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리처드 커티스 / 출연 휴 그랜트, 키라 나이틀리, 콜린 퍼스, 에마 톰슨 / 제작연도 2003년
“주소를 보내주세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드리겠습니다.”
2003년 12월, 싸이월드에서 일촌을 맺고 있던 이들에게 쪽지를 보낸 적이 있다. 단 두줄의 메시지에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곧장 주소를 적어 답을 준 사람도 있었지만, 무슨 선물인지, 왜 주는 건지 의심에 차서 되묻는 사람도 있었다. 일촌이라고 해도 친분의 깊이는 조금씩 달랐으니 그럴 법도 했다. 개의치 않고 상대를 안심시킨(?) 뒤 주소를 받았다. 그리고 선물 준비에 착수했다. 그건 다름 아닌 ‘크리스마스카드 쓰기’. 그해 겨울에만 40여장의 우표를 썼다.
이런 일화에 근거하면 나는 적극적이고 사교적인 인간이어야 하겠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살면서 친구가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는데, 정말 친구가 많아서라기보다는 이미 충분하다고 여겨왔기 때문이다. 대학 시절부터 몇년 간격으로 적성검사를 몇번씩 받을 때마다 결과는 어김없이 ‘내향성’이었다.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선물 이벤트는 나로서도 이례적인 행동이었던 거다. 생각도 많고 겁도 많고 관계에 대해선 다소 방어적이기까지 했던 내가 이런 작당을 하기까지, 그 배경엔 <러브 액츄얼리>가 있었다.
21살의 겨울에 보았던 그 영화가 마냥 좋았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1분짜리 연애 사연에도 귀가 솔깃해지거늘 영화에서는 십수명의 사람들이 나와서 사랑 이야기를 쏟아냈다. 이전까지 경험한 적 없는 물량공세에 감정이 한없이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영화 속에 넘쳐났던 건 낭만적 사랑이라기보단 정확히는 ‘고백의 행위’였더라. 인물들은 하나같이 “좋아해요” 또는 “고마워”라고 말하기 위해 각자의 난관 속에서 고군분투했다. 고백의 끝에 새드엔딩 아니면 해피엔딩 두 가지 결과만 있다고 믿었던 나는, 영화를 통해 마음을 표현하는 것 자체가 갖는 힘을 들여다보게 됐다.
크리스마스카드를 보내고 일주일쯤 지나서였나, 친구의 친구로 알게 돼 인사만 하고 지내던 일촌 하나가 전화를 걸어왔다. 순간 당황했으나, “야! 진짜 보낼 줄 몰랐어!”라는 흥분된 목소리를 듣고 나서 이내 기분이 좋아졌다. 그날 이후 우리는 서로를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싸이월드 쪽지로 ‘잘 받았다’고 간단히 답을 했고, 내가 보낸 것보다 훨씬 크고 화려한 카드에 답장을 보낸 이도 있었다. 물론, 아무 답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이후로도 매년 12월이 되면 나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쓴다. 매주 보면서 호감은 있었지만 인사만 하기에 바빴던 게스트에게, 많이 고마워도 일상의 대화만 나누기 바빴던 작가에게, 크리스마스를 핑계로 당신이 좋다고, 그동안 고마웠다고 이야기한다. 변함없이 나는 내향적 인간이고,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크리스마스는 소중한 구실이자 기회다. 가끔씩 행운이 깃들어 ‘일하는 사이’에서 ‘친구’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그럴 때면 기쁨을 누리는 동시에 소심한 스스로를 격려한다. ‘고백하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멋진 거야.’
사랑이 어디에나 있다는 말(Love actually is all around)은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 도처에 있다는 말과도 같이 들린다. 표현을 주저할 이유는 많지 않음을, <러브 액츄얼리>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최다은 SBS 라디오 PD. 작곡을 전공하고 라디오 PD가 되었다. 어쩌다보니 영화배우, 영화평론가가 DJ를 맡은 프로그램을 계속 담당해왔고, 지금은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을 운영하며 영화음악 이야기를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