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 감독의 1982년 영화 <블레이드 러너>는 필립 K. 딕의 1968년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소설의 초반부에는 주인공 릭 데커드가 키우는 전기양에 대한 짧은 언급이 나온다. 박중서의 번역을 인용하면 그 부분은 다음과 같다. “이웃들도 그가 소유한 양의 진짜 움직임을 자세히 조사하지 않았다. 그보다 더 무례한 행동은 없었다. ‘당신의 양은 진짜인가요?’라고 물은 것은, 누군가에게 당신의 치아나 머리카락이나 내부 장기가 검사를 통해 진짜인지 확인받았느냐고 묻는 것보다도 더 무례한 행위였다.” 이 문장들이 암시하는 것처럼 리플리컨트가 존재하는 미래가 있다면, 인간과 리플리컨트가 이분법으로 정확하게 구분되는 세상은 아닐 것이다. 그 경계는 모든 도시의 모습처럼 불확정적이고, 이질적이고, 상호침투하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 인상적인 장면은 경찰 국장 조시(로빈 라이트)가 자신의 부하 리플리컨트 K(라이언 고슬링)에게 던지는 가벼운 추파 혹은 관심을 보이는 경찰서 장면이다. 수사와 관련된 공적인 행동만을 보여주던 조시가 K에게, 어릴 때 생각나는 기억이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주저하던 K는 인위적으로 심어놓은 기억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말하는 것의 민망함을 토로한다. 인간과 무조건 복종하는 리플리컨트 사이에서 아주 잠깐 동안 경계의 모호한 순간이 찾아온다.
소설이 쓰인 시대와 영화가 만들어진 시대 사이에
드니 빌뇌브의 새 영화 <블레이드 러너 2049>는 <블레이드 러너>의 속편 같은 영화다. 두 영화를 통해서 ‘어제의 미래’와 ‘오늘의 미래’가 어떻게 다른지 생각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먼저 영화 속 도시를 단순화해서 비유한다면, 어제의 미래가 ‘콜라주’의 모습이라면 오늘의 미래는 ‘포토숍’의 세계라고 말할 수 있다. 콜라주와 포토숍이 다른 점은 구성 요소들의 차이를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다. 콜라주가 이질적인 요소들을 그대로 드러내는 특징이 있는 반면, 포토숍의 정교한 디지털 도구는 쉽게 대상 이미지를 배경 이미지에 합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해서 균질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가 쓰인 1960년와 70년대는 흥미로운 시대다. 인간이 처음으로 지구 밖에 첫발을 내디뎠고, 젊은이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던 시대이며, 기술문명의 기계부속 같은 삶을 거부하고 자연 속 공동체의 삶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난 시기이고, 또한 성의 해방과 페미니즘의 시대다. 중요한 모든 것이 한꺼번에 일어나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하는 시대다. 정치, 사회, 경제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건축과 도시도 마찬가지로 변혁의 시대 안에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도시화의 현상 속에서 모더니즘 건축의 원대한 비전이 사라진 후, 소비사회 속 유토피아를 꿈꾸는 급진적인 건축부터 과거 도시에 대한 재해석 그리고 모더니즘 건축에 대한 반발로 나타나는 포스트모더니즘 건축 등 다양한 시도들이 나타났다.
<블레이드 러너>는 20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가 배경이다. 저층으로 넓게 퍼져 있고 인종·문화적으로 다핵적인 도시의 특성은 미래에서 더욱 강화된다. 환경이 오염되어 산성비가 자주 내리는 미래의 로스앤젤레스는 인종부터 건물 스타일까지 ‘콜라주’처럼 복잡하고 혼잡하다. 지나치게 혼잡한 도시 모습을 제외한다면 미래 도시라 불릴 수 있는 요소는 리플리컨트를 제조하는 타이렐사의 초거대 건물과 도시 상공을 부유하는 비행체 그리고 하늘을 나는 자동차다. 타이렐사의 거대 건물이 1960년대의 급진 건축 슈퍼스튜디오나 아키줌의 슈퍼건축(superarchitecture)을 연상하게 한다면, 비행체는 아키그램의 움직이는 도시(walking city)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도시에서 가장 거대한 건물이 민간기업의 사옥이라는 점이다. 미래 사회의 권력이 거대 기업이라는 사실은 통제되지 않는 무정부 상태처럼 보이는 미래 도시의 모습을 설명한다.
