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스코프]
도쿄국제영화제 가와세 나오미 감독 마스터클래스
2017-11-23
글 : 임수연
영화는 시간을 잡아두고 시간을 자른다
사진 2017 TIFF

30주년을 맞은 도쿄국제영화제의 피크라 할 수 있는 주말. 마스터클래스의 주인공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었다. 10월 28일 롯폰기 힐스에서 ‘가와세 나오미 스페셜 토크’가 약 3시간 동안 열렸다. 적잖은 시간이 소요됐음에도 불구하고 준비된 의자가 모자랄 만큼 많은 관객,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 영화인, 기자들이 자리에 참석했다. 한편의 장편과 두편의 단편이 상영됐고, 막간의 휴식시간을 가진 뒤 두번에 걸쳐 토크가 진행됐다.

먼저 가와세 나오미가 집행위원장으로 있는 나라국제영화제의 프로젝트 지원작 <동쪽 늑대>(제작 가와세 나오미, 감독 카를로스 마차도 퀸테라, 2016)를 상영한 후, 주연을 맡은 후지 다쓰야와 가와세 나오미가 30여분간 대담을 가졌다. 히가시 요시노의 한 숲을 배경으로 촬영한 <동쪽 늑대>는 멸종됐다고 알려진 늑대가 아직 살아 있다고 믿는 사냥꾼에 대한 이야기다. 캐스팅 당시 에피소드, 모호한 결말에 대한 배우의 해석 등 때로는 유쾌하고 때로는 진지한 이야기가 오갔다.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초청작이었던 가와세 나오미의 연출작 <빛나는>(2017)이 올해 도쿄국제영화제에서도 상영됐다. <빛나는>은 시력을 잃어가는 포토그래퍼 마사야(나가세 마사토시), 그리고 시각장애인의 영화 감상을 돕기 위해 음성해설을 녹음하는 내레이터 미사코(미사키 아야메)가 갈등을 넘어 소통하고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다. 초반 미사코가 음성 가이드를 녹음할 때 등장하는 영화 속 영화 <그 모래의 행방>을 15여분간 감상한 후 본격적인 마스터클래스가 진행됐다. 가와세 나오미는 “<빛나는>을 찍기 전 이틀 만에 촬영을 마쳤다. 미사키 아야메의 음성해설 녹음도 함께 진행했는데, 사실상 이 때 <빛나는>의 촬영이 함께 시작된 거나 마찬가지”라며 <그 모래의 행방>의 제작 과정을 소개했다. 음성 가이드 녹음을 전제한 촬영현장은 평소와는 여러 면에서 달랐다. 가령 테이블 위에 유리잔을 놓은 모습을 찍을 때 이에 상응하는 음성해설이 지나치게 장황하거나 빈약해지지 않게 먼저 고민해야 했다는 것. 가와세 나오미는 “원래 내가 영화를 찍던 방식이 아니었다. 나의 영화라기보다는 극중 <그 모래의 행방>을 연출한 기타바야시(후지 다쓰야)의 작품이라고 해야 할 것”이라고 부연해 설명했다.

사진 2017 TIFF

가와세 나오미 감독 특유의 연출법에 대한 이야기는 단편의 촬영 비화를 소개한 이후에 이어졌다. 가와세 나오미는 “절대 촬영현장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는다. 메이킹 필름도 찍을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카메라 이외의 눈이 존재하면 배우가 연기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심지어 감독이 ‘레디, 액션!’ 같은 지시도 내리지 않기 때문에 촬영이 시작됐음에도 불구하고 스탭이 엑스트라처럼 지나다니는 일도 있었다는 에피소드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의 현장은 마치 다큐멘터리를 찍는 것처럼 배우가 대사를 시작하는 순간을 기다리게 된다. “현장에서 먹이를 노리는 사냥꾼의 마음으로 그냥 앉아서 모니터만 본다. 작은 목소리로 촬영감독에게 카메라 각도에 대해 약간의 디렉션을 주는 게 다다.” 시나리오의 대사를 철저히 따라가지 않기도 한다. <빛나는>에서 <그 모래의 행방>의 테스트 상영 이후 미사코와 시각장애인들이 의견을 나누는 장면은 실제 맹인들이 즉흥적으로 한 말이 포함돼 있다.

가와세 나오미가 카메라 앞에 선 배우에게 기다리고 또 기다리게 하는 것은 기술적인 연기 때문이 아니다. 배우 각자에게 축적된 경험과 감정이 그에게는 훨씬 더 중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촬영현장에서 후지 다쓰야가 미사키 아야메에게 연기 조언을 해준 일화를 소개했다. 가와세 나오미는 연기 경험이 거의 없는 모델 출신의 미사키 아야메에게 종종 “대사를 읽기만 한다.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따끔한 지적을 하곤 했다. 이런 광경을 지켜본 후지 다쓰야는 “지금 감독이 너무 싫어서 죽이고 싶다는 거 안다. 오노 마치코(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수자쿠>(1997), <너를 보내는 숲>(2007) 등에 출연)도 거친 일”이라고 농담을 던진 후 미사케 아야메에게 이런 말을 전했다. “배우는 많은 경험을 해나가며 마음의 주름을 늘려나가는 직업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런 경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마음의 주름을 만들어가는 훈련은 카메라 앞뿐만 아니라 사생활에서도 부단히 해나가야 한다.” 가와세 나오미는 후지 다쓰야의 배우론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마지막으로 가와세 나오미는 30년 전 오사카 사진 전문학교 시절 8mm필름으로 처음 찍은 영상을 관객에게 공개했다. 한번도 카메라를 들어본 적이 없는 그가 당시 받은 과제는 ‘오사카 거리에 나가 관심이 가는 것을 담는다’였다고 한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나갔고, 사람들이 촬영을 허락하면 찍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섭기도 했다. 하지만 그저 카메라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가와세 나오미는 카메라가 곧 자신의 시각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피사체를 찍는 방식이 곧 18살의 내가 그날 그 시간에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보여줬다”는 것이다. 그렇게 촬영된 영상은 며칠이 지나고 몇년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 있다. “영화는 과거를 잡아두는 타임머신과 같다. 시간을 잡아두고, 시간을 자를 수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의 본질이다. 다큐멘터리든 픽션이든 영화를 찍는 순간 나는 그 현장에 살아 있고, 당시의 내가 어땠는지가 영화에 고스란히 새겨진다.”

개인의 정체성을 비추는 영화의 특성은 원래 농구를 했던 가와세 나오미가 감독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그는 어릴 적 부모가 부재했던 가정사로 잘 알려져 있다. 그리고 아버지를 찾아나가는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따뜻한 포옹>(1992)을 비롯해 개인의 경험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반영해왔다. 그리고 마스터클래스를 마무리하며 그가 남긴 말은 영화가 곧 삶을 버티기 위한 작업이었음을 보여준다. “나는 내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엄마는 날 낳자마자 떠났다. 부모 없이 자라며 내가 도대체 왜 태어났고 왜 살아가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어디에서도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방황하던 그 시절 영화가 나에게 다가왔다. 내가 찍는 영화는 결국 내가 어떤 사람인지 보여줬다. 내가 영화감독이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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