회사가 투자·배급 사업을 하면서 발생한 여러 폐단 때문이 아닌가 싶다. 수직계열화가 원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뭘 다 하는 건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지만 그러면서 발생하는 폐단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폐단을 없애거나 최소화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서는 찬성한다. 스크린 상한제(특정 영화에 배정하는 스크린 수를 제한하는 방식) 또한 영화계에서 협의가 되면 참여할 것이다.
-이정세 영화사업담당 체제의 메가박스는 그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봐도 되나.
=그렇다. 이제껏 스크린 독과점을 했던 영화도 없고, 앞으로 부득이하게 해야 되는 상황이 생기면 미리 공문을 보내겠다.
-메가박스는 여전히 기존의 부율을 유지하고 있는데 투자 담당으로서 극장에 부율 변경을 요구할 생각은 없나. (웃음) (CJ CGV와 롯데시네마는 한국영화 부율을 55:45(배급사:극장)로 조정했지만, 메가박스는 여전히 기존의 50:50을 유지하고 있다.-편집자).
=오프 더 레코드로 얘기하겠다. (웃음)
-회사가 성장하면서 여름 시장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것 같다. 규모가 큰 영화 없이 여름 시장을 대비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미쓰 와이프> <국가대표2> <동주> <너의 이름은> 등 지난 4년 동안 개봉한 영화의 80%가 성수기에 개봉했다. (웃음) 작품에 맞는 시즌을 정하는 게 우선이고, 큰 시장이 좋다고 해서 그 시장이 다 내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여름 시장에 들어가서 200만 관객만 동원해도 행복하다. 편당 수익률을 높이는 데 집중하고, 라인업을 많이 확보하기보다 하나를 하더라도 알차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천만 관객을 동원하거나 제작비 100억원 규모의 영화를 제작하는 데 관심이 없다.
-일을 할 때 정도를 지키는 스타일로 꽤 유명하던데. 원칙을 중요시하다보니 융통성이 다소 없다는 평가도 있더라.
=합의된 원칙을 벗어나는 배려심이 부족하다면 어쩔 수 없다. 돈을 만지는 일이기 때문에 단순히 상대방과 나와의 일대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여러 사람들이 모두 관여되어 있는 일이기에 내 재량이 커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작업하면서 서로 합의한 내용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화는 망할 수 있지만 정산서는 10원짜리 하나도 정확해야지. 수필름, 다이스필름 등 그간 함께 작업했던 회사 대부분 스스로 희생해 우리와의 약속을 지켰다. 내 원칙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파트너들이 약속을 지켜줬기 때문에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