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병으로 초토화된 세계가 배경인 <잇 컴스 앳 나잇>은, 공포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는다. 인류를 쓸어버린 병의 이름과 감염 조건도 명백하지 않다. 종말 앞에서 생존본능 외의 것을 서서히 잃어가는 생존자들의 모습이 이 영화의 몬스터다. 그런데, 소품 한점만큼은 부제를 대신할 만큼 노골적이다. 가족이 사는 숲속 집에 걸려 있는 피터르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Triumph of Death) 복제화다. 흑사병에 영감을 받아 그린 브뤼헐의 작품 속에서 초록 기운은 사라졌고 굶주린 개는 어린이의 얼굴을 핥아댄다. 인간은 누구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죽음의 포로일 따름이다. 안구 전체를 까맣게 뒤덮은 병자들의 동공이 영화에서도 재현된다.
11/08
나타우트 푼피리야 감독의 <배드 지니어스>를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하지 않는다면 꽤 놀랄 것 같다. 학업과 과외활동 성적이 빼어난 린(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이 학비가 비싼 사립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하면서 이 커닝 케이퍼는 굴러가기 시작한다. 학교재단은 공부 잘하는 학생과 기부금을 내는 부유한 가정의 아이들에게 입학 정원을 배분해 명예와 돈을 따로 챙긴다. 후자 그룹에 속하는 단짝 그레이스(에이샤 호수완)의 수학성적을 올리기 위해 일회적으로 린이 저지른 부정행위는, 사업가 2세이자 그레이스의 남자친구인 팻(티라돈 수파펀핀요)이 모집해온 넘치는 수요에 힘입어 거액의 아르바이트로 변질된다. 린이 모르는 새 학교가 아버지에게 받은 입학금과 미래의 유학비를 스스로 모아야 한다는 필요가 린의 결단을 부른다. 여기에 고지식하고 가난한 남자 우등생 뱅크(차논 산티네톤쿨)가 변수로 더해진다.
결국 미국 대학입학 자격시험까지 표적을 높여가는 <배드 지니어스>가 종이 쳐도 모르게 재미있는 영화인 이유는 비단 커닝 속임수의 절묘함 때문만은 아니다. 이 대목의 아드레날린 펌핑은 오히려 편집과 음악의 기교에 빚진다. 예컨대 샤프심이 동나는 일이 지축을 흔드는 대재앙으로 느껴지게 부추기는 감독의 재주 같은 것 말이다. 그보다 결정적인 <배드 지니어스>의 관객 주의 장악력은 이치에 닿는 캐릭터 조형과 이에 꼭 맞물린 이야기 기승전결의 설계에서 비롯된다. 린이 그레이스를 만나 변하고 그레이스가 끌어들인 팻이 게임의 리스크를 키우고 마지막으로 린의 경쟁자 뱅크가 가세하면서 전체 이야기의 의미를 확장한다. 모든 인물은 시작한 곳과는 멀리 떨어진, 예상을 미묘하게 벗어난 지점에서 여정을 마무리 짓는다. 딱 4:3:2:1 정도의 극중 비중을 나눠 갖는 <배드 지니어스>의 네 주요 인물은 각기 전형적인 첫인상을 던지며 영화에 입장하지만 신이 거듭될수록 복합성을 드러낸다. 우선 린은 돈과 권력의 압력에 못 이겨 미덕을 버리는 천재 소녀가 아니다. 린은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판단하고 나면, 손에 더러움을 묻히더라도 책임지고 완수하는 용의주도한 실용주의자다. 반대로, 당장의 이익을 위한 ‘일’이 인생 전체를 잡아먹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끼면 깨끗이 물러서는 과단성도 같은 성격의 발로다. 그럼에도 관객은 린의 편에 선다. 평생 난해한 문제를 마주쳐본 적이 없는 소녀에게 극중 프로젝트는 최초로 경험하는 현실의 도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편 린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만 하면 될 거라고 믿어온 수재 뱅크는 신념이 한번 무너지자 반대방향으로 직진한다. 그레이스와 팻은 TV드라마로 질리게 보아온 철없는 부잣집 2세들이지만 그렇다고 홑겹의 캐릭터는 아니다. 그레이스는 아쉬울 것 없이 성장한 사람 특유의 관대함과 상냥함을 갖고 있으며, 어느 순간에는 성적보다 우정을 택한다. 동시에 이는 타인이 자신을 미워하는 걸 못 견디는 성향을 보여주기도 한다. 배우지망생이기도 한 유복한 그레이스는 예쁜 외모와 사교술로 매끄럽게 살아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팻은 일종의 ‘커닝 공구 컨소시엄’을 꾸리는 대목에서 사업가 및 자본가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인물에게는 음험한 꼼수도 쓴다. 그는 사람들을 조정해 목표를 이루는 일에 꽤나 소질 있어 보인다. 나아가 린-뱅크, 린-그레이스, 린-팻의 관계는 고정된 속성을 띠지 않고 변화해간다. 지능이 높고 몸놀림이 날렵하고 넉넉한 마음까지 갖춘 <배드 지니어스>는 주인공과 꼭 닮은 영화다.
