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2017-12-06
글 : 김혜리|
[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용한 열정>

집 주변을 거의 벗어나는 일 없이 평생을 지낸 시인 에밀리 디킨슨에 관한 영화 <조용한 열정>에는 시간의 흐름을 축약하는 ‘간주’가 들어 있다. 디킨슨가의 부모와 삼남매가 한 사람씩 사진관에서 초상을 찍는 시퀀스다. 정물처럼 앉아 있는 인물에게 카메라가 느리게 미끄러져 다가가는 동안, 젊은 배우의 얼굴은 같은 인물의 중년을 연기한 배우의 얼굴로 모핑(morphing)된다. 인물은 완전히 정지해 있는 가운데 우주의 운행이 그를 스치고 간다. 숏의 처음부터 끝까지 배우의 얼굴은 한줌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지만, 멜랑콜리가 땅거미처럼 스크린에 드리운다. 과연, 바깥세상을 접촉하지 않았던 시인에게 가족의 변화는 곧장 세계의 변화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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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국상 감독의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13살에 일찌감치 운명의 상대를 발견한 두 여자 칠월(마사순)과 안생(주동우)의 이야기다. 교련 수업 중 안생의 장난을 계기로 만난 둘은, 이내 똑같은 운동화를 맞춰 신고 (영원히 헤어지지 않도록) 서로의 그림자를 밟는 단짝이 된다. 칠월의 부모도 가정이 불우한 안생을 딱하게 여겨 아낌없이 정을 베푼다. 칠월은 성실한 모범생이고 안생은 장난꾸러기다. 영화 초반 어린 칠월이 만두소만 쏙 빼먹어 부모에게 타박을 듣자, 안생이 재빨리 만두피를 좋아한다고 집어먹는 장면을 보며 나는 문득 두 소녀가 친구의 결핍을 채워 꼭 필요한 존재가 되려고 더욱 대조적인 사람이 되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고교에 진학한 칠월은 성실하게 표준적 인생의 진도를 나아가고, 곧장 직업세계에 뛰어든 안생은 보헤미안들과 어울린다. 이즈음 둘의 세계에 칠월의 동급생인 잘생기고 착한 소년 가명(이정빈)이 발을 들인다. “칠월이 어디가 좋아? 칠월이는 네 어디가 좋대?” 처음 소개받은 안생과 가명이 교환하는 똑같은 질문이 예고하듯, 셋은 한 사람이 나머지 둘을 좋아하는 마음이 팽팽한 정삼각형을 이룬다.



