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애니메이션의 거장 오시이 마모루 감독이 깜짝 내한했다. <공각기동대>(1995), <이노센스>(2004),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시리즈 등을 연출한 오시이 마모루 감독은 절제된 연출과 깊이 있는 메시지로 독보적인 스타일을 구축했다. 평소 여행을 즐기지 않는다는 그이지만 11월 25일부터 29일까지 일본국제교류기금 서울문화센터와 엣나인필름이 공동주최하는 ‘21세기 재패니메이션 기획전-오시이 마모루 감독전’에 참석하기 위해 특별히 한국을 찾았다. 그의 작품 11편이 상영된 가운데 26일에는 주성철 <씨네21> 편집장의 진행으로 오시이 마모루 감독과 이시카와 마쓰히사 프로듀서, 연상호 감독의 대담이 진행됐다. 26일 <스카이 크롤러>(2008) 상영 후 열린 대담은 오시이 마모루 덕후를 자처한 관객의 호응으로 팬미팅 현장을 방불케 했다. 이 자리에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성공한 덕후’는 연상호 감독일 것이다. 초등학생 때부터 오시이 마모루 감독의 작품을 챙겨봤다는 연상호 감독이 정성스레 준비한 질문을 중심으로 진행된 대담을 지면에 옮긴다.
오시이 마모루_ 오늘 본 <스카이 크롤러>는 어른과 아이의 경계에 있는 인물들을 그린 작품이다. 처음에는 전투기 활약이 돋보이는 화려한 액션영화를 생각했는데, 원작을 쓴 모리 히로시 작가를 만나고 영화 색깔이 많이 바뀌었다. 스토리를 의논하기 위해 그의 집을 찾았는데 천장에는 비행기 모형이 매달려 있고, 원숭이 인형만 모여 있는 방이 따로 있을 정도로 장난감이 많더라. 마당에는 기관차가 다니는데, 그걸 타고 이야기를 나눴다. (웃음) 그를 보며 어른의 마음에 있는 아이를 주제로 삼아야겠다고 결심했다.
연상호_ 감독님의 오랜 팬으로 이 자리에 왔다. <스카이 크롤러>는 전작 <이노센스> 이후 4년 만에 나온 작품이었다. 첫 티저 영상이 기억에 남는데, 주인공 칸나미가 스쿠터를 타고 있는 장면을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사실 티저라고 하면 작품의 화려한 시퀀스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은 점이 신선하고 좋았다. 전작들에 비해 대사도 적고 배경이나 레이아웃이 쓸쓸한 작품인데 그런 색이 잘 드러났던 것 같다.
오시이 마모루_ <스카이 크롤러>는 내 영화 중에 유일하게 문학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방향을 결정한 뒤로 전투기가 등장하는 공중전 장면을 많이 덜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넣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프로듀서가 그것만은 안 된다고 말려서 남겨뒀다. 개봉 후에 내 생각대로 감독판을 만들기로 했는데 아쉽게도 흥행 성적이 저조해서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있다. (웃음)
연상호_ 캐릭터 디자인에 대해서도 궁금한 부분이 있다. 캐릭터들이 묘하게 인형 같은 느낌을 주더라. 감정이 없어 보이는 캐릭터가 주는 낯선 느낌이 서사의 쓸쓸함보다 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오시이 마모루_ 아마 많은 분들이 캐릭터를 보고 놀랐을 거다. 전작의 캐릭터가 점차 리얼해진 것에 비해 이 영화는 심플하게 묘사했다. 눈에 많은 표정을 담고 싶지 않았고,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도 거의 없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텅 빈 세계를 그리고 싶었다. 넓은 하늘 아래 활주로만 길게 뻗어 있고,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 모를 인간들이 모여 사는 공간. 스탭들에게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마라. 그러나 결코 멈춰서는 안 된다”고 지시했다.
연상호_ <이노센스> DVD 코멘터리에서 작업 방식에 대해 듣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사이보그를 줌인하는 장면이다. 보통 그런 경우 한장을 그려 놓고 카메라를 가까이 다가가는 방식으로 표현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가까워지는 장면을 다 작화로 그렸다고 하더라. 그 장면을 보며 “점점 선이 얇아지고 있죠”라고 말하는데, 감독님은 정말 변태가 아닐까 생각했다. (웃음)
오시이 마모루_ 아마 나와 함께 작업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괴로운 경험을 했을 거다. 일반적으로 하지 않는 작업을 하는 일이 한번쯤 생긴다. 하지만 남들이 다 하는 방식에 맞춰서 영화를 만들면 똑같은 작품밖에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이다. 하나라도 좋으니 새로운 표현을 추구해야 한다. 나는 그걸 ‘발명’이라 부른다. 뛰어난 영화에는 반드시 한 가지 이상의 발명이 있어야 한다. 연상호 감독의 <부산행>도 그런 발명이 있는 작품이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벌어지는 좀비 소동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허를 찌르는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연상호_ 감독님의 고집은 원안과 제작을 맡은 <인랑>(1999)에서도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제작된 셀애니메이션인데, 엄청난 대작을 완성시키겠다는 의지가 읽힌다. 이쯤에서 이시카와 미쓰히사 프로듀서에게 질문하면 좋을 것 같다.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비용을 고려해야 하니 감독과 입장이 다를 수밖에 없다.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2>에서 특이했던 게 원작의 메인 캐릭터 대신 서브 캐릭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거다. 안전한 선택을 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나.
오시이 마모루_ 원작이 있는 작품이라 해도 원작과 영화는 전혀 다른 영역이라 생각하고 새롭게 점검을 한다. 무엇을 취하고 버릴지는 감독만이 판단할 수 있다. 팬 입장에서는 좋아하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아쉬웠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만 나는 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여겼다. 그리고 1편과 2편 사이에 3년이란 시간이 흐르지 않나. 그 시간을 표현하고 싶었다. 원래 애니메이션은 영원히 같은 시간이 흐르는 장르다. 후속편이 3년 뒤, 5년 뒤에 나와도 주인공은 나이를 먹지 않는다. 여기서 일부러 주인공이 나이를 먹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것도 나의 발명 중 하나다.
연상호_ 벌써 끝날 시간이다. 오시이 마모루 감독님 영화를 초등학생 때 처음 봤다. 아마 그때 누가 와서 “넌 20년 뒤에 오시이 마모루 감독을 실제로 만날 거야”라고 말했으면 절대 안 믿었을 것 같다. 오늘 목표는 단 하나다. 감독님께 사인 받는 거다. 뭘 가져올지 고민하다 <이노센스> DVD 하나만 가져왔다. 이야기 나누는 것만으로 감사한 시간이었다.
오시이 마모루_ 그동안 여러 나라를 갔지만, 한국만큼 젊은 관객이 많은 적이 없었다. 일본에서 상영하면 아저씨들만 가득하다. (웃음) 이번에 젊은 관객이 많은 걸 보고 진심으로 기뻤다. ‘아직 조금 더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가졌다. 자신감을 얻어간다.