<블레이드 러너>는 리플리컨트의 생산방식이 서사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눈이나 간 같은 장기를 만들어 납품하는 소규모 생산자가 도시에 퍼져 있다. 타이렐사는 도시에 퍼져 있는 이 부품들을 공급받아 리플리컨트를 완성한다. 죽음을 앞둔 리플리컨트들이 자신들의 생명을 연장시켜줄 수 있다고 믿는 타이렐을 만나기 위해 이 부품 생산자들을 차례로 찾아갔을 때 보이는 공간들은 생산품과 연관되어 있는 각각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도시 속 초거대 건물이란 사실이 60년대 이탈리아의 급진건축을 연상시킨다면, 타이렐사 건물의 피라미드 형태는 20세기 초의 프랑스 건축가 앙리 소바주의 건물을 닮아 있다. 1928년에 소바주가 파리에 계획한 경사 집합주택은 내부에 실내 수영장을 집어넣어 단면이 깊은 건물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이 구조를 통해서 영화 속 건물을 유추해본다면 피라미드 건물의 표면이 사무실이고 내부는 빛이 필요 없는 시설, 즉 리플리컨트 공장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추를 통해서 도시 속 초거대 건물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가능하다. 1982년 <블레이드 러너>는 공간과 서사가 유기적으로 작동하는 미래 세계를 완성하고 있다.
인터넷과 세계화를 통해서 서로 비슷해지는 세상을 경험한 <블레이드 러너 2049>가 바라본 미래 도시는 전편에 비해 균질한 공간들을 보여주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릭 데커드(해리슨 포드)가 사는 카지노 건물을 제외하고 영화 속 건물들이 잘 기억나지 않는 이유가 될 것이다(건물보다는 쓰레기터나 바닷물을 막아주는 댐 같은 풍경이 더 기억난다). 예를 들어서 두 영화 속의 건물을 비교하면 <블레이드 러너>의 피라미드 건물과 <블레이드 러너 2049>의 피라미드 건물은 동일하지 않다. 전편의 건물이 작동하는 기계라는 느낌을 주는 금속 재질로 되어 있고 내부의 기능을 유추할 수 있는 많은 창문들이 보이는 반면에 <블레이드 러너 2049>의 건물은 석재로 이루어진 창문이 없는 단순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건물 내부의 일관된 미니멀리즘 디자인은 기능보다 스타일을 우선한 것 같은 태도를 보여준다.
세리프에서 산세리프의 방향으로
사소할 수도 있지만 영화의 인트로에서 사용되는 글 자체도 두 영화가 다르다. 빌뇌브 영화가 로마자 산세리프로 보이는 글자체라면 <블레이드 러너>는 세리프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학 졸업생에게 한 연설에서도 언급했던 이 두 서체는, 세리프와 비교해 산세리프가 획의 맨 끝에 삐침이 없는 글씨체를 뜻하고 이에 해당하는 한글의 서체는 고딕체다. 중세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리프에 비교해서 산세리프는 비교적 현대적인 서체이고 장식을 제거한 미니멀리즘의 세계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리고 적어도 디자인 측면에서 세상은 점점 산세리프의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 빌뇌브는 전작 <컨택트>(2016)에서 보여준 것처럼 공간을 서사의 내용보다는 이미지로 다루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이미지의 특징은 탐미화 된 미니멀리즘이다.
디자인 분야에서 인터넷의 특징은 정보에 대한 접근의 평준화다. 그리고 포토숍 같은 동일한 디지털 도구의 사용은 이 평준화 현상을 더욱 가속시킨다. 디자인의 측면에서 2000년대 가장 큰 사건 중 하나는 애플의 아이폰이다. 애플 디자인은 세계화 시대의 휴대폰을 통해서 ‘애플이즘’이라 명명할 수도 있는 어떤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모더니즘의 선언 같은 형식도 없이, 미니멀리즘의 세계화를 애플이즘은 이룩해내고 있다. 세상이 가고 있는 한 방향은 세련됨이다. 세상은 점점 표면이 매끈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