아니,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가명에게 먼저 구애한 칠월은 안생과 가명 사이에 발생한 특별한 감정을 알아차리지만 두 사람 다 놓지 못한다. 안생은 마치 스스로를 벌하듯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떠돈다. 그러면서도 엽서 말미에 꼬박꼬박 “가명에게 안부 전해”라고 씀으로써 “남자와 직접 연락하는 일은 없지만 내게도 그는 아직 중요하다”는 언외언을 타전한다. 주동우의 연기는 <애수>의 비비안 리를 연상시킬 지경이다. 안생의 방랑과 칠월의 기다림은 치열한 전쟁이다. 반면 갈등의 뇌관인 남자주인공 가명은 놀랄 만큼 무색무취해서 영화 내내 완벽한 중립과 균형을 유지하는 것 외에 개성도 의지도 드러내지 않는다. 모르긴 해도 이정빈의 연기 목표는, 두 여주인공의 애정을 정당화하면서 관객의 반감은 일으키지 않는 선을 엄수하는 게 아니었을까 싶다. 요컨대 가명은 매력적 주체라기보다 고전적 멜로드라마에 필수적인, 두 연인을 갈라놓아 사랑을 절절하게 고조시키는 장애물에 가깝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레즈비언 영화가 개봉할 수 없는 중국적 조건이 만들어낸 흥미로운 이종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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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전통적인 최루성 사랑영화의 공식을 따르지만,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여러 차례 반전이 있어 주의를 늦출 수 없는 이야기다. 그리고 칠월과 안생, 두 사람의 스토리 라인에 고루 배분된 반전들은 여성을 묘사하는 관점과 관련돼 있다. 영화는 칠월을 순응적 여성의 전형으로, 안생을 ‘나쁜 여자’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로의 삶에 대한 동경이 점점 현실로 변하는 후반부에 들어서면 사태는 역전된다.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던 칠월은 안생의 여정을 고스란히 뒤밟으며 “흔들리는 삶이 내게 잘 맞는다”는 인식에 도달한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이미 관객이 목격한 야무진 됨됨이로 낯선 곳에서 일하는 칠월의 모습은 전혀 부자연스럽지 않다.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기를 고집하던 안생은 떠돌이 경험에서 얻은 생활력을 누군가를 책임지고 돌보는 데에 발휘한다. 역시 뜻밖에도 납득이 어렵지 않다.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는 그렇게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여성성의 숨은 잠재력과 폭을 배우들의 좋은 연기에 힘입어 설득해낸다. 특정 인물의 행방과 그 정보 차단에 관한 마지막 장의 플롯은 무리수지만 <안녕, 나의 소울메이트>에는 단점에 눈감게 하는 여러 미덕이 있다. 여러모로, 지난주의 <배드 지니어스>에 이어 한국 장르영화의 상대적 지체를 돌아보게 하는 아시아 대중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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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하게 남아 있는 에밀리 디킨슨(1830~85)의 사진을 보면 비슷한 시대가 배경인 영화 <피아노>의 주인공 에이다(홀리 헌터)가 떠오른다. 실제로 제인 캠피온 감독은 에밀리 디킨슨에게서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마이클 니먼이 작곡한 영화음악에도 디킨슨의 작품에서 따온 제목이 붙어 있다). 6살 때부터 말을 잃은 미혼모 에이다는 본인의 바람과 무관하게 대양을 건너 생면부지 뉴질랜드 남자의 아내가 된다. 그녀의 자아와 욕망을 표현하는 유일한 길은 피아노고, 에밀리 디킨슨에게 그것은 운문이었다. 에이다와 에밀리의 저항은 지극히 고요하지만 어떤 혁명가의 거사보다 완강하다.



테렌스 데이비스 감독이 최초로 실존 인물을 다룬 <조용한 열정>은 완벽한 대칭 구도의 숏으로 시작한다. 당시 미국 여성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교육을 제공했던 홀리오크 학교의 교장 메리 라이언이 기독교 신앙을 영접한 학생과 앞으로 받아들이고자 희망하는 학생을 오른편과 왼편으로 갈라놓는다. 모두가 양쪽으로 비껴난 공간 중앙에 홀로 남은 에밀리(에마 벨)는 지극히 고독해 보이지만 이 이미지에는 유일무이한 영혼의 위풍당당함도 있다. 그녀는 180도 맞은편의 중앙에 서 있는 교장에게, 자신의 지성과 감정에 문제를 회부한 결과 개심할 수 없노라 말한다. 세속적 구도자의 험한 앞길이 눈에 선한 순간이다. 에밀리 디킨슨은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둘 회심한 다음에도 끝까지 교회의 품에 안기지 않았다고 전기작가들은 전한다. 종교로부터의 해방은 테렌스 데이비스가 이 19세기 시인과 교감한 첫 번째 지점일 것이다. 리버풀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게이로서, 폭력적인 아버지와 성당의 규범에 저항하며 어렵게 정체성을 형성한 데이비스는 “내게 영혼이 있음은 확실한데 신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7년간 고민한 끝에 무신론을 택했다고 여러 차례 밝혔다. 두 예술가의 또 다른 공통점은 가족과의 비상한 유대다. 일곱명이 살아남은 열 남매 중 예민한 막내였던 감독은 어린 시절 집에서 떨어진 기숙학교에 보내졌다가 심하게 앓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를 향한 미움으로 배가된 어머니를 향한 사랑, 형제자매와의 친밀한 유대가 소년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홀리오크 학교를 그만두는 에밀리의 얼굴도 오직 기쁨으로 빛난다. 딸과 누이를 데리러 온 가족들에게도 책망의 기색은 없다.



