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이 하는 스릴러, 나라면 투자는 못했을 거다.” <기억의 밤> 개봉 당일 아침장항준 감독이 시나리오만 보고 투자를 결심해준 사람들에게 고마움을 전하며 말했다. <기억의 밤>은 극장 영화로는 <불어라 봄바람>(2003), 케이블 TV용 영화까지 포함하면 <전투의 매너>(2008), <음란한 사회>(2008) 이후 오랜만의 복귀작인 데다가, 그의 전공인 코미디가 아니라 웃음기 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다. 하지만 그가 드라마 <싸인>(2010)의 연출 및 극본을 맡았다는 점을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장항준 감독과 서늘한 장르물 사이에는 중요한 접점이 있다. 극을 이끄는 삼수생 진석(강하늘)은 90년대 어느 중산층 가족의 일원이다. 그는 괴한에게 납치당한 후 19일 만에 돌아온 형 유석(김무열)의 이상한 행동을 감지하며 점점 평정심을 잃는다. 거의 호러영화에 가깝게 연출되는 형제의 이야기는 결국 90년대가 가진 어두운 일면으로 이어진다. “어떤 가족의 이야기를 다루기 위해서는 90년대가 필요했고, 당시 20대였던 나는 무엇이든 가능하던 사회가 한없이 붕괴하는 것을 바라보며 공포를 느꼈다.” 다시 말해 <기억의 밤>의 장르적 색깔은, 90년대가 장항준 감독에게 남긴 가장 중요한 기억 중 하나인 것이다.
-TV에서 연출한 <무한상사: 위기의 회사원>으로 몸을 풀었다고 해도 오랜만의 현장 복귀다.
=드라마 연출을 할 때 생방송 촬영으로 잠을 못 자도 그렇게까지 힘들지는 않았는데, <무한상사: 위기의 회사원>은 진짜 힘들었다. <무한도전> 멤버와 카메오로 출연한 배우들, 그리고 장소 스케줄이 모두 맞아야 촬영이 가능한데 그걸 조화롭게 맞추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정말 혼란스러웠다. 낮에서 밤으로, 실외 장면을 실내로 바꿔가면서 영화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기억의 밤>을 하니까 너무 편하더라. 요즘은 표준근로계약서 때문에 12시간만 촬영하는데 이게 완전 내 스타일이다. (웃음) 친한 감독들이 “무언가 하려고 하면 촬영을 끝내야 해서 아마 노이로제에 걸릴 것”이라고 겁을 줬는데 “이제 촬영 그만하고 놀았으면 좋겠다!” 싶을 때 끝났다.
-영화 연출을 쉬는 동안 충무로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
=단시간에 찍어야 한다는 것을 아니까 예전보다 준비를 훨씬 꼼꼼하게 한다. 서동진 조감독이 조감독만 7편을 했는데, 완전 베테랑이다. 카메라워크부터 동선까지 촬영감독과 다 맞춰놓은 후 나에게 딱 보여준다. “마음에 안 드시면 수정하겠습니다.” 뭐지? 할리우드인가? (웃음) 덕분에 오롯이 작품에 집중할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사람이 존중받으면서 즐겁게 일하는 것을 선호한다. 악에 받쳐서 어린아이를 물에 빠뜨리고 울리면서 찍고 싶지 않다. 영화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아역배우가 고생을 할 것 같으면 설정을 바꾸든지 그 장면을 아예 안 찍는다. 범죄자 연기를 한다며 너무 무섭게 몰입하는 메소드 연기, 이런 거 좀 골치 아프다. (웃음) 다행히도 강하늘이나 김무열 모두 그런 타입이 아니다.
-하지만 후반부는 다루는 감정이 꽤 센 편이라 다른 방식의 준비가 필요했을 텐데.
=영화 들어가기 전에 각자 다른 날 배우들을 방으로 불러 시나리오를 펴서 신별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혹시 고치고 싶은 게 있느냐, 난 이런 부분은 네 원래 말투로 바꿨으면 좋겠는데 어떠냐, 없어졌으면 하거나 추가했으면 하는 장면이 있느냐 등등. 그렇게 매 장면 배우와 감독이 원하는 방향이 같아지게 했다. 결국 배우들이 거의 다 자기 말투로 연기하며 영화를 찍었다. 내가 쓴 시나리오는 그냥 텍스트다. 연기는 자기의 언어로 해야 한다.
-현장 밖에서도 좋은 소식이 있었다. 넷플릭스가 시나리오만 보고 판권을 구입했다.
=그렇게 계약을 체결한 건 한국영화 중 처음이었다더라. 조건도 엄청 좋다. 극장 상영이 끝나고 3개월간 IPTV 수익도 우리가 모두 가져가고 그다음에 넷플릭스에서 상영한다. 아마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출연 예능을 봤을 리도 만무하니 판권을 산 것 같다. (웃음) 덕분에 원래 170만명이었던 손익분기점도 120만명까지 떨어졌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큰 규모로 찍은 영화가 아니라서 예산을 어디에 쓰고 쓰지 말아야 할지 결정하는 게 중요했겠다.