11/14
연초부터 영화제에서 재미있던 영화를 적어 내려가다 보면 호러가 유난히 많다 싶었는데, 10월 26일치 <뉴욕타임스> 기사를 보니 2017년은 상업적으로도 미국 박스오피스 사상 호러영화가 가장 큰 입장 수입(7억3300만달러)을 올린 해라고 한다. 제이슨 블룸이 제작한 <겟 아웃> <스플릿> <해피 데스데이>에다가 스티븐 킹 원작의 <그것>이 붐을 일으켰고 <에블린>이나 <마녀>도 반응이 좋았다. 이러다가 할리우드 중급 예산 장르영화가 부흥한다면 호러 장르가 앞줄에 서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트레이 에드워드 슐츠 감독의 <잇 컴스 앳 나잇>도 2017년이 호러의 좋은 빈티지라는 증거로 추가할 만하다. <잇 컴스 앳 나잇>은 대단히 무섭지는 않다. 스타일로 치면 감독의 전작인 가족 드라마 <크리샤>가 더 공포영화스럽다. 약물중독으로 가족의 수치가 된 여성이 식구들에게 어떻게든 받아들여지기 위해 발버둥치는 <크리샤>가 요컨대 추수감사절 가족 호러였다(명절 호러라면 한국에서도 충분히 수작이 나올 법하다). 게다가 부산국제영화제를 찾은 감독이 가족이 사는 집에서 고모가 주연해 찍은 반자전적 작품이라고 소개해 가슴이 더 철렁했다.
<잇 컴스 앳 나잇>은 어찌 보면 <크리샤>를 물구나무 세워놓은 형국이다. 즉, 호러의 세팅으로 시작해 가족에 대한 회의(懷疑)로 페이드아웃한다. 폴(조엘 에저턴)은 아내 사라(카르멘 에조고)와 아들 트래비스(켈빈 해리슨 주니어)를 냉정함과 추진력으로 묵시록적 역병 속에서 지킨다. 장인도 감염되면 처분에 예외가 없고, 가족은 폴이 정한 수칙대로 생활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세 사람은 식수를 구하러 온 남자 윌(크리스토퍼 애벗)의 가족과 서로의 필요에 의해 한집살이를 시작하고, “절박한 인간은 상상도 못할 짓을 할 수 있다”는 전반부 대사는 폴의 가족에게 고스란히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두 아버지의 힘겨루기가 스토리의 큰 부분이지만, 영화는 줄곧 폴의 아들을 프레임 중앙에 배치한다. 트레버 에드워드 슐츠 감독은 가족 이야기를 할 때 아들 위치에 서길 선호하는 듯하다. 소년이라기엔 너무 크고 성인이 되기엔 아직 어린 17살의 트래비스는 종말이 오건 말건, 숲속의 집에 갇힌 채 성인 남성으로 가는 과정의 딜레마를 겪는다. 마초적 아빠와 온화한 윌 사이를 배회하고, 윌 부부의 침실 대화를 엿듣는다. 영화 속 열어서는 안 되는 문, 들어가선 안 되는 숲도 곧장 사춘기의 금기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무엇보다 트래비스가 거치는 제일 가혹한 통과의례는 부모의 허약함과 추함을 직면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잇 컴스 앳 나잇>에서 그 성장의 끝은, 삶의 새로운 장이 아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다지 무서운 영화는 아니라는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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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캔자스주 한 마을에 사는 8살 소년 브라이언(브래디 코베)과 닐(조셉 고든 레빗)은 리틀 야구팀 코치에게 추행당한 후 정반대의 예후를 보인다. 한 아이는 감당하기 힘든 기억을 지워버리고, 다른 아이는 문제의 경험을 본인의 선택이었다고 내면화한 채 성년의 문턱에 들어선다. 과거를 깡그리 잊은 소년은 섹슈얼리티가 결여된 청년으로 자라고, 무시무시하게 명징히 기억하는 소년은 매춘으로 10대를 보낸다. 하지만 <미스테리어스 스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피해자들이 죽거나 망가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둘은 서로를 찾아나서고 위로할 수 있는 인간으로 성장한다. 기억 속의 집으로 돌아간 브라이언과 닐의 귀에는, 이제 그만 편히 쉬어도 좋다는 듯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들려온다. <미스테리어스 스킨>은 뜻밖의 아름다운 크리스마스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