에밀리 디킨슨이 55살까지 평생을 보낸 아머스트의 집은 시대와 사회의 요구에 문을 닫아 걸어버린 단호한 정신의 첨탑이고 요새였다. <먼 목소리, 고요한 삶> <긴 하루의 끝> <오브 타임 앤 시티> 등 자전적 작품을 제외한 테렌스 데이비스 영화의 주인공이 대부분 여성이라는 점도 덧붙일 수 있다. 감독이 시네마와 처음 사랑에 빠질 무렵 대중을 사로잡은 영화들은 <거대한 강박관념> 같은 여성 중심 멜로드라마들이었다. <먼지의 집> <딥 블루 씨> 같은 데이비스의 여성영화 주인공들은 이상을 버리지 못해 현실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역설적으로 그럼으로써 주인된 삶을 살거나 적어도 자기만의 죽음을 죽는다. 에밀리 디킨슨도 예외가 아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실례이긴 하지만, 테렌스 데이비스는 생전에 합당한 평가와 명성을 누리지 못하는 예술가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게 통찰할 수 있는 감독일 것이다. 70대에 들어선 테렌스 데이비스는 현존하는 최고의 멜로드라마 거장임에도 매번 제작비를 구하지 못해 40년간 단 아홉편의 장편을 완성하는 데에 그쳤다. 같은 영국 거장 켄 로치와 마이크 리가 누린 명성과 인정도 그를 비스듬히 비껴갔다. 극중에서 중년의 에밀리(신시아 닉슨)는 자신의 시를 워즈워스 목사에게 보여주며 거기 모종의 가치가 있는지 초조히 묻는다. 그리고 출간된 작품이 적다고 놀라는 목사에게 말한다. “내가 가진 것을 아무도 원하지 않으면 금욕적(stoic)이 되는 건 어렵지 않아요. 사후 평가란 것이 있긴 하죠. 신의 존재처럼 도움이 되지 않지만요.” 그녀의 초탈에서 데이비스의 목소리를 듣는 관객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조용한 열정>은 먼저 죽은 다른 예술가의 혼에서 자신의 거울 이미지를 발견한 한 예술가가 쓴 위령의 시이기도 하다.








창문은 감독 테렌스 데이비스의 가장 중요한 시각적 어휘 중 하나다. 대가족의 막내로서 실내에서 긴 시간을 보내야 했던 유년기가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많은 영화에서 창은 프레임 속 프레임의 기능을 하지만 테렌스 데이비스 영화에서는 서사 장치이기도 하다. 내성적 인물이 외계로부터 고립을 확인하는 장소이자 희망이 시작되는 전망대이기 때문이다. <조용한 열정>에서도 가히 ‘시네마의 베르메르’라고 할 만한 감독의 취향은 변함없다(맨 위부터 <아이들> <먼 목소리, 고요한 삶> <긴 하루의 끝> <딥 블루 씨> <조용한 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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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덴버의 해



영화로 따지면 2017년의 가수왕은 존 덴버다. 1997년 비행기 사고로 타계한 그의 <Annie’s Song>은 <옥자>의 지하상가 추격전 시퀀스 위로 고즈넉이 흐르더니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논스톱 총격전 <프리 파이어>에도 두 차례 플레이된다. 봉준호 감독은 인터뷰에서 가장 겁에 질리고 수줍은 캐릭터가 의도와 무관하게 사람들을 밀치고 집기를 부수는 장면에 이 목가적 노래가 어울린다고 판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프리 파이어>의 벤 휘틀리는 폐허에서 한 남자가 죽어가고 있을 때 흘러나오면 가장 어이없을 만한 곡이라 선정했다고 설명했다. “남은 힘으로 저걸 꺼? 말아?” 갈등할 만한. 뿐만 아니라 존 덴버의 또 다른 대표곡 <Take Me Home, Country Roads>는 <에이리언: 커버넌트>에서 탐사대원들을 위험한 행성으로 끌어들이는 세이렌의 노래로 등장하더니 스티븐 소더버그의 신작 <로건 러키>에서도 오프닝과 엔딩을 장식했다고 한다. 미국 동업자들을 끌어들인 <킹스맨: 골든 서클>도 미국의 이상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Annie’s Song>과 <Take Me Home, Country Roads>를 사운드트랙에 포함시켰다. 한해동안 노래 가사대로 “빗속의 산책처럼, 사막의 폭풍처럼” 우리의 감각을 채워준 존 덴버에게 공로상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