=조감독과 PD에게 우리가 돈을 허투루 써서 날리면 진짜 돈을 써야 할 때 못 쓴다, 정말 잘해야 한다고 얘기했다. 카체이싱 장면의 경우, 대로는 익산인데 골목으로 꺾으면 인천이다. 저쪽으로 돌면 수원이 나온다. 한곳에서 다 찍기에는 촬영 여건이 좋지 않아 골목이 꺾일 때마다 로케이션이 바뀌었다. 진석이 파출소 앞길을 달리는 장면은 진짜 힘들었다. 파출소 외벽을 데커레이션할 돈이 없으니 진짜 파출소 앞에 갑자기 차가 달려올 수 있는 길이 있는 곳곳을 찾았다. 물차가 두대 오고 강우기를 위에 올리고 호스를 100m 정도 끌어왔는데, 이날 촬영을 못하면 거의 2천만~3천만원이 깨지는 거였다. 우리에게는 너무 큰돈이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인건비도 있는 데다가 지자체와 동네 주민들에게 일일이 허락을 받은 상태였다. (강)하늘이가 갑자기 햄스트링이 파열되는 부상을 입었다. 그런데 무조건 촬영하겠다고 하더라. 아마 풍족한 현장이었다면 촬영을 접었을 텐데. 그래서 논의 끝에 진석이 다리를 다쳐서 절뚝거리며 뛰는 설정을 넣었다. 오히려 서스펜스가 더 가중될 수 있을 거라고.
-작품의 규모에 비해 스릴러 효과가 확실한 장면들이 눈에 띈다. 유석이 19일 만에 집에 돌아오기 전 거의 모든 관객이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 있다. 대체로 엄숙하게 흘러가는 언론 배급 시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VIP 시사회 때도 뒤에 앉은 여자 관객이 별거 아닌 장면인데 쿵 소리만 들려도 “으악!” 하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누군지 확인했더니 전도연씨였다. (웃음) 뒤풀이에서도 그 명배우가 “감독님 미안하다. 내가 너무 소리를 질러서 창피해 죽겠다”고 하고. 관객은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라는 걸 알고 있다. 이 집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본다. 그러면 형과 아빠, 엄마가 용의선상에 떠오를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왠지 수상한 방으로 시선을 돌린 거다. 만약 작은 방쪽에 라인이 없었다면 가족들에게만 시선을 집중시켜 반전 예측이 보다 용이한 형태로 나왔을 테고, 영화는 다르게 진전됐어야 했을 거다. 관객이 비명을 지른 그 장면은 진석이 가장 두려워하던 어떤 기억이 형체를 띠며 나타난 결과다. 진석이 공포를 느끼고 놀란 만큼 관객도 함께 놀라길 바랐다.
-서스펜스가 필요한 장면에서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숏으로, 종종 아주 극단적으로까지 잡는 경우가 많았다. 배우가 연기를 잘해줘야 영화의 긴장감이 살아났을 연출인데.
=우선 강하늘, 김무열, 문성근, 나영희 모두 연기력만 믿고 선택했다. 그래서 장르적인 연기를 잘해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고, 실제로도 잘해줬다. 유석이 샤프심으로 진석의 눈을 찌르려고 하는 장면부터 클로즈업이 빈번하게 활용된다. 유석이 좋은 형처럼 비춰질 때는 풀숏이나 바스트숏으로 담다가, 공간 자체가 낯설고 형도 낯설게 느껴져야 할 때부터 가장 낯선 카메라 방식을 쓴 거다.
-대부분의 사건이 집에서 벌어진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에 노트에 집을 먼저 그렸다. 1층부터 2층까지 방 구조, 화장실과 계단의 위치까지. 이렇게 해야 인물들의 동선이 그려지고 시나리오를 쓸 수 있으니까. 이곳에 있을 때 저기가 보일까? 형을 바라볼 때 침대와 책상은 어디에 있어야 하지? 형이 집을 나갈 때 어떻게 보지? 이렇게 공간을 만든 후 인테리어 디자이너에게 검수를 받았다. 실제로 불가능한 구조는 수정한 후 시나리오에 반영하고, 집은 그 이후에 찾았다. 제작부가 네팀으로 나뉘어 거의 6개월 동안 전국을 뒤져서 집을 찾았다. 영화 내용상 집 주변 도로의 위치도 중요했고, 현대식 집은 또 안 된다. 인천에서 겨우 적당한 집을 찾았는데 이번에는 외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외관은 CG로 처리했다.
-핵심 반전이 드러나는 장소를 파출소로 설정한 이유는.
=진석에게 가장 안전한 공간이었다. 일부러 평상시의 파출소보다 북적거리는 느낌이 나게 연출했다. 정체 모를 사람들이 자신을 속였고, 정상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 공권력의 보호를 받는 진석이 안심하게 되는 거다. 경찰은 사심이 담긴 질문을 하지 않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진석이 경계해왔던 사람들의 정체가 드러나겠구나 하고 관객이 예상할 때쯤, 다른 사실이 대신 드러난다.
-2017년이라는 배경을 보여줄 때 문재인 대통령의 미국 방문 뉴스가 활용된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기 전에 쓴 시나리오가 그대로 실현됐다. 정말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이 되고, 정말로 백악관에 갔다. 생각해보니 <기억의 밤>은 넷플릭스에서도 상영되지 않나. 그럼 트럼프 미 대통령도 필요하겠다고 생각해서 두 사람이 함께 나오는 자료화면을 받았다. 트럼프는 2017년 전세계가 갖고 있는 가장 큰 딜레마적 아이콘이다. 가장 확실한 2017년의 상징인 것이다.
-사실 전반적으로 관객에게 반응이 더 좋은 초·중반의 장르적 색깔을 더 강조하고 사건의 내막에 대한 설명을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후반 드라마에 할애한 분량을 보면 이 이야기를 꼭 다루고 싶었다는 창작자의 고집이 보이더라.
=솔직히 말하면, 스릴러란 장르는 도구일 뿐이다. 무엇을 이야기할지가 결국 중요하다.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다. 재미있는 영화는 점점 호흡이 빨라지다가 마지막에 한방을 줘야 하는데 <기억의 밤>은 반대로 간다고. 열심히 달리다가 중간에 딱 끊은 후 천천히 가지 않나. 이것이 흥행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정말 무섭고 흥행이 될 만한 걸 찍고 싶었다면 <월하의 공동묘지>(1967)를 리메이크했겠지. (웃음) 그만큼 나에게는 이 얘기가 중요했다.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감정이나 시대의 비극, 왜 그럴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그렇게 보여준 것이 90년대가 가진 어두운 면이다. 그동안 대중문화 영역에서 대체로 90년대는 낭만적으로 회고됐다. <건축학개론>(2012),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 <무한도전>의 ‘토토가’가 대표적이지 않나. <기억의 밤>은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여주는 셈이다.
=<기억의 밤>은 결국 중산층 가족의 붕괴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는 가족이 등장하지만 가족의 실체가 없다. 90년대가 바로 중산층이 무너지고 가족의 해체가 급속도로 진행된 시기다. 90년대 중반까지는 경제적으로 정점을 찍고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영화 및 음악이 쏟아져 나오는 등 안 되는 게 없었다. 그렇게 즐기다가 1997년 IMF를 겪으면서 모든 것이 파괴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90년대에 대한 기억은 어떤가.
=1992년에 대학을 졸업했다. IMF 당시에는 사회인이었다. 금융 위기의 여파를 정면으로 맞고, 주변 사람들의 딜레마도 목격했다. 그 여파가 남아 있던 98년 4월에 결혼을 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동문 고등학교에서 우리 부부에게 신혼여행을 보내주겠다며 초청했다. 당시 환율이 2천원대라 미국 가면 햄버거도 못 먹을 판이었다. 어렵사리 돈을 모아서 비자를 받으러 대사관에 갔는데 거절당했다. 망한 나라에서 미국에 가겠다는 의도가 불순했던 거지. 전쟁은 이유라도 있지 이건 아무 경고도 받지 못한 채 맛본 공포였다. 눈부신 한강의 기적이 삽시간에 무너지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당시 사람들은 영화 속 대사와 같은 심정이었다. “미련을 가지지 마. 나라가 망했잖아.”
-지금의 2030세대는 ‘이명박근혜’ 시대에 청춘을 보내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굴곡 많은 90년대에 20대였다는 경험은 창작자 장항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것 같나.
=어떤 시대의 좌절감을 간접적으로는 알 수 없다. 우리가 <라이프 사진전>에 가서 미국 대공황 당시 모습을 아무리 봐도 그 상황을 절절하게 느끼지는 못하는 것처럼. 하지만 90년대 당시에는 내가 그곳에 있었다. 정점에 올랐다가 추락한 사회가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생각과 감정을 안겨줬고, 지금도 창작의 재료가 된다. 원래 대학은 노는 곳이었다. 입학만 하면 내가 나중에 회사를 결정할 수 있었다. 회사에 들어가지 못한 애들은 경쟁률이 그다지 높지 않은 공무원 시험을 봤다. 하지만 IMF 시대 이후에는 대학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고난이 시작된다. 윗세대가 일찍 샴페인을 터뜨리다가 망했고 지금 세대에 큰 죄를 저질렀다. 엄청난 빚을 남긴 것이다. 영화 하는 사람들이 자꾸 IMF시대를 작품에 담아내려고 하는 이유가 그거다. 이건 실제로 느꼈던 절망이면서 현재 진행형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